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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스코프스키 2008-09-09 21:52:40, Hit : 1563
Link #1    http://ko.internationalism.org/inter123/lessons_of_kronstadt
Link #2    http://ko.internationalism.org/ir104/understanding_kronstadt
Subject   [ICC]ICC가 보는 크론슈타트와 아나키즘, 아나키스트...
ICC(국제공산주의흐름)이 보는 크론슈타트 사건과 아나키즘입니다. 아나키스트 들이 이 사건과 앞서의 러시아 혁명 사건과정에서 다수 엇갈린 행보를 보인 지점이 있습니다. 크로포트킨과 마흐노, 사빈코프, 젤레즈니아 코프 등이 바로 그들이죠. 저들의 의견을 보는 것도 대응지점의 한 지혜를 도출해 낼 수 있지 않을까요?

크론슈타트가 남긴 역사적 교훈들
Submitted by ICC on Mon, 2007-11-19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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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ical lessons of the Kronstadt revolt)[1]
최근에 『국제주의』는 <시카고 혁명가 네트워크>(이하 CHIREVNET)에서부터 「1921년 3월 러시아 크론슈타트의 수병들과 노동자들의 혁명적 봉기」라는 팸플릿 하나를 받았다. 우선 우리는 팸플릿 작가의 노고에 사의를 표하는 바이다. 그는 노동자운동의 역사에서 중요한 교훈을 가지고 있는 사건을 검토하고 있다. 그 사건의 교훈이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 혁명가들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이다. 이 팸플릿은 최근에 영어로 번역된 우리의 책 『네덜란드ㆍ독일 공산주의 좌파』를 인용하고 있다. 이 책은 크론슈타트 봉기 사건에 대한 평가에서 기인하는 혁명운동의 역사에 관한 저작이다. 그러나 CHIREVNET의 팸플릿은 ICC가 볼셰비키가 반란을 진압한 것을 "어쩔 수 없는 비극"으로 여기는 것 아니냐며 비판한다. 이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이 팸플릿은 우리의 크론슈타트 사건에 대한 분석을 완전히 잘못 알고 있고, 오해하고 있으며 잘못 표현하고 있다. 수 년 동안, ICC는 지속적으로 날카롭게 크론슈타트 반란에 대한 무력 진압을 "어쩔 수 없는 비극"이라며 잘못된 시각을 방어하는 정치그룹들을 비판해왔다. 그 비판들은 아래 글이나, 『국제평론』 제103호와 제104호에서 두 부분으로 된 연재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CHIREVNET의 팸플릿은 또한 여러 가지 본질적으로 아나키스트적이고 평의회주의적인 크론슈타트에 관한 신화들과 그로부터 나온 교훈들을 반영한다. 이것은 특히 반란을 진압하는데 있어서 볼셰비키의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볼셰비키의 가상의 "국가주의적 권위주의"에서부터 반당적 교훈들 역시 끌어내고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면, 그 저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혁명정당은 아무런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이는 자본주의 선거 놀음에 참여하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그것은 대자본가 지배계급에 의한 낡은 자본주의, 권위주의 독재, 즉 국가권력을 위한 욕구에 다름 아니다." 이 과도하게 단순화된 반당 정치적 결론은 완전히 혁명정당의 역할과 의식화과정에서 당과 계급 사이의 관계를 오해하고 있다. 당의 역할은 부르주아지가 퍼뜨리고 다니는 선거를 신비하게 만드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더욱이, 팸플릿의 방법론적 준거의 틀은, CHIREVNET이 자주 다른 모든 곳[2]에서 맑스주의 변증법에 호소함에도, 이 사건들의 진정한 역사적 의미를 이해하는데 유효하지 않다. 보기를 들어, CHIREVNET은 크론슈타트 반란을 역사적 맥락에서 평가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저자는 이점을 처음부터 인정한다. 크론슈타트 반란의 의미와 중요성을 프롤레타리아트가 더 잘 이해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그들 나름의 목적에도 불구하고, 그 팸플릿은 이 사건을 역사적 전망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이는 사회ㆍ정치ㆍ역사적 사건들을 과학적이고 맑스주의적으로, 즉 프롤레타리아의 시각에서 이해하는데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다. 이러한 기초지식의 부족 때문에 당연하게도 CHIREVNET은 레닌과 볼셰비키에 관하여 아나키스트적인 도덕주의적 설교에 사로잡혀 있다. 아나키스트들의 판에 박힌 도덕주의적 근본주의 때문에 그 의미가 희석되어, 그 팸플릿은 크론슈타트 반란과 자본주의에 맞선 프롤레타리아트 투쟁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던 러시아 혁명 그 자체의 전반적인 관계에 있어서 진정한 역사적 공과(功過)를 이해하는데 실패한다. 이처럼 비판적 준거의 틀이 없기 때문에 그 팸플릿은 크론슈타트 반란 진압이 단지 볼셰비키의 특정한 이론적 오류나 레닌의 "대리주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비록 이것이 분명 중요한 요인들이기는 하지만-궁극적으로 혁명을 다른 나라로 확산시키는데 실패하고 서유럽과 북아메리카의 노동자대중운동으로부터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요새가 고립되었다는 맥락적 사실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CHIREVNET에게 러시아 혁명의 퇴보를 낡은 아나키스트적인 도덕주의로 설명하는 것은 버리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것으로 보일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이러한 훗날의 퇴보는 볼셰비키 지도부의 권위주의적 경향 때문이다. 이는 본질적으로 문제를 역사상 인물들의 선악대립으로, 올바른 도덕적 관점의 소유 또는 부족의 문제로 제한한다. 즉 이러한 이론은 결국 역사유물론에 대한 이상주의적이고 소부르주아적인 거부감을 반영한다.

