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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스코프스키 2005-06-04 23:23:13, Hit : 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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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오마이뉴스/자주민보]북한 핵무장의 기원은 한국전쟁 외

북한 핵무장의 기원은 한국전쟁
핵무기로 한반도 초토화 수차례 추진했던 미국
    이동원(realunity) 기자    


2월 10일 북한 외무성의 핵보유 선언 이후 미국 내에서조차 핵무기보유의 사실여부를 넘어 이제 그 양과 미국 본토에 대한 직격능력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미국 정부는 현재까지 2001년 중앙정보국(CIA)의 발표인 1~2개를 공식적인 입장으로 유지하고 있지만 국제원자력기구(IAEA) 엘 바라데이 사무총장은 폐연료봉 8천개의 재처리를 전제로 최대 6개로 추정하고 있다.

최근 미 언론들에서는 CIA도 최대 8개 정도로 추정치를 높였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는 가운데 미 워싱턴의 핵 감시기구인 '과학 국제안보연구소'(ISIS)는 지난해 11월 북한이 최대 9개를 보유 중이라고 발표한 바 있으며('북 핵실험', 미 정보조작설 솔솔-한겨레 5월 9일자), 미국의 일간지 <뉴스데이> 인터넷 판은 2월 20일 미 국방부 정보기구인 국방정보국(DIA)이 북한이 12~15개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했다고 보도했다(북, '핵무기고' 어느 정도 되나- 연합뉴스 3월 22일자).

북한이 '벼랑 끝 전술'로 일관하고 있다는 미국 측의 케케묵은 일부 주장에 대해서도 이제 선뜻 동의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90년대 이후로 10년 넘게 진행되는 북미간 핵공방의 기원은 무엇일까. 서재정 미국 코넬대 교수(정치학)는 "북핵위기는 한국전쟁 때부터 시작된 반세기의 위기"라고 말한다('50년도 넘은 북핵위기'- 한겨레 4월 29일자).

미국은 3년간에 걸친 한국전쟁 기간 적어도 3~4차례 이상 핵무기 사용을 진지하게 검토했다. 한국전쟁 초기 총사령관이던 더글라스 맥아더는 "한 손을 등에 묶어놓고도 승리할 수 있다"고 말할 만큼 전세를 낙관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 개시 불과 2주 만인 1950년 7월 9일 미 합동참모본부는 '원자폭탄 사용권을 달라'고 재촉하는 맥아더의 긴급전문을 놓고 고민하게 된다(브루스 커밍스 저 <김정일 코드>, 2005년, 따뜻한 손, 84쪽).

전쟁개시 3일 만에 서울이 점령당하고 미 8군의 핵심인 24사단이 대전에서 격파되면서 '미 육군의 보배'라 불리던 윌리엄 딘 사단장이 생포되기에 이르자 부산 일대로 포위당한 미국은 핵사용을 구체적으로 검토하게 된다. 미 전략공군부대가 부산 교두보를 포위한 북한인민군에 원폭을 투하할 준비를 갖춘 것이다. 당시 전략공군부사령관(후에 사령관 승격)이던 토마스 파워 장군은 "나는 원폭 투하를 위해서 전략공군부대를 대기시키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회고한 바 있다(김명철 저 <김정일의 한의 핵전략>, 2005년, 동북아, 18쪽).

당시 합동참모본부 작전국장 찰스 볼트는 미국의 전 지구적 전쟁수행능력을 '과도하게' 저해하지 않는 선에서 한국전장을 위해 대략 10개 내지 20개의 폭탄을 할애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커밍스 책 84쪽).

하지만 미 합참은 원자폭탄 사용을 불허하는데, 그 이유로는 원폭을 사용할 경우 인민군과 뒤섞여 지상전을 벌이고 있는 미군 측에도 상당한 피해가 발생하고, 증원부대가 계속 부산으로 도착하고 있던 터라 원폭 없이도 전황을 낙관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때 미국은 증원부대와 함께 인천상륙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김명철 책 18쪽). 무엇보다 재래식 무기만으로도 이길 수 있다는 판단이 작용했던 것이다.

