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w Article     
Name
  돕헤드 2007-07-30 00:04:36, Hit : 1325
Subject   여성주의와 아나키즘의 만남을 위하여
여성과 국가
- 여성주의와 아나키즘의 만남을 위하여

세상에 n개의 여성주의들이 있듯이 n개의 아나키즘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다양한 여성주의들이 있다면 그들 사이에 공통점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을까요? 이에 대한 답은 우리 각자의 몫입니다. 저는 아나키즘에 대해 말해보겠습니다.

다양한 아나키즘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서로 모순되기도 합니다. 보통 무엇을 중시하느냐에 따라 가지들이 갈리게 됩니다.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에서 집단, 무리, 공동체 또는 사회가 주가 되는가 아니면 개인이 주가 되는가에 따라 여러 개의 아나키즘으로 갈립니다. 이들 중 어떤 것이 아나키즘이고 어떤 것이 아나키즘이 아닌가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은 내 관심사가 아닙니다. 저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존재가 스스로를 아나키스트라고 생각하고 아나키 실천을 하면서 아나키즘을 고민하면서 그것을 펼쳐 나간다면 그의 실천이 아나키냐 아니냐 따지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와 그 존재가 어떤 활동과 실천을 함께 할 수 있는가, 그리고 함께 투쟁하는 과정은 얼마나 자발적이고, 창의적이고, 자유로우며 열정적인가 그래서 함께 만들어갈 사회와 그 사회 속에 위치한 개인들은 어떤 모습을 하게 될까에 대해 얼마만큼의 의견 일치를 이룰 수 있는가 살펴보면서 실제로 공동으로 실천을 해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회를 만들어 가는가는 우리가 어떻게 활동을 하는가, 어떻게 실천을 하는가와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어떤 투쟁을 조직하거나, 어떤 캠페인을 벌이거나, 어떤 기획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그 처음부터 끝까지의 과정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그 과정에 우리가 이루려는 사회의 맹아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운동하는 모습이야말로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사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위계질서가 고착화된 사람들이 위계적인 방식으로 운동을 할 때 그런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사회는 여전히 위계적일 것이라고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권력지향적인 조직이 해방투쟁을 열심히 해서 어떤 사회를 변혁시킨다고 할 때 그 변혁된 사회는 새로운 권력을 만들어내고 그 권력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작동할 것이라고 우리는 추측할 수 있습니다.

여성주의와 아나키즘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위계질서를 거부하고, 평등한 관계에서 자유롭게 소통하고 서로 도우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구체적인 사회는 매우 군사화되어 있고 가부장적인 자본주의 국가체제로서 위계질서가 사회의 모든 관계들에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위계질서는 극소수의 강자와 절대다수의 약자로 짜여져 있습니다. 이런 관계 속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존재들은 자신의 위치를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서로 경쟁을 해서 보다 높은 위치로 오르려는 욕망을 자연스럽게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현 체제에서 높은 위치란 돈과 권력이 보장해주는 것이죠. 위계질서를 거부한다는 것은 결국 매우 폭력적인 경쟁을 통해 이윤과 권력을 추구하도록 구조화되어 있는 이 군사화된 자본주의 가부장 국가를 거부하는 것이 됩니다. 여성주의와 아나키즘이 둘 다 모두 능동적이며 해방적인 실천인 이유는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감으로써 또는 새로운 사회를 조직함으로써 기존의 위계질서를 허물어뜨리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사회적 약자들의 연대로 가능하게 됩니다. 이것은 아래로부터의 변혁입니다.

기존의 여성주의에서는 국가에 대한 치열한 인식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아나키즘에서는 여성주의가 매우 부족했던 것, 또는 없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저는 일단 아나키즘에서 여성주의가 부족했던 것, 시각을 한국으로 좁혀 보자면 한국의 아나키즘에서 여성주의가 없었던 이유는 한국, 조선반도 나아가 동아시아 지역에서 활동했던 아나키스트들 가운데 여성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나키즘은 철저히 남성들의 담론이었고, 아나키 실천은 남성들의 몫이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많은 아나키스트들이 비주류도 아닌 주류 남성들의 이데올로기였던 유림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사회적 약자들의 연대를 통해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자각한 엘리트들의 계몽적이고 선구자적인, 이른바 지사적인 활동을 통해 목적을 달성하려는 당시의 경향을 잘 보여줍니다.