이 팸플릿에 대한 답변으로 우리는 두 편의 기사를 번역하여 출판한다. 이 기사들은 앞서서 2001년 3월 ICC 프랑스 지부의 매체인 『국제혁명』 310호에 실렸다. 이 기사들은 크론슈타트 반란 진압에 대한 ICC의 입장을 상세하게 잘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 기사는 스탈린주의 반혁명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타락한 제3인터내셔널에서 분리한 좌익분파들에 속한 우리의 선배들이 만든, 러시아혁명에 대한 맑스주의적 대차대조표에 나타난 좌익공산주의자들의 정치적 입장의 기원을 보여주고 있다.

부디 CHIREVNET이 우리의 답변을 동지적 관점에서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그리고 계속해서 논쟁과 토론을 이어나가기를 바란다. 논쟁과 토론은 노동자 운동 내에서 정치적 명확화를 위한 필수적인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독자들이 투고하여 이 논쟁에 개입하고 그들 가운데에서 이 문제에 대한 논쟁을 확산시키기를 촉구한다. 이 논쟁에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그룹의 투사들도 참여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여기에서 또한 <로스앤젤레스 노동자의 목소리>(이하, LAWV)가 크론슈타트 반란에 대한 긴 문서를 발표했다는 것을 언급하는 게 중요하다. 여기에서 그들이 과거 알바니아 스탈린주의의 지지자들에서 현재 프롤레타리아 투사들에 대한 기생충 같은 공격으로 다소 정치적 입장이 변화했다는 것을 다시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이번 호와 『국제주의』122호를 보시오.) 그것은 LAWV와 CHIREVNET이 이야기하는 크론슈타트에 대한 분석이 분명히 비슷함에도 불구하고, 두 그룹이 현재 완전히 다른 정치적 궤적을 보이고 있다는 점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두 출판물의 기사들 모두 비슷하게 심각한 자유주의적이고 아니키스트적인 혼란에 빠져있음에도 불구하고, CHIREVNET의 입장은 명백히 노동자 투쟁이 직면하고 있는 쟁점들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정치적 명확성을 찾고 있는 것이다. 반면 LAWV의 러시아 혁명에 대한 현재 입장은 1917년 10월 봉기가 일어난 직후인 1918년부터 러시아 혁명이 타락하였으며 볼셰비키는 반혁명세력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주장은 지난 5년 동안 IBRP와 제휴하면서 그들이 방어했던 공산주의적 좌파의 역사적 입장으로부터 확실히 갑작스럽게 퇴보한 것이다.

우리는 LAWV가 크론슈타트에 대한 입장에 있어서 자유주의적 정치세력의 입장으로 도약한 이유는 자유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로부터 영향 받은 그룹들로부터 신뢰를 얻기 위해서라고 본다. 이 그룹들은 현재 ICC와 IBRP와 같은 좌익 공산주의 조직들의 명예를 더럽히는 기생충 같은 캠페인을 해대고 있다. LAWV는 지금까지 계속해서 출처를 밝히지 않고 『신국제주의자』의 최근호 표지로 CHIREVNET의 팸플릿 표지를 다시 사용했다. 더군다나 같은 제목으로 ICC를 공격하는 그 기사에서 LAWV는 ICC가 크론슈타트 반란에 대한 진압을 "어쩔 수 없는 비극"으로 옹호한다고 아무런 근거 없이 단언하면서, 그러한 옹호는 "우리 자신에서 권력을 부여"하여 "프롤레타리아트 위에 군림하는 당-국가 독재"를 향한 우리의 욕망을 증명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CHIVREVNET이 단지 우리의 입장에 대해서 단지 오독을 한 반면에 LAWV는 뻔뻔스럽게 거짓말하고 중상모략을 저질렀다.

우리는 진정으로 노동계급과 관련된 이슈들을 진지하게 이해하고 과거의 투쟁에서 교훈들을 끌어내려고 노력하는 그룹들과는 긍정적인 태도로 논쟁하고 싶다. 그리고 그것은 LAWV처럼 적대적이고 파괴적인 기생충 같은 분자들에 대해서 효과적인 평형추가 될 수 있을 것이다.

CHIREVNET은 다음 연락처로 접촉할 수 있다. 페리 샌더스 PO BOX 578042 Chicago, IL 60657-8042, diannas@msn.com

1921년 3월 크론슈타트 반란 진압 : 노동자운동에서 비극적인 실수
80여 년 전, 1921년 3월에, 1917년 10월 혁명으로 노동계급이 권력을 잡은 지 4년이 채 못 되어, 볼셰비키는 무력으로 페트로그라드에서 30KM떨어진 작은 코틀린 섬에 있는 크론슈타트 수비대의 봉기를 진압했다.

수년 동안 소비에트 러시아는 여러 해외 열강들의 지원을 받는 백군의 반혁명 책동에 맞선 내전에서 피의 투쟁을 벌여야 했다. 그럼에도, 크론슈타트 수비대의 반란은 이러한 반혁명 시도의 일부가 아니었다. 그것은 10월 혁명의 선두에 섰던 소비에트 정부 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같은 노동계급 당파의 반란이었다. 이 노동자들은 새로운 집권세력의 수많은 권력남용과 참을 수 없는 탈선을 교정하려는 목적으로 반란에 앞장섰다. 크론슈타트에 대한 유혈진압은 전반적으로 노동자운동에 커다란 비극을 야기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었다. 그것은 1914~1918년 사이에 벌어진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국제노동계급의 응답이었던 세계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발전 도상에서 최초의 승리였다. 10월 봉기는 부르주아 국가의 파괴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수립 과정의 일부였다. 볼셰비키는 이 사건을 열정적으로 두둔했다. 봉기의 중요한 의미는 그것이 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 즉 부르주아지에 맞선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전쟁에서 최초의 결정적인 순간을 기록했다는 것이었다.

