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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스코프스키 2007-07-20 09:00:41, Hit :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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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펌/도서리뷰]전쟁을 팝니다 & 진보와 야만에 대한 네티즌 리뷰
원 도서는 제시한 주소로부터 보실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한국에서 절대적 위치의 권력을 논한다면 그것..  2007/03/14  

  
romanlaw 리뷰로그 > 이성으로 비관하되 의지로 낙관하라! [0]  

  
  누군가가 한국에서 절대적 위치의 권력을 논한다면 그것은 분명 대통령이나 국회, 언론사 등을 얘기할 것이다.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절반의 긍정과 절반의 부정이다. 과거 대통령들이 제왕적이고 많은 힘을 휘둘렀지만 현재에 와서는 누구나가 ‘노무현 탓’을 외치며 대통령 욕하기에 바쁘고 실제로 대통령은 많은 권력을 사법부와 입법부로 내놓았다. ‘국회’는 국민의 직접 선거에 의해 선출되고 민의에 귀를 기울이며 이를 입법 하는 국민의 대리인이지만(사실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이지만), 이들 역시 다양한 감시자들의 눈을 통해 제어할 수 있다. 언론 또한 몇몇의 특정 언론사가 70%의 시장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 여론을 조작, 형성할 수 있다는 데 위협으로 다가오지만, 다른 언론사, 국회, 정부, 그리고 시민들에 의해 적절히 제어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국에서는 분명히 절대 권력층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며 이들은 어느 누구로부터도 간섭 따위를 받는 일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신을 상품화하여 거대 이윤을 남기는 몇몇의 대형화, 시장화된 일부의 기독교 집단과 각종 군수 이권에 독점적으로 참여하며 정부로부터 많은 지원금을 타내고 세금 한 푼 안내는 군수산업체와 군인이권 도모단체가 있다. 나는 이들이 대한민국의 진정한 특권층이라 말하고 싶었다.






  몇 일전, MBC의 ‘시사매거진2580’에서 20여 년 동안 독점적 지위 아래 방독면을 군에 납품해온 군수업체가 그들의 이권만을 챙기며 불량의 쓰레기 방독면을 만들어 납품했고 어떠한 기술 개발도 하지 않았다는 데 크게 놀란 적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점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미국 또한 군수업체와 그와 관련된 복합적인 여러 집단에서 벌이는 대규모의 이권 행사와 국가권력에의 개입이 우리나라 보다 더욱 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실 2004년 즈음에 김동춘 교수가 지은 「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을 통해 미국 군수업체의 실상을 알게 되었고 그들이 지배하는 미국 경제와 미국 사회 전반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실버스타인의 이 책, 「전쟁을 팝니다」는 김동춘 교수의 저서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몇몇 인사와 몇몇 군수업체가 벌이는 전쟁 비즈니스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를 상세히 알려주는 사례집이라 할 수 있겠다.






  미국 군수업체의 성장 배경은 두 차례에 걸친 세계 대전이다. 당시 미국은 유럽에서 발발한 전쟁을 통해 자국 내에서는 아무런 피해 없이 군수 물자를 생산하며 막대한 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 또한 세계 제 1의 경제 대국이 된 미국에게 패권을 추구하기 위한 군사력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였기 때문에 미국 정부는 다양한 무기 시스템을 도입하고 이에 대한 기술 지원의 대가로 상당한 세금이 군수업체에게 흘러들어갔다. 곧 군수업체의 시작은 미국의 필요에 의해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무기를 도입하기 위해서는 이미 만들어진 무기체계를 팔거나 폐기처분해야 했다. 미국 정부는 군수업체의 편의를 봐가며 다른 나라와의 협상을 통해 군수업체의 구형 무기를 팔아넘기고 때로는 그들 스스로 무기를 구입하여 그들의 동맹국 혹은 반군에 지원했다. 그리고 그러한 행태는 지금도 계속되어 2002년 부시 대통령의 방한 때 한국의 전투기 사업, 이른바 FX 사업에 F-15 전투기 도입에 압력을 넣었다. 위의 과정에 따라 군수업체는 그 끝을 모르고 계속해서 성장해 가고 있는 것이다.