한국전쟁 기간 3~4차례 이상 핵무기 사용 검토

핵사용 계획을 보류한 지 불과 석 달여 뒤인 1950년 11월, 미국은 다시 핵사용을 심각하게 고려한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한미연합군이 북한인민군의 주력부대를 잡지 못하자, 미국은 제2차 핵사용 계획을 검토하게 되었다. 이때 북한군 주력부대는 이미 남한에서 전략적 철수를 마친 뒤였다.(위 책 18쪽). 미군은 9월 28일 서울을 점령하고 10월 1일에는 38선을 넘어 북상했으며 같은 달 20일에는 평양을 점령했다. 하지만 미군의 공세는 거기까지였다. 북중 국경지대까지 후퇴한 북한인민군이 중국인민지원군과 함께 반격에 나선 것이다.

북한 중북부 산악지역까지 발을 들여놓은 미군은 북한인민군의 반격과 때마침 찾아든 한파에 밀려 후퇴하게 된다. 11월 25일에서 28일까지 벌어진 청천강 전투에서 미군은 참패를 당한다. "청천강 전투 참패로 인천상륙작전은 상쇄되고 말았다"고 평가할 정도로 이 전투는 전황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데이비드 리즈 저 <코리아: 제한전쟁>, 1964년, 뉴욕 세인트마틴 출판사, 40쪽; 위 책 19쪽 재인용). 이 전투에서 무너진 미군은 결국 "미국 역사상 가장 긴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맥아더는 미 합동참모본부에 급보를 보내는데, 그가 제안한 내용은 "북한군이나 중공군 부대뿐만 아니라 북중 국경에 30~50개의 원폭을 투하해 코발트 방사능 오염지대를 만들자"는 것이었다(리즈 책 167쪽; 위 책 20쪽 재인용). 참고로 코발트 폭탄에 포함된 '코발트60'은 방사능이 라듐의 320배에 달하며 반감기는 90년으로, 핵폭탄 물질 가운데 "가장 무서운 구성물질"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한편 해리 트루먼 미 대통령도 11월 30일 기자회견을 열고 원자폭탄을 들먹이며, 미국은 무기고에서 어떠한 무기라도 꺼내 당장 사용할 수 있다고 천명했다(커밍스 책 85쪽). 전황이 미국을 흥분하게 만든 것이다. 서재정 교수는 이와 관련해 "조지 부시 현 미 대통령이 6자회담을 언급하면서도 ‘모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견지하는 것은 이때부터 시작된 미국의 대북 핵위협정책을 확인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한겨레 위 기사).

심각하게도 트루먼의 이 날 발언은 단순 공포용이 아닌 '실제상황'이었다. 실제 핵공격 준비단계를 밟기 시작한 것이다. 기자회견과 같은 날 공군사령관 조지 스트레이트마이어 대장은 호이트 반덴버그 장군에게 "동에 중형폭탄 대대를 지체 없이 파견하기 위해"전략공군사령부(SAC)는 경고태세에 돌입하라는 명령을 내리는데 "병력 증강에 원폭공격능력도 포함된다" 강조했다(위 책 85쪽). 당시 미국은 450개 이상의 원자폭탄을 가지고 있었다.

불과 일주일여 뒤인 12월 9일 맥아더는 한국 전역에 원자폭탄을 사용할 수 있는 사령관 재량권을 요청한다. 커밍스 교수에 따르면, 맥아더는 '0일 만에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계획' 가지고 있었는데 그 내용은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이다"는 30에서 50개 정도의 원자폭탄을 투하하여… 만주의 목을 끊었을 것이다" 다음에는 압록강에 (장제스가 이끄는) 50만 국민당군을 투입시킨 뒤 "리 뒤쪽(북한 중북부지역)에- 동해에서 서해에 걸쳐- 방사능을 내뿜는 코발트 폭탄을 살포한다… 코발트의 효력은 60년에서 120년이니까 최소 60년 동안은 북한으로부터 어떠한 침략도 없을 것이다"(위 책 86쪽). 400톤급 코발트 수소폭탄은 단 하나로 전지구상에 있는 모든 동물들을 멸종시킬 수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맥아더, "동해에서 서해까지 코발트 폭탄 살포해야"

불리한 전황 때문이었을까. 전쟁임을 감안해도 당시 미 전쟁지휘부와 그 주변의 움직임은 이성이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한반도에서 핵사용 위험이 가장 높았던 시기는 1951년 4월이었다. 그해 3월 10일 맥아더가 우세한 제공권 확보를 위해 "디 데이 원폭수행능력"을 요구한 데 이어 4월 5일 드디어 원폭 사용허가가 떨어진다. 다음날 합참의장 오마 브래들리 장군은 원자폭탄의 핵심(원자캡슐)인 '마크-4'를 미 원자력위원회(AEC)에서 군 관할로 이전하는 계획에 대한 트루먼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다(위 책 88쪽).