고립은 러시아 혁명의 퇴보의 진정한 원인이다.
1917년 러시아에서 처음 일어난 혁명은 전(全)유럽과 다른 곳으로 투쟁을 확산시키려는 노동계급의 여러 노력에도 국제적 차원에서는 성공하지 못했다.

러시아 그 자체는 기나긴 피의 내전에 의해서 찢겨져나가서 경제는 황폐해졌고 소비에트 권력을 떠받드는 기둥인 산업 프롤레타리아트는 해체되었다.

공장위원회가 제거되고, 점차 소비에트가 국가기구에 종속되었으며, 노동자 민병대가 파괴되었다. 내전동안 긴장된 시기가 이어지면서 점차 사회전반이 군사화되었고, 이와 함께 여러 관료적 위원회들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것들 전반이 러시아 혁명이 타락하고 있다는 매우 중요한 증거가 되었다. 이러한 요인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내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할지라도, 타락이 만개하여 진행된 것은 그 이후의 시기였다. 차츰 "당-국가"의 지도부는 노동계급의 자기조직화가 기본적으로 올바르지만 현재 당면한 시기에는 반혁명 세력에 맞서서 군사적 투쟁을 하는데 모든 노력을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을 발전시켰다. "효율성"의 원칙이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원칙들을 약화시키기 시작했다. 효율성의 원칙이 지배하면서 국가는 노동의 군사화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감시와 극단적인 착취의 방식으로 노동자들을 복종시켰다. 공장위원회를 이미 약화시켰기 때문에 국가가 "일인관리"와 테일러주의 착취 시스템을 현장에 도입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과거에 레닌은 테일러주의 시스템을 인간을 기계의 노예로 만드는 방식이라고 비난한 바 있었다. 전쟁경제의 혼란은 국제적인 고립으로 더욱 증폭되어 국가전체를 기근의 위기에 빠뜨렸다. 노동자들은 점점 더 부족해지는 배급에 의존해야만 했으며 그 조차도 종종 불규칙하게 이루어졌다. 많은 공업지대들이 전반적으로 조업을 중단했고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자기 소유의 자원에 의존해야 했다. 많은 노동자들의 자연스러운 반응은 시골에서 생계수단을 찾기 위해서 함께 도시를 떠나는 것이었다.

내전이 격렬하게 진행되는 동안, 소비에트 국가는 주민 다수의 지지를 유지했다. 왜냐하면 소비에트 국가는 구(舊)소유계급에 대항한 투쟁으로 자신을 검증받았기 때문이다. 노동자, 미숙련공, 소농 등 각 부문에 따라서 내전의 고통을 견뎌내는 의지는 상대적이었다. 그러나 백군을 물리치면서, 많은 사람들이 생활 조건이 앞으로 덜 가혹해질 것이며, 경제와 사회생활에 대한 정부의 통제가 느슨해질 것이라고 기대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셰비키 지도부는 항상 전쟁으로 야기된 생산의 파괴에 직면하여, 사회생활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느슨하게 하는 어떠한 조치를 실시하는 것도 다소 내키지 않아 했다.

크론슈타트 봉기
1920년 말, 탐보프 주, 중부 볼가, 우크라이나, 서부 시베리아와 다른 지역들을 가로질러 농민봉기가 퍼져나갔다. 군복 입은 농민인 적군이 빠르게 무장해제하면서 그들은 자신의 마을로 돌아와 반란의 불길을 부채질했다. 이 반란의 주요 요구는 곡물징발 중단과 농민 스스로 자신의 생산물 처분 결정권을 갖게 하라는 것이었다. 1921년 초, 반란의 기운은 10월 봉기의 선두에 섰던 페트로그라드, 모스크바, 크론슈타트 등 도시의 노동자들에게도 퍼져나갔다.

페트로그라드에서는 일련의 중요한 자발적인 파업들이 일어났다. 공장 집회와 거리 시위에서 식량과 의복 배급 증가를 요구하는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다수의 노동자들이 추위와 배고픔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제적 불만들과 결합되어 다른 좀 더 정치적인 요구들 또한 나타났다. 노동자들은 도시 바깥으로 나가는 것에 대한 제한 조치를 중단하고, 투옥된 노동자들을 석방하며,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는 등의 조치들을 원했다. 틀림없이 몇몇 반혁명 분자들, 즉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이러한 사건들에서 일정한 역할을 했다. 그럼에도, 페트로그라드의 파업운동은 본질적으로 가혹한 생활조건에 대한 자발적인 프롤레타리아의 반응이었다. 그러나 볼셰비키 당국은 노동자들이 봉기 이후의 국가, 그들에 의하면 "노동자국가"에 맞서서 파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어서 파업 노동자들을 선동자, 게으름뱅이, 개인주의자로 비난했다.

