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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스코프스키 2007-06-14 09:40:37, Hit : 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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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도끼]인문학, 대중과 함께 희망 만들기(대학원보)
인문학, 대중과 함께 희망 만들기(대학원보)  

얼 쇼리스. 고병헌․이병곤․임정아 옮김. 2006. 『희망의 인문학』. 이매진.

마셜 B. 로젠버그 지음. 캐서린 한 옮김. 2004. 『비폭력 대화』. 바오출판사.

파울로 프레이리․마일스 호튼. 프락시스 옮김. 2006. 『우리가 걸어가면 길이 됩니다』. 아침이슬.




한국의 인문학이 위기라는 말은 이제 식상하다. 그리고 대중과의 소통, 교감이 부족했다는 자기반성도 이제는 좀 지겹다. 그런 자기반성에는 누구와 어떻게, 무엇을 소통하지 못했다는 구체적인 평가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녕 그것이 위기를 불러왔을까? 내가 보기에 위기는 지식인들이 가난을 고민하지 않고 사회의 양극화를 방치했을 때, 그래서 공동체가 무너지고 무한경쟁과 불안이 지배하게 되었을 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가진 자들의 오만함(한화그룹 사건)과 경쟁에서 뒤쳐진 사람들의 절망(신빈곤)이 공존하는 사회, 초등학생이 경쟁에 내몰려 자살하는 사회에서 무슨 배부른 인문학 타령인가? 이제 인문학은 위기를 논하기에 앞서 자신이 설 자리를 먼저 만들어야 한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인문학이라 불리는 클레멘트 코스를 만든 얼 쇼리스는 감옥에서 만난 한 여인에게서 영감을 얻었다. 당신은 왜 가난한가라는 질문에 여인은 돈이 아니라 “연극이나 박물관, 음악회, 강연회 등”이 가난의 이유라고 말했다. 『희망의 인문학』은 가난하고 배제된 이들을 다시 이 사회의 시민으로 만들려면, 그래서 사회를 바로 세우려면 인문학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가난은 자선이나 동정, 적선으로 해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스스로 가난하다고 시인하고 인정할 때, 그리고 그러한 상태에서 그들을 끄집어낼 정치적 대책이 전혀 없을 때 비로소 가난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구나 아는 말, 물고기를 주지 말고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사회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물고기만 주며 그들을 길들여 왔다. 그래서 클레멘트 코스는 가난한 이들에게 민주주의라는 낚시질을 가르쳐서 그들을 시민으로 만들려 한다. 쇼리스에게 인문학은 가진 자들의 장식품이 아니라 가난하고 배제된 이들이 그 소외의 강을 건너 사회로 복귀하는 징검다리이다.



인종갈등과 공공갈등의 상황에서도 인간이 서로를 이해하고 욕구를 해결하도록 로젠버그는 비폭력대화를 개발했다. 비폭력대화는 아주 간단한 원칙을 따른다.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는 구체적 행동을 관찰한다. 관찰한 바에 대한 우리의 느낌을 표현한다. 그러한 느낌이 들게 하는 욕구, 가치관, 소망 사항을 찾아낸다. 우리 삶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 구체적인 행동을 부탁한다.” 즉 비폭력대화는 평가하지 말고 관찰하고, 느낀 바를 정확하게 표현하며, 자신의 욕구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상대에게 부탁한다.



아주 간단한 원칙 같지만 그 원칙을 따르기란 쉽지 않다. 약속시간에 20분을 늦은 친구에게 우리는 “넌 매일 늦니.”라며 짜증을 낸다. 비폭력대화를 적용하면 어떻게 얘기해야 할까? “지금 시간이 1시 20분이니 원래 약속시간보다 20분 늦었네. 약속시간이 지날수록 네게 무슨 사고가 생겼을까 많이 불안하고 초조했어. 내가 너를 걱정하지 않도록, 그리고 네가 나를 존중한다는 의미로 약속시간을 지켜주면 어떨까, 내 얘기를 어떻게 생각해?” 단 5자의 비난이 비폭력적으로 공감을 끌어내려면 100자 가량의 말로, 그것도 어색하고 쑥스러운 말로 바뀌어야 한다.



사실 폭력적인 대화는 지배계급이 가난한 사람들을 쉽게 다루기 위해 만들어낸 언어로, 노예가 자신의 욕구를 밖으로 드러내지 못하게 하고 규율을 따르게 한다. 똑같이 고통받는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게 하고 연대를 가로막는다. 그리고 이처럼 원하는 바를 솔직하게 드러내거나 남의 얘기를 공감하며 듣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폭력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로젠버그는 이 사슬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훌륭한 지식이 아니라 솔직한 대화에서 찾는다. 마찬가지이다. 인문학이 대중과의 소통을 원한다면 객관성과 중립성을 들먹이지 말고 자신의 욕구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대중의 욕구를 귀담아 들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가난한 이들의 시민됨을 거부하는, 소통을 거부하며 폭력과 부정적인 언어를 강요하는 강력한 세력들은 여전히 강력하다. 이들은 새로운 인문학을 원하지 않고 여전히 자신들만의 권위와 언어로 구성된 학문을 주장한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소통만이 아니라 싸움이 필요하다.



민중교육가 마일스 호튼과 파울로 프레이리는 “학교체제 내부와 외부의 양 전선에서 체제에 맞서 싸우는” 노력이 필요하고 민중을 위해서(for)가 아니라 민중과 함께 해야(with) 한다고 강조한다. 즉 “전문가가 사람들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일러주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사람들로부터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힘을 앗아가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근본적인 사회변화를 위해 지식인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민중이 지닌 지식과 경험을 존중하고 민중이 스스로 생각하도록 도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인문학은 인간을 위한 학문일 뿐 아니라 인간에 의한 학문이어야 한다.



물론 새로운 정보나 지식을 다른 사람보다 많이 가진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단지 그 이유만으로 그가 절대적인 권위나 힘을 가질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세상의 지식은 서로 얽혀 있고 어떤 부분의 탁월함이 다른 부분의 무능함으로 상쇄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간이 서로에게 불완전한 존재라는 점을 인정하는 사회를 만들 때, 억눌린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 잡은 자기비하와 모멸감, 증오심은 사라진다. 그리고 그 변화의 힘은 억누르는 사람들의 비뚤어진 품성도 바로 잡을 것이다.



따라서 프레이리와 호튼에게 변화와 진보는 “민중들과 관계를 심화시키는 것, 민중의 다양한 신념들을 존중하는 것, 민중에게 자문을 구하는 것, 민중의 언어에서 출발하는 것을 의미”하고 “민중이 가진 지식의 수준을 인식”하고 “새로운 지식을 창조하고 이미 알고 있는 자신들의 지식을 더 잘 알 수 있도록 돕기 위해 꼭 필요한 일들”을 뜻한다.



사회의 위기를 방관했다는 점에서 한국의 지식인들은 사실상 인문학의 위기를 자초했다. 따라서 인문학의 위기는 파괴된 공동체를 바로 세우고 미래의 희망을 만들 때에만 극복될 수 있다. 이를 위해 인문학자들은 일방적인 가르침을 펼 것이 아니라 대중과 함께 하며 대중들이 직접 인문학의 주체가 되게끔 실천해야 한다. 세 권의 책은 인문학의 미래가 사회 구성원 전체의 미래임을 말해준다.


* 보스코프스키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06-14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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