4월 9일과 10일 트루먼은 북한과 중국의 목표물들에 대한 ‘마크-4’ 사용 승인안과 그 누구보다 한국전장에서의 핵사용에 광분하던 맥아더 해임안에 서명하는데, 특히 해임안은 오랫동안의 맥아더와의 첨예했던 갈등의 결과물로, 핵사용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믿을만한 사령관'이 핵을 사용하게 하기 위함이었다(위 방송). 대통령의 사용승인으로 공군 9폭격대가 괌에 전진배치 되기에 이르렀지만, 결국 트루먼은 맥아더 해임의 혼란 속에 실제 원폭투하명령까지는 발포하지 못했다.

그해 5월 3일부터 6월 25일까지 미 상원에서 개최된 맥아더 청문회는 미국 내 여론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영국과 캐나다 등 미국의 주요 우방국들이 미국의 핵 사용시 3차 세계대전으로 비화돼 전 지구적 공멸을 불러올 것을 우려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인 것이 영향을 주기도 했지만 미국 내의 여론 또한 트루먼 정권을 압박했다. 이 청문회를 통해 미국 내 여론이 "맥아더가 승리를 거두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고 "전쟁을 가능한 한 빨리 종결시키는 것이 국가적 희망사항"이라는 것을 말해주었다(리즈 책 282쪽; 김명철 책 21쪽 재인용).

하지만 상황이 종료된 것은 아니었다.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고 그 이후로도 미국은 상황에 따라 수시로 핵 투하 버튼에 손가락을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했다. 9개의 '마크-4'가 미 원자력위원회에 반납되지 않은 채 공군 관할 하에 남아 있었고 9폭격대 역시 귀환하지 않고 그대로 괌에 주둔했다. 그리고 미 합참은 1951년 6월에도 전황 때문에 또 한차례 핵사용을 고려했다(커밍스 책 90쪽).

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이 바로 미국의 핵 프로젝트인 '허드슨만 작전'이다. 이 작전은 '미국이 한국에서 수행한 가장 대담하고 경악스러운 핵 프로젝트'로 불리는데, 이는 한국전장에서 원자폭탄 사용능력을 확립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1951년 9월과 10월, 작전 시나리오에 따라 … B-29 폭격기들이 북한 상공으로 비행해 핵탄두를 제거한 원자폭탄들(dummy A-bombs)과 대단히 육중한 TNT폭탄들을 떨어뜨렸다. 원폭투하실험이었다. '무기의 조립, 시험, 운반, 목표물에 대한 지상통제' 등 '원폭과 관련된 … 모든 실제적 기능'을 획득하는 것이 프로젝트의 목표였다."(위 책 91쪽)

B-29 폭격기의 원폭투하실험을 지상에서 지켜보며 북한 지도부는 초토화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북한에게는 여느 국가와 다른 점이 있다. 바로 그 어느 국가보다도 오랫동안 미국의 핵위협을 받아왔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북한이 노이로제에도 정신병에도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매우 경이적인 일이다"(호주 일간지 <에이지>(the Age) 2003년 1월8일자; 김명철 책 1쪽 재인용). 하지만 이 실험 후 그러한 폭탄들이 '유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쪽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단지 "어마어마한 적군을 적시에 확인할 수 있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는 이유에서였다(커밍스 책 91쪽).

영국과 캐나다 등 3차대전 우려, 한반도 핵사용 반대

맥아더 청문회가 끝나자 미국은 당시 국내 여론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전쟁을 조기 종결하는 방향으로 선회한다. '승리'에서 '조기종결'로 전략이 전환된 것이다. 1951년 6월 30일 미국 정부는 맥아더의 후임인 매튜 리지웨이 장군의 라디오 방송을 통해 북한 측에 휴전교섭을 제안한다. 미국 측 기대는 약 6주 이내에 휴전교섭을 마무리 짓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1년이 지나도록 휴전협정은 타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미군 사망자 수는 전쟁 초기 1년의 곱절을 넘어버렸다(김명철 책 22쪽).

