아나클랜 게시판/링크/물물교환/파일공유/아나키즘 읽기자료
잡민잡론잡설/안티 다국적기업/관리자방/English

아나키즘저널발행준비위원회/투쟁과집/투쟁과밥/군대반대운동
아나키FAQ번역프로젝트/재활센터/여고생해방전선/전쟁저항자들

View Article     
Name
  dope 2002-06-19 15:04:16, Hit : 3643
Homepage   http://www.digitalmal.com/news/news_read.php?no=4451
Subject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지구 생명 파괴엔 공범"



김원식 할아버지가 디지털 말에 나왔군요.
할아버지 화이팅!

http://www.digitalmal.com/news/news_read.php?no=4451
=======================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지구 생명 파괴엔 공범”

김성환이 만난 사람 - 아나키스트 김원식    


2000년 9월 2일 63명의 비전향 장기수가 북쪽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얼마 전 그 중 어느 한 분이 김원식씨에게 전화를 걸어 물었다.

“어이, 안 가?” 김원식씨의 대답, “나, 안 가!”

간단한 문답이지만 이 안엔 많은 내용이 함축돼 있다. 전화를 건 사람은 김원식씨가 같은 비전향 장기수이기에 같이 가자고 권유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1958년에 체포돼 10년 동안 옥살이를 한 사상범이다. 그러나 사실 김원식씨는 이미 전향을 한 상태였다. 아니, 김원식씨의 표현을 빌리면 “공산주의(인터뷰를 위해 여러 차례 만나는 동안 그는 내내 공산주의라는 용어를 썼는데, 그것은 요즘 일반적으로 쓰는 용어로는 사회주의다)로부터 벗어난 상태”였다. 즉, 김원식씨는 전향서를 쓰거나 한 적은 없지만 그 자신의 내면에서 이미 사회주의 사상 및 북한과 결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비전향 장기수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릴 수 있었던 것은 왜일까. 그건 그의 50여 년에 걸친 사상편력을 들어보아야 이해할 수 있다.

남로당에 입당하다

그는 1923년 생으로 올해 나이 80이다. 해방되던 해엔 23세의 경성제국대학 학생이었다. 그의 투쟁경력은 국대안 반대투쟁으로부터 시작된다. 국대안이란 해방 후 미군정이 경성대학과 기타 전문학교들을 통폐합해 국립대학을 만들려는 계획안을 말한다.

“모두 반대했지요. 미국이 들어와서 경성대 총장이고 문교부 장관이고 다 미군들이 맡았어요. 우리는 너희들이 미국에서 교수나 해본 놈들이냐고 얕잡아봤죠.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미국은 자기네들이 38선 이남을 관리할 정책을 가지고 왔고, 미국의 패권주의에 입각해서 치밀하게 그걸 실행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당시 대학의 분위기는 좌익이 장악하고 있었다. 사회에서는 박헌영, 그의 비서 정태식 등 기라성 같은 좌익 인물들이 활약하던 시절이었다.

“다 빨갱이었어요. 빨갱이 아닌 사람은 한마디로 ‘쪽을 못 썼어요.’ 뒤에서 수군수군 했을 뿐 아무 힘도 없었지요. 국대안도 사실 공산당(당시 정확한 명칭은 남로당)이 경성대학을 좌지우지하니까 개편을 해서 분위기를 바꾸겠다 이런 측면도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다소 과장된 표현일 것이다. 해방 정국이 좌우의 치열한 대립으로 점철됐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의 사회분위기를 좌익이 주도하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1947년, 우여곡절 끝에 국대안이 실행돼 국립서울대가 발족하고, 문리과 대학에서 첫 학생회 선거가 치러지는데, 여기서도 좌우 양파의 대결이 벌어진다. 좌익 후보는 천관우(8, 90년대의 학생운동에서 학생회장은 실세가 아니었듯 당시도 천관우가 좌익은 아니었던 듯하다. 좌익의 실세 ‘세포’들은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고 한다), 우익 후보는 계훈제. 결과는 물론 좌익계의 승리였다. 그는 천관우 문리대 학생위원장 밑에서 총무부장을 맡는다. 이 시점에서 그는 첫 ‘별’을 다는 사건을 일으킨다. 미군정이 밀어붙인 학도호국단과 교련에 대해 반대투쟁를 주도한 것이다.



“문교부에서 학도호국단을 만들고 교련을 시작한다는 발표를 합니다. 천관우는 중립이었지만 나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일제가 패망했는데 군국주의를 또 하느냐는 것이었죠. 이런 주장을 문리대학보에 발표했는데 이게 문제가 됐어요. 결국 징계위원회에 회부돼서 제적이 됐어요. 서울대 제적생 1호가 된 겁니다. 제적 결정이 나고 학교를 나오니까 동대문서 사찰계 형사가 ‘갑시다’ 하는 거예요. 그래서 붙들려 갔죠. 별이 하나 붙은 거지요.”

그 ‘별’의 대가로 그는 남로당에 입당하는 ‘영예’를 안게 된다. 남로당 입당엔 꽤나 까다로운 절차가 요구됐기 때문이다.