이러한 것들이 크론슈타트에서 수병 반란을 야기했던, 러시아, 그리고 무엇보다도 크론슈타트의 사회적 문제들이었다. 페트로그라드에서 파업이 일어나기 전에조차, 트로츠키가 "혁명의 영광과 명예"라고 묘사했던 크론슈타트 수병들은 이미 관료적 경향과 붉은 함대 내에서의 군사적 규율 강화에 맞서서 저항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페트로그라드의 반란 소식이 도달하고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수병들은 즉시 결집하기 시작했다. 2월 28일에 그들은 페트로그라드 공장들에 대표를 보냈다. 같은 날 순양함 "페트로파블로프스크"의 선원들은 회합을 갖고 크론슈타트 반란자들의 강령이 될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 결의안은 경제적∙정치적 요구안들을 제출했다. 특히 요구안에는 가혹한 "전시 공산주의" 방책들의 중단과 연설의 자유, 출판의 자유, 그리고 모든 정당 활동의 권리를 보장하는 속에서 소비에트 권력을 재선출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들이 담겨 있었다.

3월 1일 두 명의 볼셰비키 대표들은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승무원들과 만나서 그들의 결의안을 규탄하고 만약 수병들이 그들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는다면 즉각 진압에 나설 것이라고 위협했다. 이 건방지고 자극적인 볼셰비키 지도부의 태도는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격으로 수병들의 분노를 더욱 불러일으켰다. 3월 2일에는 크론슈타트 소비에트 재선거를 실시하였으며, 300명의 대표들이 페트로파블로프스크 결의안에 찬성투표하고 "소비에트 정부의 평화로운 재편"을 위한 동의안을 채택했다. 대표들은 시행정부를 떠맡는 "지역 혁명위원회"와 어떠한 정부의 무장개입에라도 맞서기 위한 방어조직을 만들었다. 이렇게 크론슈타트 코뮌이 탄생했다. 크론슈타트 코뮌은 그 자신의 『이즈베스치야』(정부 기관지, 역자)를 발행하기 시작해서 첫 호에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 "이 나라의 지배자인 공산당은 혼란으로부터 나라를 구출하는데 무능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최근에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에서 발생한 셀 수 없는 사건들은 공산당이 노동대중의 신뢰를 상실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공산당은 노동계급의 요구들을 무시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불만들이 반혁명 행위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러한 믿음으로 공산당은 심각한 실책을 저지르고 있다."

그러나 크론슈타트 코뮌의 반란은 완전히 고립된 채로 남았다. 그들이 "세 번째 혁명"이라고 부른 반란을 확대해기 위한 반란자들의 소집 요청에 응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페트로그라드의 공장들에 대표를 파견했음에도, 소책자들과 페트로파블로프스크 결의안을 배포했음에도, 붉은 함대의 요청은 전체 러시아 노동계급을 결집시키는데 실패했다. 러시아 노동계급은 반란자들의 강령에 공감했을 수도 있으며 그 반란을 완전히 지지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은 그들의 파업 투쟁을 중단했으며 계엄령 하의 일터로 돌아갔다. 내전의 혼란은 러시아 노동계급을 파괴하고 사기를 꺾어놓았으며 분해시켜버렸다.

크론슈타트 코뮌의 분쇄
반란에 대한 볼셰비키 정부의 즉각적인 반응은 반란을 소비에트 권력에 맞선 반혁명 음모의 일부로 비난하는 것이었다. 분명히 백군에서 사회혁명당에 이르기까지 모든 반혁명 세력들은 반란을 그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려고 시도했으며 "원조"를 제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명객들이 통제하는 러시아 적십자 채널을 통해 제공된 인도적 지원을 제외하고 혁명위원회는 반혁명세력의 모든 제의를 거절했다. 혁명위원회는 자신들이 전제정부의 복귀 또는 제헌의회-1918년 초에 혁명의 적들에 의해서 소집된 적이 있다-의 복귀가 아니라 관료적 지배로부터 해방된 소비에트의 재선출을 위해서 투쟁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노동자의 성벽은 소비에트이지 제헌의회가 아니다. 크론슈타트에서 권력은 수병과 적군병사, 혁명적 노동자들의 손에 있다. 모스크바 라디오가 기만적으로 주장하듯이 권력은 코즐로프스키가 이끄는 백군의 수중에 있지 않다."라고 크론슈타트 『이즈베스치야』는 선언했다.

해군과 육군 병사의 계급구성뿐만 아니라 반란자들의 강령과 이데올로기에도 소부르주아적 요소들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사실상 이 반란은 볼셰비키가 1917년 혁명의 선봉에 섰기 때문에 그들을 혐오하는 자들이 그들의 경멸감을 드러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들의 존재가 운동 그 자체의 근본적인 성격을 바꾸지는 못한다.

볼셰비키 지도부는 크론슈타트 반란에 대해서 극도로 완고한 태도로 대응했다. 볼셰비키의 완고한 태도 때문에 토론이나 타협의 가능성은 빠르게 사라졌다. 요새에 대한 군사적 공격을 하는 동안, 반란을 분쇄하기 위해서 파견된 적군 부내들은 항상 사기가 바닥을 때렸다. 몇몇 부대들은 반란자들에게 동조했다. 군대의 충성심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걸출한 볼셰비키 지도자들이 그 당시 모스크바에서 열리던 10차 당 대회에서 급파되었다. 동시에, 체카의 소총부대들이 어떠한 사기저하도 퍼져나갈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 병사들의 뒤에서 그들을 겨누었다. 요새가 완전히 함락되었을 때, 체카는 약식재판을 실시하여 처형하거나 빠르게 사형을 언도하는 방식을 일부 반란자들을 학살했다. 다른 사람들은 강제수용소에 보내졌다. 진압은 체계적이었고 무자비했다.

이 사건 당시에 백군이 볼셰비키의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서 크론슈타트 반란을 이용할 위험성에 대한 극도의 두려움 때문에 볼셰비키 권력 내부의 가장 비판적인 분파들조차도 반란을 분쇄하는데 협력하게 되었다.