미군 총사령관의 일관성을 보여주려 했을까. 휴전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자, 리지웨이의 후임으로 총사령관이 된 마크 클라크는 1952년 10월 16일 합동참모본부에 '만주 및 북한에 대한 원폭투하를 승인해 달라'는 전보를 발송한다.

한편 한국전쟁의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민주당 출신 트루먼 대통령이 미국 국민들의 '혐오'속에 재선 도전을 포기한 뒤 벌어진 차기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한국전쟁을 명예로운 형식으로 조기에 종결하고 … 그것을 위해 내가 직접 한국에 가겠다"(위 책 22쪽)는 약속을 주요공약으로 내걸고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다. 그럼 아이젠하워의 변신을 지켜보자.

미 콜럼비아대 학장이었을 당시 핵사용 반대를 천명했던 아이젠하워는 대통령이 되자 마음을 고쳐먹는다. "그는 12월 하순 태평양을 항행하는 순양함 헬레나호에서 각료회의를 열고 공약과는 달리 '조기휴전을 위해서는 핵무기 사용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회의석상에서 합동참모의장 아더 레드포드 제독은 핵무기에 의한 대량보복을 주장했다. 1953년 봄 미군은 원자탄두 장착 미사일을 오키나와에 배치했다"(리즈 책 418쪽; 위 책 23쪽 재인용) 미국은 끝까지 핵사용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결국 미국은 종전이 되기까지 핵사용 카드를 손에서 놓지 못했다. 1953년 2월에는 한국지형에 적합한, 대포로 발사하는 전술형 원자폭탄을 개발했으며, 휴전협정이 임박한 5월에도 협정이 제대로 안될 시 원폭사용계획을 승인했는데 이 계획의 목표는 개성이었다(위 방송).

한국전쟁 기간 미국의 끝없는 핵사용 협박과 쏟아지는 모의핵탄두 속에서 북한 지휘부는 미 본토를 직격할 수 있는 핵보복 능력이 있어야만 미군의 핵공격 위협을 종식시킬 수 있음을 뼈저리게 느끼지 않았을까. 북한이 겪은 3년간의 핵위협은 이처럼 간단치 않았다. 전투는 종료되고 휴전협정은 조인됐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미국의 핵위협도 멈추지 않았다. 50년이 지난 지금까지 말이다. 미 자연자원보호위원회(NRDC)에 따르면 미국은 현재 1만350개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다.  



이 글은 인터넷 자주민보(www.jajuminbo.net)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2005-05-20 00:01
ⓒ 2005 OhmyNews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menu=&no=227248&rel_no=1&back_url=



'보복 핵공격' 위협에 놓였던 한반도
공지전 개념도입으로 대북핵선제공격 기조 강화된 70년대까지
    이동원(realunity) 기자    


지난해 12월 16일 '진보성향'으로 알려진 연구소인 미국진보센터(CAP)가 "부시 행정부가 2005년 한국에 북한의 지하시설을 파괴하기 위해 고안된 새로운 미사일(벙커버스터)을 배치할 계획"이라고 밝힌 데 이어 지난 5월 24일 북한 내각 기관지 <민주조선>이 "이라크에서 성능이 검증된 이 무기(벙커버스터)"를 미국이 "이미 2003년 이후 남한에 끌어들였다"(<연합뉴스> 5월 24일자)고 보도해 미국에 의한 한반도 핵전쟁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상단)
▲ F-117A 스텔스 폭격기 자료사진  

ⓒ2005 미 국방부

이러한 상황에 미국 국방부가 지난 5월 26일 F-117스텔스 전폭기 15대를 한국에 배치해 수개월간 훈련에 돌입한다고 밝혀 사태는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사실 미국의 한반도 핵무력 배치의 역사는 미군 주둔의 역사 못지않게 기나긴 역사를 자랑한다. 한국전쟁 당시 최소한 서너 차례 이상 한반도에 핵사용을 심각하게 고려(졸고 <오마이뉴스> '북한 핵무장의 기원은 한국전쟁'-5월 20일자)했던 미국은 전쟁이 끝나자 아예 남한에 핵무기를 직접 배치하기 시작했다.

