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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2-28 08:27:27, Hit : 653
Homepage   http://www.buloniskra.com
Subject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이 있기에
2월 달력을 뗀다.
이번 달에 내가 한 건,
그녀를 만난 것. 그리고 과외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것.
방구석에서 뒹굴다가 인터넷으로 시덥잖은 글들이나 써제낀 것.
담배를 핀 것. 술자리에 간혹 끼어 술 얻어 마신 것.
그리고 많은 거짓말들과 수치, 불면의 비극의 상상들...



어느 제약회사 입사경쟁률이 250:1이었다고 한다.
면접관들 앞에서 굳은 표정을 애써 달래가며 자신의 경쟁력을 최대한
포장하는 청년들의 모습이 담긴 신문을 보며 나를 대입해본다.
장기화된 경기 침체로 인하여 청년실업이 오십만에 육박하는 이 시대에...
라는 어느 시트콤의 연기자의 단골 멘트는 유머로만 받아들이기에 너무도
참혹한 시대.


모든 비극들이 하나의 간명한 문구로만 정형화되어 사람들의 뇌리에 박히면
종종 그 비극의 실체가 흐릿해지기도 한다.

가령, 이런 말들이다.

'살인적인 노동강도에 시달리는 저임금 이주노동자의 현실을 기억하자.'
'장기화된 경기침체로 인한 내수 침체로 호주머니가 얇아진 가계 현실'
'정규직 대기업 노조와 자본의 이중주 속에 신음하는 비정규직의 현실'

이런 신문 부제목같은 형해화된 멘트들을 반복적으로 듣다보면
처음에 느낀 그 분노와 감정의 구체성은 상실되고 그저 이것조차 또한
주변의 일상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무덤덤해진다.


그래서 운동가들에겐 '실천'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이 언제나 타당한가보다.
온라인 좌파는 상기한 경향성의 오류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어느새 나 역시 비정규직, 이주노동자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구체적 현실에 놓인 하루하루의 모습들에 대해선 둔감해
지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엔 탁 막혀버린다.
인터넷에서 보는 여러 분규 사업장 소식들과 갖가지 사회적 소수자들의 투쟁
속보들을 마치 스팸 메일 읽듯 빠르게 훑어가는 내 자신을 본다.
이런 내가 어떻게 온전히 사람들을 휘잡을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겠는가.



이런 때,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온라인 정치운동은 그저
다른 분들의 귀한 글들을 퍼 오거나 중요 속보를 이리저리 옮겨 싣는 일.
그것 뿐이리라.


사랑을 하더라도 정치성의 동일성이 전제되어야 했던 그 웃지 못할 촌극이
보편화되었던 팔십년대 대학의 연애는 이제 박물관에서나 찾아지지만
그 유물은 아직 우리를 자유로이 풀어주지 못 했음을 안다.
그래서일까, 사랑의 격풍에 불면의 시간을 보내는 나는, 사랑을 책임질 수
없는 나의 주변에 대한 한탄과 함께 또 이런 한탄과 자기 연민에 휩싸인 채
점점 더 주관주의적 사유에 길들여지는 나의 현실 후퇴를 목도한다.


휴학생이란 불안한 신분과 청년실업의 늪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취업경쟁력 제로인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멋진 미래를 꿀바른
언어들로 보여준다. 그녀는 나에게 기대어야 하고 더 이상 아파할 가슴조차
없이 살았다. 그러나 나는 안다. 우리의 사랑은 결코 결혼이란 골대까지 다다
를 수 없음을. 그리고 그럴 수 없는 이유를 제공하는 이는 오로지 나임을.


그녀를 만나 길을 걷고 차를 마시면 한없이 내 얼굴은 봄날의 햇살에 비춰지지
만 돌아오는 길에서, 또 내 방 침대에서 천장을 보는 나는 지옥의 불구덩이에 놓인
얼굴로 나를 만난다.


그녀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채, 살갑지 못한 부모 탓에 어릴 때부터 자기가 돈을 벌며
고등학교까지의 학비를 마련하여 졸업한 여자다. 생활력이 강한 여자이지만 그녀가 그러
한 잡초같은 기질을 갖기 위해서는 온갖 사회 밑바닥에서 구르는 이들을 만났어야 했다.
그녀의 주변에는 든든한 물주 하나 잡으려고 혈안이었다가 드디어 나이 마흔을 넘은 유부
남을 꼬셔 밤마다 황홀경을 선사하며 용돈을 받아내는 친구가 있고, 작은 회사의 경리로 일
하는 그녀의 언니들은 당연한 것인 양 세컨드 남자친구를 두고 있다.


진정한 배우자로 생각하며 만나는 남자가 있고
그 남자에게만 만족할 수 없기에 만든 잠자리용 남자가 있고
그 두 남자들에 대한 연극에 괴로울 땐 허심탄회하게 그 괴로움을 말할 수
있는 술자리용 남자가 있는 그녀들 속에 둘러싸인 그녀이다 보니 나 역시 그녀에 대해
약간의 의혹과 불안이 있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에게 이런 말을 들려주고 싶다.


나 또한 인터넷 미팅들을 수없이 했고 이 사회에서 통용되지 않는 변칙 플레이를 통한
남녀 관계들을 목격했고 혹은 체험했다. 그리고 요즘 세태, '쿨'함이란 미명 하에 성적 개
방의 파도가 드높아지고 있는 이 시대. 그렇지만,


이 동 튼 아침, 곧 봄이 다가오는 어느 2월의 마지막 토요일,
나는 창을 열고 거리를 본다.


우유배달하는 아주머니와
조깅복을 입고 아내와 함께 경보를 하고 있는 아저씨,
지저귀는 참새들의 모습. 이 일상의 모습은 십 년 전에도 그대로였으며
감히 예감하건대 십 년 뒤에도 그대로리다.

세상을 만들어가는 저 오래된 묵직한 일상,
저 일상의 주인들이 바로 우리의 희망이고 우리가 믿어야 할 존재들이다.
유행과 세태라는 이름으로 보여지는 온갖 것들의 허(虛)함에 그저 허허,
웃어버리자고...


나는 담배를 끄고 세수를 해야겠다. 차가운 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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