전체 노동자운동의 오류
크론슈타트 반란에서 대해서 모든 반(反)레닌주의 조류들이 계속해서 숨기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있다면, 그 당시에 볼셰비키의 오류를 전체 노동자운동이 공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코민테른으로부터 추방된 좌익 공산주의 분파들과 조류들도 포함된다.

그러므로 볼셰비키 지도부에 대한 반대 분파인 노동자 반대파는 반란 진압에 대한 열렬한 지지를 표명했다. 그리고 이 분파를 이끌었던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그녀의 분파 성원들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출병에 앞장서서 지원해야 한다고 지시하기에 이르렀다.

독일-네덜란드 좌파는 심지어 그들의 입장이 콜론타이처럼 반란의 진압을 열렬히 지지하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지만, 볼셰비키의 정책을 비난하거나 비판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그때 KAPD[3]는 크론슈타트 반란이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반혁명 음모라는 주장을 두둔했으며 진압을 비난하지 않았다. 네덜란드 좌파의 투사인 헤르만 호르터는 볼셰비키의 방책이 크론슈타트 반란에 직면하여 "어쩔 수 없는"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그는 크론슈타트 반란이 농민들에 의해서 일어난 반혁명 봉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볼셰비키 내에서, 빅토르 세르쥬는, 비록 그가 크론슈타트 수병들에 맞서서 무장하는 것을 반대했지만, 당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진압에 맞서서 저항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이 비극적인 오류는 볼셰비키 당과 그 지도부만의 문제가 아니었음이 명백하다. 사실상 볼셰비키는 단지 비극적으로 잘못된 정책을 수행했을 뿐이다. 다만 이 정책은 당시 전체 노동자운동이 반혁명은 봉기 이후에 국가 그자체로부터 자라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함으로부터 발생한 당연한 결과였다. 이는 아나키스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1917년에 "구더기는 이미 과일 안에 있기" 때문이 아니다.(그들에 의하면 계급 정당의 존재가 언제라도 그 안에 반혁명의 씨앗을 담고 있다.) 그것은 러시아 혁명의 국제적인 고립 때문에 볼셰비키가 국가로 흡수되고, 국가 그 자체가 자신을 노동계급에 맞선 국가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 당시의 전체 노동자운동의 오류는 1917년 10월 혁명 이후 출현한 제도장치가 "프롤레타리아 국가"라는 생각을 둘러싸고 일반적인 혼란으로 나타났다.

옮긴이 김정호



[1] Internationalism, Vol. 123, 2002년 가을

[2] 그들의 팸플릿, 『사회주의/공산주의를 위한 혁명적 계급투쟁에서 국제노동계급의 중요한 몇 가지 교훈들 :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자신의 행동에 의해서 이루어진다!』을 보시오.

[3] 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 그들은 1920년에 코민테른의 입장들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고, 특히 "공동전선" 정책에 반대했기 때문에 코민테른에서 축출되었다.


http://ko.internationalism.org/inter123/lessons_of_kronstadt




1921년 크론슈타트 이해하기
Submitted by ICC on Mon, 2007-11-19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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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derstanding Kronstadt)[1]
1917년 러시아에서 노동자 계급이 10월 혁명을 통해 권력을 잡고 난 뒤 4년째, 지금으로부터 80년 전인 1921년 3월, 볼셰비키 당은 페트로그라드에서 3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핀란드 만의 작은 섬 코틀린에 주둔하고 있는 발트 함대의 크론슈타트 수비대가 일으킨 폭동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볼셰비키 당은 러시아와 외국 부르주아지의 반혁명 군대에 맞선 몇 년 동안 피로 물든 내전을 치러온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크론슈타트 수비대의 봉기는 새롭고 달랐다. 이는 소비에트 정권의 노동계급 지지자가 내부로부터 일으킨 봉기였다. 그들은 10월 혁명의 전위였고, 이제 여러 가지 참을 수 없는 왜곡과 새로운 권력의 남용을 바로잡으려는 계급의 요구를 들고 나왔다.  

볼셰비키가 이 투쟁을 무력으로 짓누른 것은 그때 이래 줄곧 혁명적인 프로젝트가 지닌 뜻을 이해하는 데서 하나의 기준점을 제공해왔다. 부르주아지가 노동계급에게 맑스와 레닌을 스탈린과 굴락에 연결하는 끊어질 수 없는 고리가 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게 모든 것을 하고 있는 오늘날, 크론슈타트 사건에 대한 이해는 더욱 더 중요하다.

우리의 의도는 모든 세세한 내용을 검토하려는 게 아니다. 『국제 리뷰』(International Review)에 실린 이전의 논문들은("크론슈타트의 교훈들," International Review n°3과 "1921: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이행기 계급," International Review n°100) 이미 상세하게 그 사건을 다루어왔다.

그와 달리 우리는 이번 기념일을 기회로 서로 논쟁을 벌이고 있는 크론슈타트 봉기에 대한 두 가지 종류의 주장에 집중하려고 한다. 첫 번째로 아나키스트는 크론슈타트 사건을 맑스주의와 맑스주의의 이름으로 행동한 당이 지닌 권위주의적 반혁명의 본질을 입증하는데 쓴다. 두 번째로 오늘날 프롤레타리아 진영에 여전히 있는 생각, 즉 반란을 짓누른 것은 10월 혁명의 성과물을 방어하려는 "슬프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아나키스트 견해
아나키스트 역사학자 볼리네(Voline)에 따르면:

레닌은 크론슈타트 운동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거나, 또는 차라리 그 어떤 것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와 그의 당에 꼭 필요한 것은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그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

맑시스트, 권위주의자, 국가주의자로서, 볼셰비키는 대중에게 어떠한 자유 또는 독자적인 행동을 허용할 수 없었다. 볼셰비키는 자유로운 대중을 믿지 않았다. 볼셰비키는 그들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자신들의 독재가 무너지는 것이 지금까지 해 왔던 모든 일을 무너트리고 혁명을 위험에 맞닥뜨리게 하는 것을 뜻한다고 믿었다. ......