  사실 군수업체에 위기가 찾아온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레이건 행정부 당시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부르며 ‘전략방위구상’, 이른바 ‘별들의 전쟁’을 추진하면서 군수업체는 최대의 호황을 맞이했다. 미 본토나 해외의 동맹국, 미군 시설에 날아오는 미사일을 대기권 밖에서 레이저와 같은 무기로 파괴하려는 이 엄청난 시도는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안보를 명목으로 하여 추진되었고 군수업체에 엄청난 세제혜택과 국고(세금)보조가 지원 되었다. 그러나 최대 호황을 맞이했던 때와 더불어 소련의 몰락이 이어지고 냉전이 해체되면서 미국은 단일 패권국이 되었으며 이에 따라 주적 개념이 사라지게 되었다. 따라서 국방부와 군수업체, 언론, 정치권, 정부에서 군수업으로 이익을 보던 사람들은 그들이 맞게 된 위기를 타파하고자 새로운 안보위협을 창출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이에 따라 새로운 위협으로써 테러(국가), 적성국가, 불량국가 등의 개념을 만들어내며 시민들의 안보불감증을 자아내게 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테러의 의한 미국 본토의 공격 이후 부시 행정부가 적극적으로 미사일방어망 체제(MD) 구축에 노력하면서 제2의 별들의 전쟁, 즉 군수업체의 호황을 가져오게 했다.






  또한 2000년대에 들어와 주목할 점은 군수업체가 기존의 군 물자 제작, 설비, 보급, 유통과 같은 일반적 군수업을 뛰어넘어 민영화된 군사조직을 갖춘 새로운 형태의 기업으로 변모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용병이 과거 기원전 시기의 아테네, 카르타고 전쟁부터 있어왔고 현재의 작은 국지전이나 분쟁에 투입되어 큰 활약(?)을 펼친 것으로 알려졌지만 국가 차원에서 이들을 이용하게 된 것은 ‘이라크 전쟁’이 그 시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개별 국가들이 민주화되고 통신의 발달과 맥을 함께해 ‘지구’라는 하나의 사회가 거리상으로 좁혀지고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됨에 따라 자국의 활동이 그들 국가의 국민 하나하나와 세계의 여론에 큰 부담을 갖게 되었다. 이는 곧 개별 국가의 활동 범위를 축소시켜 그들에게 새로운 출구를 필요로 하게 했고 이에 따라 민영화된 기업이 전쟁에서 직접적으로 부각되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이제 국가는 군에서의 사상자 수에 민감해할 필요 없이 민간 기업을 이용하여 그들의 전쟁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고 법적 구속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게 되었다.






  전쟁을 통해 먹고 사는 죽음의 상인들. 그 속에는 군수업체가 있고 군수업체와 국방부의 커넥션을 제공하는 예비역 장성들, 그리고 이들을 통해 로비를 받는 정부 관료와 정치권 인사들, 안보 위협을 극대화하여 군수산업에 더 많은 지원금을 제공하려는, 그리고 그게 곧 자신의 실질적 이익이 되는 학자들과 이론가들. 그리고 새롭게 민영화된 용병 기업들이 포진해 있다.






  그들의 ‘프로파간다’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진지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당신의 세금으로 살상무기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생각해보라!) 이는 곧 당신의 세금이 감액될 수도, 혹은 국방 예산 감축과 함께 복지 예산을 증액하여 사회적 약자를 보호할 수도 있는, 당신에게 직접적으로 연관된 일이기도 하며 더 나아가서는 인류의 공존과 번영, 평화를 위한 길이기도 하다.










  ※ 먼저 읽으면 좋은 책 ; 「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 김동춘 저, 창비 출판사





2007.3.13 열세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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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이브 폰팅은 재밌는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 그것은 귀.. 2007/05/01  

  
jmh5000 리뷰로그 > 달님은 어찌 그리 고우신지 [2]  

클라이브 폰팅은 재밌는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 그것은 귀스타브 플로베르가 사망 시에 남겼던 미완성 소설 <부바르와 페퀴세>에 관한 것이다. 그 소설에 등장한 두 명의 서기관은 궁극적인 깨달음에 도달하기 이전에 각자 인류의 미래를 논의한다.

이때 부바르는 인류의 미래를 장밋빛으로 봤다. 현대인은 ‘진보’할 것이며 그에 따라 전쟁과 갈등이 과거의 일이 되고 모든 문제는 합리적인 토론 등으로 해결될 것이라고 예측한 것이다.