관련기사    북한 핵무장의 기원은 한국전쟁





1957년 남한에 핵 배치 시작

그 시작은 195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핵 공격 일보 직전에 여러 가지 이유로 핵 투하 버튼을 결국 누르지 못했던 미국은 "역사상 최초의 실질적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남한에 노골적으로 핵무기를 끌어들인 것이다.

1957년 7월을 시작으로 핵탄두가 탑재된 지대지 미사일인 어네스트 존, 핵무기발사용 280밀리 포탄, 8인치 포탄, 일명 '스추케스 핵'이라 불리는 핵지뢰 등 모두 4종류가 배치됐으며 다음해 1월 29일 주한미군사령부는 남한에 대한 핵무기 배치가 완료되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1958년 3월 전폭기용 핵폭탄을 반입한 미 공군은 다음 해 핵 탑재 순항미사일인 마타도어 미사일 대대를 남한에 상주시킨다. 마타도어 미사일은 사정거리가 1100km에 달해 북한 전 지역을 커버할 뿐 아니라 중국과 소련까지 타격가능한 장거리 미사일이었다.

1960년대에 접어들며 미국은 남한에 배치한 핵무기들을 업그레이드시킨다. 일본 동오닛포의 2000년 1월 9일자 보도에 따르면 1961년 5월 일본 아오모리현 미사와 기지에서 발진한 F100D 전투폭격기 30기 중 6기가 군산에 도착했는데 이 폭격기들은 군산기지에서 신형수소폭탄 MK28을 탑재했다(김명철 저 <김정일의 한의 핵전략> 40쪽, 2005, 동북아).

이밖에도 미국은 1964년까지 지대지 능력을 겸비한 지대공핵미사일인 나이키 허큘리스, 지대지미사일인 라크로세 잔토, 데비크로켓 핵바주카포 155밀리 핵폭탄 등을 국내에 반입했다.

푸에블로호 사건 당시 핵폭격 검토

한편 1968년 1월 미 전자첩보함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나포되자, 미 존슨 행정부 내에서는 평양에 핵무기를 떨어뜨리자는 반응이 터져 나왔다. 생존 승무원 전원이 11개월간 구금돼 있는 동안 미국은 핵무기 사용을 구체적으로 검토했다.

미국의 핵문제 전문가인 피터 헤이즈는 1991년 발표한 저서 <태평양의 화약고: 한국에서의 미국의 핵사용 딜레마>에서 푸에블로호 사건 당시 "남한의 비행장에 배치되어 상시 출동태세에 있던 미국의 모든 F4 팬텀전투기들은 오로지 핵무기만 탑재"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반면 베트남전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해 발버둥치던 미국은 1960년대 말 동아시아에서의 패퇴와 그로인한 경제위기, 국내외의 반전여론 등으로 동아시아 주요 기지의 지상군 병력을 단계적으로 감축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빠진다.

주한미군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1969년 6만3천명이던 주한미군 병력이 1971년 6월에는 4만3천명으로 감축된 것이다. 하지만 주한미군 감축이 단지 '숫자놀음'일뿐 실질적으로는 오히려 무력증강으로 이어졌다는 증거를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말 그대로 전체병력만 줄었을 뿐, 주한미군의 핵전력강화가 이 조치의 핵심이었다. 주한미군의 부분 철수가 불가피해지자, 미국은 핵무기 추가배치에 열을 올린다.

남한, 보복 핵공격 위기에 놓여

1970년 2월 14일부터 3일간 열린 미 상원 외교위 사이밍턴 분과위원회를 보도한 시사잡지 <유에스뉴스앤월드리포트>의 기사에 따르면, 당시 남한에 배치한 미 핵전력의 핵심은 F4 팬텀용 제미니형 공대공미사일, 나이키 허큘리스 지대공 미사일, 사정거리 21마일의 어네스트 존 원자포, 사정거리 10마일의 서전트 원자포, 핵지뢰 등 다섯 종류인 것으로 밝혀졌다(박세길 저 <다시쓰는 한국현대사2> 252쪽, 1989, 돌베개).