크론슈타트는 모든 멍에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고 사회 혁명을 이루려고 하는 인민이 처음으로 혼자의 힘으로 일으킨 시도였다. 그 시도는 정치적 지도자나 교사 없이 노동자계급 자신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단호하게, 대담하게 이루어졌다. 그것은 제3의 혁명, 사회 혁명으로 향하는 첫 걸음이었다.

크론슈타트는 무너졌지만, 크론슈타트 봉기한 사람들은 과업을 해냈다. 바로 그 점이 중요한 것이다. 봉기에 참여한 대중 앞에 펼쳐진 복잡하고 흐릿한 미로에서, 크론슈타트는 올바른 길을 밝혀주는 밝은 횃불이었다. 봉기한 사람들이 스스로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알고 있는 환경에서 그들이 권력이라는 말과 생각을 모두 없애지 않고 그 대신에 협력과 조직화, 관리를 말하면서 여전히 권력(소비에트 권력)에 대해 말했다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은 과거에 바친 마지막 찬사였다. 노동계급 스스로가 토론과 조직화와 행동의 완전한 자유를 얻어낸다면, 대중이 독자적인 행동에서 참된 길을 찾아낸다면, 나머지는 자동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일어날 것이다.[2]

아나키스트들은 Voline가 간단명료하게 표현한 견해를 받아들이고 있다. 그들에게 크론슈타트 봉기에 대한 진압은 볼셰비키가 지닌 맑스주의 사상의 당연하고 논리적인 결과였던 것이다. 당의 대리주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독재를 당의 독재와 같은 것으로 보는 것, 그리고 이행기 국가의 형성은 볼셰비키가 믿지 않았던 대중에 대한 지나친 권력과 권위 욕구를 표현한 것이었다. Voline에 따르면, 볼셰비즘은 억압의 한 형태를 다른 형태로 대체한 것을 뜻했다.

그러나 볼리네는 크론슈타트를 그저 봉기였다고만 여기지 않았다. 그에게 크론슈타트는 미래를 위한 모델이었다. 만일 크론슈타트 소비에트가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과업(협력, 조직화, 관리)에 몰두한 나머지 정치적 과업에 대해 잊었다면(소비에트의 권력에 대한 발언), 그것을 교훈삼아 우리는 진정한 사회혁명이 무엇이어야만 하는지에 대한 그림, 이를테면 지도자 없고, 당이 없는, 국가가 없는, 그리고 어떤 종류의 권력도 없는 사회, 즉각적이고 완전한 자유의 사회를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불행히도, 아나키스트가 이끌어낸 첫 번째 교훈은 공산주의 혁명이 새로운 형태의 폭정으로 이끌 수 있다고 한 세계 부르주아지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와 매우 밀접하게 일치한다.

아나키스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이러한 견해의 일치는 우연이 아니다. 양쪽 모두 위계제와 폭정과 독재에 맞서는 평등과 연대와 우애라는 추상적 개념에 따라 역사를 평가한다. 부르주아지는 1918년에서 1920년 사이에 러시아에 맞서 무력으로 개입하고 경제 봉쇄를 이끌었던 반혁명 세력의 잔인성을 정당화하려고 10월 혁명에 반하는 이러한 도덕적 원리를 냉소적이고 위선적으로 이용했다. 다른 한편 아나키스트가 볼셰비즘에 대한 실천적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부닥쳐야만 했던 역사적 어려움을 이해할 수 없게 녹여 없애는 순진한 유토피아이다.

그러나 1936년 스페인에서 일어난 사건이 확증한 것처럼, 아나키스트가 지닌 순진성 때문에, 그들은 맑스가 세운 혁명에 대한 역사 개념을 거부하고 나서 부르주아 진영이 일으킨 실제 반혁명 앞에 어쩔 수 없이 투항하게 되었다.  

만일 볼셰비키가 볼리네가 주장하는 것처럼 전적으로 권력욕 때문에 근본적으로 혁명을 일으키게 되었다 하더라도, 아나키즘은 그와 견주어 볼 때 역사의 진실에서 제기되는 일련의 물음에 대답할 수 없다. 만일 볼셰비키가 끝내 권력만을 탐했다면, 왜 그들은 사회민주당의 다수와는 달리, 제국주의 전쟁을 규탄하고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화되도록 요구함으로써 1914년과 1917년 사이에 추방당할 운명을 지웠는가? 왜 볼셰비키는 멘셰비키와 사회 혁명당과는 달리, 1917년 2월 혁명이 성공하고 난 뒤 러시아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와 함께 임시 정부를 꾸리는 데 참여하지 않고 그 대신에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이전할 것을 요구했을까?

왜 볼셰비키는 노동자계급이 아주 뒤떨어졌고 부르주아지를 뒤엎기에는 수적으로도 모자라다고 여긴 대부분의 국제 사회민주주의자들과는 달리, 10월에 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시작할 수 있는 러시아 노동계급의 역량을 믿었는가?

왜 볼셰비키는 노동계급이 모든 희생을 해서라도 연합국의 봉쇄를 이겨내고 반혁명 군대에 맞서 무기를 들고 저항할 것이라고 믿었는가, 그리고 그러한 노동계급의 지지를 얻고 유지할 수 있었는가?