반면에 페퀴세는 인류의 미래를 ‘음울’하게 봤다. 현대인은 기계가 돼가고 있으면 과도한 개인주의와 과학의 망상에 의해 야기된 야만성 등으로 세계는 종말을 맞이할 것이라고 했다. 누구의 예측이 맞는 것이었을까?

밀레니엄 시대가 시작된 지도 벌써 7년이 지난 지금, 클라이브 폰팅은 <진보와 야만>에서 20세기를 돌아보자고 말한다. 우리에게 20세기가 어떤 시간이었는지, 인간에게 그 시간은 어떻게 기억될 것인지를 논해보자는 것이다.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불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해야 한다. 21세기는 20세기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클라이브 폰팅은 <진보와 야만>에서 20세기를 경제사와 사회사, 국제사와 국내사 등의 다양한 소주제를 갖고 파헤치고 있다. 물론 그것들을 하나로 묶는 주제는 있다. ‘진보’와 ‘야만’이다. 20세기 인류는 진보했는가? 그렇다.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자동차, 핸드폰, 컴퓨터 등 다양한 문명기계들이 등장 해 사람들의 삶을 풍족하게 해줬다.

생산력의 증가는 어떨까? 경작 토지가 하락하고 노동력이 더욱 줄어들어도 산출량은 늘어났다. 세계화를 이끌던 국가들 같은 경우 정부 지원과 보호, 기계화 등으로 그것을 더욱 공고하게 다져나갔다. 또한 1900년대가 시작되던 때에 세계의 많은 이들이 문맹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문맹률은 떨어지기 시작했다. 교육의 성장이 있었던 것이다.

20세기 초를 지배하던 ‘제국주의’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라졌다. 20세기 초만 해도 세계의 많은 국가들이 강대국들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그때, 우리 또한 식민지였으니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여성의 인권신장도 마찬가지다. 그때 여성들은 선거에 참여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가능하다.

이런 자료들은 20세기에 인류가 ‘진보’했다고 말하는 자료가 될 것이다. 이전 세기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여러 분야에서 거대한 생산력의 증가가 있었고 인구는 증가했으며 인간 수명이 획기적으로 연장된 것 등은 확실히 그렇다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클라이브 폰팅은 20세기의 역사에서 ‘야만’의 얼굴 또한 찾아내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들은 ‘진보’라는 단어와 함께 하고 있다.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다양한 무기들이 만들어지게 됐다. 그 무기들은 과거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 세계대전이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생산력의 증가는 전체적인 수치로 보면 증가한 것처럼 보이지만 지역별로 보면 문제가 있다. 실질적으로 진보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서유럽이나 북아메리카에 국한됐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에서 장 지글러가 지적했듯이 지금도 아프리카에서는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다. 물론 그것은 고도의 정치적인 계산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제국주의도 표면적으로 사라졌지만, 또 다른 제국들이 나타나고 있다. 아룬다티 로이도 <보통 사람들을 위한 제국 가이드>에서 지적했듯이, 미국과 글로벌기업들이 또 하나의 제국이 되어 인류를 위협하고 있다. 국가 폭력은 어떨까? 지금도 버젓이 국가들은 전쟁을 준비하고 있으며 미사일을 쏘아대고 있다. 환경은 어떨까? 환경 문제를 “심각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어느 때보다 심각하다.

그렇다면 클라이브 폰팅은 20세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소수에게는 진보, 다수에게는 야만’이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맞는 말일까? 부정하기가 쉽지 않은데 클라이브 폰팅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말하고 있다. 20세기의 그런 모습들이 21세기에도 반복될 확률이 높다고 말이다. 장밋빛 미래라는 것도 소수의 말일 뿐이며, 다수에게는 여전히 야만의 시대가 지속된다는 진단을 내린 셈이다.

<진보와 야만>이 건네는 말들은 페퀴세의 전망처럼 ‘음울’하다. 그 정도가 심각한지라 소설이라고 믿어버리고 싶을 지경이다. 하지만 <부바르와 페퀴세>와 달리 <진보와 야만>은 소설이 아니다.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거울이다. 그 거울을 어찌 대할 것인가? 보기 싫다고 깨트릴 것인가? 아니면 다른 모습을 비추게 만들 것인가? 진보가 야만의 또 다른 이름일 수도 있음을 깨달은 사람만이 그 답을 찾을 수 있으리라.  

이상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php?bid=2856455&menu=nview&display_seq=924203&sort=best&page=1&find=off * 보스코프스키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07-20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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