“정식으로 별이 하나 붙으니까 상부선에서 사람이 내려와 일일이 물어보고, 물어본 것 또 물어보고, 복잡한 절차를 거친 뒤에 입당이 됐어요.”

전선에 자원하다

그가 남로당에서 맡은 직책은 학생구당 EC(사범대와 상대의 약자)지구당위원장. 그러나 남로당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남로당의 잇따른 과격투쟁과 미군정의 탄압으로 서울시당은 1948년이 되면서 와해된다. 이에 대한 그의 평가는 이렇다.

“남로당 간부 이승엽이 나중에 북에서 사형당하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남조선 당을 적 앞에 노출시켜서 깨먹었다는 거였습니다. 실제로 숨어 있어야 할 사람이 공개장소에 나가서 구호 외치고 삐라 뿌리고 했습니다. ‘비행기 데모’라고 해서 종로 사거리에서 몇 사람이 모여서 갑자기 왁작왁작 구호 외치고 팍 흩어지고 했는데, 보면 형사가 다 깔려 있거든요. 열 사람 하면 여덟 사람은 잡혀요. 잡히면 가서 두드려 맞고 그래봤자 일주일 내지 열흘 살고 나오지요. 하지만 그렇게 완전히 노출이 되니까 점차 다들 그만두는 겁니다. 한번 들어갔다 나오면 다음부턴 조직선에 나오질 않아요.”

하지만 그는 그런 연약한 활동가가 아니었다. 상부조직은 와해됐어도 홀로 하부조직을 관리하며 당을 지켰다.

“1950년 2월, 이주하와 김상룡 잡혔다는 게 보도되고 확실치 않지만 조직이 깨졌습니다. 상부선이 안 나오니 확실한 거지요. 그래서 하부선을 내가 관리했어요. 이거는 나중에 북에서 온 사람들이 엄청나게 높이 평가한 겁니다. 하지만 당원으로서 너무나도 당연한 일을 한 거였는데 당시 남로당의 수준으로는 희귀한 일이기도 했지요.”




마침내 6·25가 터진다. 남로당은 이미 북로당에 흡수된 이후. 6월 28일 잔존 조직원들이 서울대 문리대 교정에 다시 모인다.

“28일에 서울대 문리대에 흩어졌던 조직원들이 다 모였습니다. 활동 안하던 사람들도 다 나왔더라고요. 숨어 있던 세포위원장도 나타나고. 난상토론이 벌어졌죠. 서울에 그냥 남아 있어 보자는 사람은 내가 볼 때 당을 재건해서 한자리 해먹자는 비겁한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그때 내가 ‘모든 힘은 전선으로’라는 발언을 했어요. 그리고 나 스스로 전선으로 나갈 방법을 찾아나섰어요.”

이후 그는 의용군이 되어 대구지역까지 진격한다. 직접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전선 후방에서 ‘점령지’를 관리하는 정치지도원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9월 들어 인민군은 전면적 퇴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만약 이때 그가 북으로 넘어갔다면 어찌 됐을지는 상상할 수 없다. 그와 비슷한 많은 경우, 북으로 가서 높은 직책에 오르지만 6, 70년대를 거쳐 모두 숙청당하는 신세가 됐으니. 그 역시 북행을 결심했으나 이미 전선이 막혀 피난민으로 위장해 서울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자, 이제 현재 시점에서 그는 자신의 남로당 활동과 6·25에 대해 어떻게 정리하고 있는지 들어보자.

“어떻게 보면 난 출세주의자였습니다. 물론 남로당 활동은 위험했지요. 하지만 어렵게 구한 『자본론』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공산주의가 조선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방책이라는 확신이 들었지요. 확신이 있는 이상 죽음이 오더라도 각오하고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공산주의자로서 출세하는 길 아니겠습니까. 그런 욕심이 없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당시는 6·25를 조국해방전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전쟁에서 6백만 명이 죽었습니다. 이쪽에선 2백만 명이니 2백5십만 명이니 하지만 내가 본 미국 자료에 의하면 6백만 명입니다. 결국 우리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양대 냉전세력을 위해 대리전쟁을 한 겁니다. 이승만 뒤엔 미국이, 김일성 뒤엔 소련이 있었던 것이죠.”