이들 무기의 특징을 살펴보면 미국의 노골적인 핵전쟁 음모가 드러난다. 리영희 한양대 명예교수는 1984년에 발표한 글 '한반도는 초강대국들의 핵 볼모가 되려는가'에서 미국의 핵전쟁 음모에 대해 이렇게 분석한다.

"남한에 배치된 핵무기는 한결같이 중단거리 실전용으로, 이는 미국의 실질적인 전쟁음모를 밝혀줄 뿐 아니라, 미국이 남한을 핵기지화하는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도 아울러 밝혀주고 있다. 즉, 미국은 자기 영토 밖에서 핵공격을 가함으로써 핵기지에 대한 상대방의 보복공격으로부터 야기되는 피해를 남한에 떠넘기겠다는 것이다.… 또한 사정거리가 극히 짧은 각종 전술핵무기(사정거리가 34km인 어네스트 존, 16km에 불과한 서전트 원자포 등)의 배치는 북한이 미국의 (핵)공격대상에 포함되어 있음을 강력히 시사해주고 있다."

북한에 대한 핵공격은 말할 필요도 없이, 대소련 핵기지 역할까지 떠맡은 남한의 입장에서는 보복핵공격을 받아 절멸될 위기에 놓인 상황이었다. 자신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말이다. 미국은 1971년 6월 오키나와에 있던 전술핵무기 수백기 중 일부를 남한에 이전했다(박세길 위 책 252쪽). 이와 함께 미국은 제3세대 핵무기라 불리는 중성자탄두 탑재용 MGM-52 랜스미사일도 같은 해 배치했다.

주한미공군 전력 강화

같은 시기 미국은 핵무기의 증강과 함께 핵전력의 중추를 담당하는 주한미공군을 급속히 강화한다. 말뿐인 기만적 감축의 내막에는 고도화된 미국의 핵전쟁음모가 나날이 교묘해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주한미군사령부는 1970년 12월 21일 미사와 기지에 있던 미공군 제475전술전투비행단 F4 팬텀기부대가 1971년 6월까지 이전하며, 일본의 또 다른 공군기지의 EC121 와닝스터 정찰부대가 1971년 2월말까지 광주 기지로 이동한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와 함께 마이클리스 주한미군사령관은 다음해 3월 4일 "한국 상공에서의 군수를 지원하기 위한 비행장 10개를 건설할 계획"임을 밝히며 주한미공군의 대대적 증강을 증명해 보였다(박세길 위 책 252쪽).

한편 미국은 한국전쟁을 겪으며 모든 주요 시설을 지하화한 북한을 공격하기 위해 개전 초기 전술핵무기를 사용한다는 방침을 이미 오래 전부터 유지하고 있었는데, 1970년대 중반 '공지전(空地戰 , AirLand Battle) 전략'이 개발되면서 선제 핵공격 요소가 이전보다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브루스 커밍스 미 노스웨스턴대 교수에 따르면, 북한의 견고한 지하시설에 핵무기 등을 사용하고 적의 영토를 향해 신속하고도 통렬한 공격을 퍼붓는 것이 이 작전의 요체다(<김정일 코드> 161쪽, 2005, 따뜻한손).

공지전 개념을 펼치기에 증강된 주한미공군의 핵전력은 필수적이었다. 1975년 6월 제임스 슐레진저의 발언과 그의 후임으로 미 국방장관이 된 도널드 럼스펠드의 다음해 5월의 발언은 그 내용이 일치한다. "한국에서의 핵무기 사용도 배제하지 않을 것", 이 발언은 가공할 핵무력을 남한 일대에 배치한 데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었을지 모른다.

이렇듯 한국전쟁 기간 핵을 사용해 북한을 제압하지 못한 것을 천추의 한으로 여겨온 미국의 북한에 대한 핵위협은 나날이 노골적으로 변해갔다. 주한미군 감축을 빌미로 방대한 핵무력과 첨단공군력을 증강, 남한에 집결시킨 미국은 70년대 중반에 접어들며 새로운 핵전쟁훈련인 팀스피리트를 준비하고 있었다.

(계속)  



이동원 기자는 자주민보 기자입니다. 이 글은 인터넷 자주민보(www.jajuminbo.net)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259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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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코프스키
  2005/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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