왜 볼셰비키는 유럽과 나머지 세계 전체에서 일어난 혁명의 시도에서 러시아의 지도를 따르도록 세계 노동자계급을 고취시켰는가? 어떻게 볼셰비키 당은 세계적 규모에서 새로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창건을 주도할 수 있었는가?

마지막으로 왜 당을 국가 기구로 통합하는 과정과, 소비에트와 공장 위원회와 같은 노동자 권력의 대중 조직에 대한 귄리침탈, 그리고 마지막으로 계급투쟁에 맞서 무력의 사용은 하룻밤 새에 일어난 게 아니라, 그저 질질 끌다 일어난 것인가?

볼셰비키가 태어날 때부터 그런 더러운 속성을 지녔다는 이론으로는 일반적으로 러시아 혁명의 타락을 또는 구체적으로 크론슈타트를 설명하지 못한다.

1921년쯤 러시아에서 혁명, 그리고 그것을 이끌었던 볼셰비키 당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독일과 다른 국가로 혁명의 확산은 1919년과 견주어 볼 때 훨씬 가망 없는 것으로 보였다. 세계 경제는 상대적으로 안정되었고 독일에서 스파르타쿠스동맹이 일으킨 봉기는 실패했다. 러시아 안에서 내전을 이겨냈지만, 반혁명 군대의 거듭된 공격과 국제 부르주아지가 의식적으로 조직한 경제적 질식 때문에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공업 기반은 무너져 버렸고, 노동자 계급은 제1차 세계대전과 내전에서 희생되었거나 또는 살아남으려고 어쩔 수 없이 도시를 떠나 시골로 떼 지어 몰려갔기 때문에 크게 줄어들었다. 볼셰비키 정권은 지방에서 일련의 폭동을 일으킨 농민층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또한 무엇보다도 1921년 2월 중순에 페트로그라드에서 파업을 일으켰던 노동계급 사이에서도 점점 더 인기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그 때 크론슈타트가 일어났다.

어떻게 러시아는 다른 국가들, 특히 유럽의 노동자 계급 혁명에서 지연된 도움을 기다리면서 세계 혁명의 요새로 남고 노동계급의 불만과 경제적 붕괴를 이겨낼 수 있는가? 아나키스트는 혁명이 어떻게 타락했는가에 대해 전혀 설명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로지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대한 정치적 우위, 권력의 집중화, 혁명의 국제적 팽창, 그리고 공산주의 사회로 이행기의 문제에만 집중했다. 이것은 볼셰비키가 크론슈타트 봉기를 군사적으로 해결하게 하고 노동계급의 저항을 배반과 반혁명 행위로 다루게 한 재앙과도 같은 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바꾸어 놓지 못한다. 그러나 볼셰비키 당은 오늘날 혁명가들이 지닐 필요가 있는 것처럼 가늠자를 갖지도 못했다. 그들은 그때 그저 노동자 운동의 이득을 이용할 수 있었다. 그 노동자 운동은 결코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적대적인 자본주의 세계에서 권력을 보유하는 아주 어려운 과업에 부닥쳐야만 했다. 성공적인 권력 장악 뒤 볼셰비키는 노동계급의 당에 대한 소비에트의 관계도, 부르주아 국가를 필연적으로 분쇄하게 될 이행기 국가에 대한 이러한 두 계급 조직의 관계도 이해하지 못했다.

정권을 잡고, 차츰 노동자 평의회와 공장 위원회를 국가에 통합하면서, 볼셰비키 당은 어둠 속에서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노동자 운동 안에서 지배적인 의견에 따르면, 혁명에 대한 주요한 위험은 새로운 국가 기구 밖에서, 즉 국제 부르주아지와 추방된 소작농과 러시아 부르주아지에게서 나왔다. 비록 볼셰비키 당 내부에 그때 정권의 관료화에 맞서 경고했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공산주의 운동에서 어떠한 경향들도, 심지어 좌파도 대안의 전망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처방은 제한되어 있었고 다른 위험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콜론타이와 쉴라프니코프의 노동자 반대파는 노동자 평의회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중 조직으로서 국가를 초월했다는 것을 잊어버린 국가의 과도함에 맞서 노동자를 방어할 것을 노동조합에 요구했다.

볼셰비키 당 내부에는 봉기를 분쇄하는 데 반대했던 몇몇 사람들이 있다. 운동에 결합했던 크론슈타트 당원들도 있고 훗날 노동자 그룹을 조직하고 군사적 해결을 반대했던 가브릴 먀스니코프(Gavriil Miasnikov)와 같은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당과 코민테른 내 있는 좌파 경향은 볼셰비키 정권을 비판했지만, 폭력의 사용을 도왔다. 심지어 노동자 반대파도 진압 세력에 자원했다. 당의 독재에 반대했던 독일 공산당은 크론슈타트 반란에 맞선 군사적 행동에 동의했다.

마지막으로 크론슈타트 소비에트의 요구는, 볼리네의 의견과는 달리 대안의 전망을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즉각적이고 지역적인 맥락 안에서 주로 틀지어졌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요새(보루)와 세계적 상황에 대한 더 폭넓은 내포(함의)들을 취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그러한 요구들은 전위당의 역할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답변하지 못했다.[3]

러시아 혁명의 패배와 그것을 주도했던 혁명적 흐름에서 모든 교훈을 이끌어내려고 애쓴 혁명가들이 이 비극적 사건의 진정한 교훈들을 지적할 수 있었던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다.  