사회주의와의 결별



그러나 그가 이런 결론에 도달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다시 1952년으로 돌아가보자. 그는 서울로 돌아와 신분을 속이고, 주민등록증을 발급받는 등 ‘합법 지위’를 획득한다. 그리고 불굴의 투지로 ‘세포’ 활동을 재개한다. 좌익이 세포란 용어를 쓰는 것은 그 자신이 자율적으로 생존하고 복제를 거듭한다는 데서 유래한 것일 터. 그는 지하조직을 만들어 계속 당 활동을 지속한다. 그것이 ‘공산주의자’의 소명이라고 믿으며. 이렇게 활동하다 끝내 1958년에 검거된다. 검거 당시 그에게 붙은 현상금이 당시 돈으로 2천만 원이라는 거금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 10년 동안의 수형생활을 하고 1968년 출감한다. 그의 나이 이미 46세. 그는 결코 전향하지 않고 사상의 순결성을 지켜냈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는다는 불혹의 나이를 훌쩍 넘긴 뒤였지만 이때부터 그는 세계 정세를 주시하며 20년 넘게 자신이 지켜온 사회주의 사상과 체제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1958년 감옥에 들어갈 때 1956년 소련 당대회 문건을 머리 속에 다 집어넣고 들어갔어요. 그걸 기준으로 세계정세를 보는 겁니다. 해를 거듭함에 따라 아, 흐루시초프가 빗나가는구나, 안 맞는구나 하는 판단을 내린 거예요. 공산당은 먼저 정치혁명을 합니다. 다음에 경제혁명, 사회혁명, 문화혁명 이런 단계로 나갑니다. 그런데 경제혁명 단계에서 안 되는 거예요. 소련에서 나온 경제학 교과서를 봤어요. 자본주의를 분석하는데 1929년 대공황을 기준으로 삼고 있어요. 그런데 2차대전 이후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미국과 일본경제를 보면 그런 법칙 속에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만성적 공황이나 만성적 경제침체는 있지만 1929년 같은 대공황은 없는 거죠. 물론 케인즈이론이 적용되는 뉴딜정책 이런 것들도 있고요.”

이런 고민을 거듭하기 몇 년, 1970년대 중반 불현듯 그의 머리를 때리는 것이 있었다. ‘환경’ 문제였다. 당시 남한엔 환경문제에 대한 인식은 전무했고 당연히 환경운동도 존재하지 않던 때였다. 이 점에 대해 그는 스스로 자신이 ‘정치감각이 탁월하다’고 평가한다. 어쨌든 그는 환경문제에 관한 외국서적들을 탐독하기 시작했고 1980년대 들어 국내에서 태동하기 시작하는 환경운동에 처음부터 참가해 활동하기 시작했다.

“1950년대 말 1960년대 초가 되면 서구와 미국의 경제가 커가면서 공해문제가 생겨요. 1964년에 레이첼 카슨이라는 사람이 ‘봄은 왔는데 새가 울지 않는다’는 명제의 책을 내요(『침묵의 봄』이라는 이 책은 우리나라에선 최근에야 번역, 출판됐다). 지금은 환경문제의 고전이 돼 있죠. 이어서 메레이 북친이라고 하는 사회학자가, 지구가 망가지고 있는데 그 주범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둘 다라고 주장합니다. 두 체제가 경쟁적으로 지구 생명을 파괴하고 있다는 거죠. 나는 이런 저술들을 접하면서 ‘아, 이거다. 내가 찾던 길이 바로 이거다’ 하고 무릎을 쳤습니다.”



글 첫머리에서 그가 자신이 ‘전향’을 한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로부터 벗어났다’고 표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전향을 한 것이 아니라 둘 다 부정하는 새로운 길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도달한 사상은 아나키즘. 현재의 그를 표현하자면 에코아나키스트쯤 된다.

“아나키즘이란 나와 남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긍정하고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건 체계도 아니고 체제도 아닙니다. 도달하기 쉽지 않은 완벽한 자율상태를 말하는 거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다 국가주의로서 자연을 경쟁적으로 파괴하는 데서 동일합니다. 이 두 체제를 부정하는 것 즉, 국가주의를 부정하는 것이 아나키즘이죠. 자본주의를 긍정하는 아나키즘은 가짜입니다. 우리나라에 이런 가짜들 많아요.”

에코아나키즘을 넘어

그는 여전히 유물론자이다. 하지만 ‘과학적 사회주의’와 ‘사적(史的) 유물론’은 폐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1989년 소련 붕괴로 사회주의는 ‘과학’이 아님이 입증되었다. ‘역사 발전’에서 퇴장당했으니까. 북한에 대해서도 감옥에 있을 때는 김일성을 생각하면 눈물이 흐를 정도였으나 지금은 6·15 남북정상회담으로 북이 죽지 않고 살아날 길이 겨우 열린 것으로 냉정하게 바라본다.

그는 이번 취재과정에서 『말』 편집부에 두 번 들렀다. 사무실은 마포구에 있는데 그는 한 번은 지하철 5호선 공덕역에서 내려 걸어왔고 또 한 번은 6호선 대흥역에서 내려 찾아왔다. 대흥역에서 오는 길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었다고 한다. 팔팔한 젊은이라면 모르지만 지팡이를 짚은 80세 노인이 가보지 않은 길을 굳이 시도한 것은 그의 표현에 따르면 “항상 새로운 길을 추구하려는 정신자세” 때문이다. 그는 해방된 조국에서 새로운 사조인 사회주의를 향해 기꺼이 몸을 던졌다. 그러나 현실 사회주의체제가 모순을 드러내 보이자 또한 과감하게 그것을 버렸다. 지금 그가 에코아나키즘에 몰두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그의 거침없는 도전정신의 소산일 것이다. 이제 겨우 40세가 넘은 나이로 “살만큼 살아본 것 아닌가”라고 자조하곤 하던 내가 그 앞에선 문득 부끄러워진다.  





Copyright 1999-2018 Zeroboard / skin by lifes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