우리는 민족주의가 주류 남성들만의 사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국가주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민주주의 국가체제란 근대 서구의 산물로서, 애초에 여성은 국가에 포함되지도 못했습니다. 민족과 국가로부터 배제되어 있었던 것이죠. 근대국가의 태동에서부터 여성들은 철저히 투쟁을 통해 국민으로 조금씩 편입되어왔습니다. 참정권을 얻은 과정이 그랬습니다. 사회적 약자들이 헌법상의 동등한 권리를 얻기 위해 벌이는 투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민족주의가 서구 침략적 제국주의의 폭력을 극복하기 위한 저항의 수단이었다고 하지만 그 저항적 민족주의자들이 만들어낸 해방국가라는 것은 같은 혈통 출신의 비장애인 엘리트 남성들이 권력을 유지하는 체제에 불과했습니다. 아나키스트들도 이런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채 남성 엘리트들에 의해 전유되어왔으며, 한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아나키 실천도 거의 끊어져버리고 교수와 박사 남성들의 연구대상인 초라한 아나키즘으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저주받은 아나키즘이죠. 그리고 여성주의가 부재한 아나키즘은 이렇게 흘러갈 위험을 안고 있었습니다. 아나키즘이 여성주의와 만나야 하는 이유는 가부장제 사회를 바꾸려는 아나키스트로서는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가부장제의 억압을 느끼지 못하는 남성들이 만들어가는 사회는 또다시 여성들과 사회적 약자들에게 매우 억압적인 사회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여성주의에서 국가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부족했던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내가 보기에 그것은 국가가 주요 관심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국가란 하나의 정치체제로서 어떤 거대한 공동체로서 일상적이고 미시적인 관계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기 보다는 뭔가 거대담론을 추구하고 아래로부터의 변화가 아니라 위로부터의 개혁을 욕망을 가진 자들에게 어울리는 짝으로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합니다. 그러니까 내 일상에서 국가를 지우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굳이 국가라는 것을 붙잡고 씨름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훨씬 더 급박하고 절실한 문제들이 많고 그런 문제들을 다루기에도 벅차고 시간이 모자란데 국가라는 추상적인 것을 갖고 고민할 만큼 우리들이 한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국가는 온 사회를 위계적으로 짜놓은 체제입니다. 미시관계들에 있어서의 위계질서의 총합이 국가인 것입니다. 그것은 위로부터 강요된 것입니다. 개인들은, 특히 여성들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은 국가 선택의 자유가 없습니다. 복속을 강요당할 뿐입니다. 국가간 이동의 장벽은 사회적 약자들에게 너무나 높습니다. 그러하기에 국가는 폐쇄적이고 억압적인데, 문제는 국가라는 것이 끊임없이 위계질서를 심어놓는다는 점입니다. 끊임없이 법을 만들고 준법을 강요합니다. 충성을 맹세하라고 합니다. 머리 위에 어떤 존재(지도자, 아버지 또는 사장님. 즉 남성, 또는 남성화된 존재)를 놓아두고 머리를 조아리라고 합니다. 국가체제가 무서운 것은 그런 과정이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것처럼 자발적으로 일어나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많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이 이런 작업을 수행합니다. 그것은 명령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현 체제의 자체적인 논리(자본주의 국가체제를 영구히 유지하려는 욕망) 때문에 실시간 반복되고 있는 질서입니다. 우리가 구조를 완전히 뜯어고치는 실천을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여성주의는 차별이 없는 관계를 만든다고 할 때 차별을 구조적으로 재생산하는 국가체제를 가만히 놔두고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개별 국가기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또는 국가정책에 참여할 것인가 아니면 국가의 실천을 무시할 것인가 등등의 문제가 제기됩니다. 예를 들어 여성부가 처음 만들어질 때 여성주의자들의 입장은 무엇인가 입니다. 국가인권위원회를 만들 때 인권활동가들이 고민하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지요. 여기서 ‘현실주의’를 한 번 따져보고자 합니다. 외교와 안보를 이야기할 때 자주 등장하는 이 현실주의란 나름대로 정리해보자면 국가체제란 우리가 피할 수 없는 현실이고, 그렇다면 거기에 참여해서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도록 힘을 쏟아야 한다 정도가 될 듯 합니다. 평화활동가들도 이 현실주의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있더군요. 그러니까 국가의 힘을 부정하거나 무시해서는 아예 아무런 결과도 얻을 수 없고, 실제적이고 유의미한 성과를 얻기 위해서는 현실주의적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다고 항변하는 활동가들도 있더군요. 파병이나 안보 문제 등과 관련해서 뿐만 아니라 여성이든 인권이든 현실주의적 경향은 많은 사람들의 머리 속에 뿌리 깊게 자리를 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현실주의는 국가를 비판하면서 국가의 역량에 의지한다는 본질적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국가의 문제를 국가로 푼다는 것이 현실주의라면 현실주의란 실은 국가현실주의이며, 더 나아가 본질적으로는 국가현실보존주의인 것입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국가주의에 깊게 물든 교육을 받아왔습니다. 반공주의는 그 극악한 형태인데요, 반공주의를 떨쳐버린 많은 사람들도 국가주의를 떨쳐버리는 데까지는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실천을 하거나 어떤 행동을 할 때 국가의 바깥에 마치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인식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안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국가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고, 외부가 없는 완전한 우주일지는 몰라도 국가의 바깥으로 밀려난 존재들에게 국가는 억압적인 현실일지언정 대안은 아닐 것입니다. 국가라는 철저히 이성애 비장애인 주류 남성 중심의 체제에서 늘상 체제의 주변부로, 때로는 바깥으로 쫓겨나는 사회적 약자들은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요? n개의 여성주의가 있다면 이에 대해서 n개의 답이 있다고 해야겠군요.

국가란 약자들에 대해 배제와 통합을 반복하면서 소수 강자들의 주도권을 유지시키는 체제라고 한다면 그 바깥으로 나가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현실주의의 달콤한 떡고물(현실주의 입장을 채택한 약자에게 돌아가는 것은 단지 떡)을 과감히 던져버린다면 우리는 국가 바깥에 펼쳐져 있는 무한한 가능성에 비로소 주목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바깥으로 나가본다는 것은 새로운 영역으로 들어서는 것이며, 새로운 주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 새로운 주체가 여성이 된다는 것이야말로 지금 내게 여성주의와 아나키즘이 만나는 방법인 것입니다.

* 보스코프스키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07-30 23:22)

 Prev    여기 감금된 지하 1층에서, 다시 인간답게 살기 위해 나선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 연대를 호소합니다
돕헤드
  2007/07/30 
 Next    [프로메테우스]이민의 나라가 이민을 막을 때
보스코프스키
  2007/07/27 



Copyright 1999-2020 Zeroboard / skin by lifes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