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약골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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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돕헤드
Homepage   http://blog.jinbo.net/dopehead/
Subject   고탄력 팬티스타킹으로 팝필터를 만든다
지친 것 같다.
나의 활동에 대해, 그 미래와 전망에 대해, 그 정당성에 대해 열정은 여전히 샘 솟듯 솟구치고, 확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단단하지만 어떤 부분은 죽어가고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특히 피자매연대가 그렇다.
피자매연대의 활동은 여전히 내게는 너무도 소중하고, 너무도 가치 있는 일이라서 나는 도저히 손을 놓을 수가 없다.
그런데도 힘들다.
생명력이 다한 것이라고, 그렇게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다.
서울에 올라오면 항상 밤 늦게까지, 아니 이른 아침까지라고 해야 보다 정확한 표현이겠지만, 아랫집에서 나는 연구를 하고, 모색을 하고, 글을 쓰고, 고민을 한다.

당장 3월이 되면 혹여 나는 피자매연대에 혼자 남아 활동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해온다.
그래서 있는 힘을 다해, 새로운 활동가들을 모집한다는 글을 써보지만 과연 이것이 누군가의 관심을 끌 수 있을까 회의가 들곤 한다.

무엇이 잘못되었던 것일까.
'백화점식' 운동?
각종 사안에 '문어발식'으로 결합해온 것?
모든 운동을 아우르러는 욕심?
애초에 나는 맞지도 않는 너무도 큰 옷을 입고 내 몸에 맞추려고 허우적거려온 것은 아닌가.

음반을 제작한다는 것도 그렇다.
내가 무슨 엔지니어라고 음악을 작곡하고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고 컴퓨터 프로그래밍하는 것도 부족해서 각 파트 별로 녹음을 하고, 믹싱까지 하고 앉아있나.
니가 뭐가 그리 잘났다고 하나부터 열까지 독불장군 식으로 다 해먹으려고 하는 것인가 말이다.
녹음은 녹음전문가에게, 믹싱은 믹싱전문가에게, 마스터링은 마스터링 전문가에게 맡겨야 하는 것 아닌가?

난 ㅍ이나 ㅂ 같은 마찰음이나 파열음을 낼 때 터져나오는 바람소리를 막아주는 '팝필터'도 없이 그냥 마이크에 녹음을 해왔었다.
팝필터는 보통 녹음하는 곳에 가보면 마이크 앞에 대는 망 같은 것인데, 이것이 없다보니 '평화' 같은 단어가 많이 나오는 내 노래에 자연스럽게 '팝핑'이라는 터지는 바람소리가 많이 녹음이 되게 된다.
녹음을 한 뒤에 들어보면 그런 팝핑들이 나오는데, 나는 그것을 플러그-인 프로그램이나 녹음된 웨이브 파일 자체를 손보면서 해결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이미 튀는 바람소리가 녹음이 된 상태에서는 그런 사후 조정이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고, 그래서 튀어버린 파열음을 제거하기가 힘들어진다.
이런 고민을 안고 나는 한참을 끙끙거렸었다.
전문 가수들 녹음한 것 들어보면 그런 팝핑이 하나도 없는데, 저건 도대체 어떻게 한 것일까 궁금해 하면서 말이다.

결국 한참 인터넷을 찾다가 간단하게 팝필터를 쓰면 그런 현상이 없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5만원 정도 하는 팝필터를 살 필요 없이 천오백원짜리 고탄력 팬티스타킹으로 간단히 팝필터를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런 것들을 하나하나 알아 간다는 것은 기쁨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커다란 절망이기도 한 법이다.
도대체 난 이런 기초에 기초도 몰랐던 것인가.
그리고 내가 앞으로 모르고 지나갈 이런 기초들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좌절의 순간이었다.
기초부터 차근차근 배웠으면 다 알았을 것들이 혼자서 해보겠다고 무모하게 도전한 나에겐 모두 넘기 힘든 장벽들처럼 다가왔다.
덕분에 나는 그런 시련들을 넘고는 있지만, 그 고통이 장난이 아닌 것이다.
그냥 쉽게 남에게 맡겨 버렸으면 몰랐을 많은 것들을 나 혼자서 처리해야 하기에 습득할 수밖에 없는 것들은 원래 천천히 해나가려고 마음 먹은 나를 사정 없이 바닥으로 그리고 물 속으로 끌어내리는 것 같다.

포기해 버릴까.
굳이 하지 말아 버릴까.
왜 사서 고생을 하나.
난 지금 무슨 길을 걷고 있는 것인가.

하지만 난 안다.
가장 혼란스런 순간에 가장 강한 확신이 찾아온다는 것을.
내일부터는 철사와 고탄력 팬티스타킹으로 팝필터를 만들고, 보컬 트랙을 처음부터 다시 녹음하게 될 것 같다.

시간이 걸리면 걸리도록 하자.
힘이 들면 들게 하자.
그래도 힘들면 도와 달라고 호소하면 되지 않나.
누군가 나타날 것이다.
함께 일을 해나갈 것이다.
만약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면 포기하면 된다.
그리고 남는 것들을 보듬어 안고 너가 오랫동안 걸어온 그 길을 계속 걸어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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