어떤 환경에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 그리고 우리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적들에 의한 책략의 희생자일 수도 있다는 것을 심지어 인정할 것이다. - 프롤레타리아 국가에 맞서 투쟁할 수도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사회주의가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에게 폭력과 강압에 의해 강요될 수 없다는 원칙에서 시작해야만 한다. 크론슈타트를 잃어버리는 편이 지리적 관점에서 그것을 지키는 것보다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러한 승리가 실질적으로 한 가지 결과만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바로 그 바탕, 프롤레타리아트가 수행했던 행동의 내용을 바꾸는 결과이다. (Octobre, 1938년, Italian Fraction of the Communist Left에 의해 편찬됨)

좌익 공산주의는 본질적인 문제를 정확히 지적했다. 즉 국가가 노동자 계급에 맞서 폭력을 쓰는 데서 볼셰비키 당은 자신을 반혁명의 수장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크론슈타트에서 거둔 승리는 볼셰비키 당이 노동자 계급에 맞서 러시아 국가의 도구로 되었다는 경향을 가속화시켰다. 이러한 견지에서, 좌익 공산주의는 또 다른 대담한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전위로 남으려는 좌익 공산주의는 현상을 유지하고 혁명의 과정에 대한 진보를 막으려는 필연적인 경향을 반영하는 혁명 뒤에 들어선 국가에서부터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자율성을 지켜야만 한다.

보르디가주의자(Bordigist)의 견해
그러나 오늘날 좌익 공산주의에서 이러한 결론은 전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사실, 좌파의 몇몇 부분은, 특히 보르디가주의자(Bordigist)는 1938년 Italian fraction의 태도와는 완전히 모순되게, 레닌과 트로츠키가 크론슈타트를 탄압한 것을 정당화했다.

볼셰비키가 어쩔 수 없이 크론슈타트를 진압하게 한 끔찍한 상황을 프롤레타리아 권력이 탄생이나 강화의 과정에서 노동자를 향해 발포할 수 있다는 원칙을 거부하는 몇몇 사람들과 함께 토론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할 수도 있다.

프롤레타리아 국가가 부닥쳐야만 한 끔찍한 문제의 제거는 장밋빛이 감도는 안경과, 이러한 반란에 대한 진압이, 트로츠키에 따르면, "비극적 필요"였지만 필요이고 심지어 의무였다는 이해를 통해 혁명의 비전에 대한 비판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크론슈타트 : 슬프지만 어쩔 수 없는 일", Programme Communiste n°88, 국제 공산주의자 당의 이론적 기구, 1982년 5월).

그들이 속해 있다고 주장하는 전통을 회피한, Bordigist 경향은 볼셰비키 당의 비타협적인 국제주의를 방어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경향은 또한 볼셰비키의 실수를 열정적으로 방어하고, 당과 혁명이 왜 타락했는지 하는 문제에서 배울 수 없게 한다.[4]

그들에 따르면, 혁명 과정에서 계급과 혁명 뒤에 들어선 국가에 대한 당의 관계는 원칙의 문제가 아니라, 편의주의의 문제, 즉 어떻게 각각의 상황에서 혁명적 전위가 자신의 기능을 가장 잘 수행할 것인가의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이 커다란 투쟁은 그저 프롤레타리아 계급 안에서 끔찍한 긴장을 일으킬 수 있을 뿐이다. 사실상, 당이 혁명을 만들 수 없거나 또는 대중없이 또는 대중에 반하여 독재를 지도할 수 없다는 것은 틀림없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혁명의 의지는 ‘수적 다수' 또는 심지어 더 모순되는 것으로서 만장일치 합의를 찾기 위해 선거 협의체나 의견 투표(여론 조사)에 의해 나타내지 않는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혁명의지는 투쟁의 등장과 좀 더 정확한 투쟁 방향을 통해 표현된다. 그러한 투쟁은 가장 중요한 분파가 머뭇거리고 우유부단하고, 필요하다면 자신의 반대파를 제거하는 것이다. 내전과 독재의 변화 과정에서, 서로 다른 층위의 태도와 관계는 바뀔 수도 있다. 그리고 몇몇 ‘소비에트 민주주의'에 의해 노동자, 준-노동자 또는 쁘띠 부르주아지의 모든 계층에 대한 똑같은 무게와 똑같은 중요성이 받아들여지기는커녕, 트로츠키는 자신의 책 『테러리즘 또는 공산주의』에서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기구인 소비에트에 참가할 권리가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의 태도에 따라 달려있다고 설명한다.

어떠한 ‘헌법상의 규칙'도 어떠한 ‘민주주의 원칙'도 프롤레타리아트 계급 내부의 관계를 조화시킬 수 없다. 어떠한 비책도 지역적 필요와 국제적 혁명의 요구 사이의, 직접적 필요와 역사적 계급투쟁의 요구 사이에 있는 모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다양한 분파들의 반대 속에서 드러났던 모순을 풀 수 없다. 어떠한 형식주의도 계급의 가장 진보적인 분파와 계급의 혁명적 투쟁 조직인 당과, 지역적이고 직접적인 조건들의 압력을 통해 서로 다른 정도로 영향을 받는 대중 사이의 관계를 분류할 수 없다. 레닌이 말했듯이, ‘대중의 정신을 관찰하고 대중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당도 때때로 대중에게서 불가능한 것을 요구해야 한다. 좀 더 정확히, 당은 오로지 앞으로 나아가려고 애쓰는 것을 통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한계'를 찾고 있다. (ibid.)

1921년에 볼셰비키 당은 그들을 지도할 이전의 경험이나 요소 없이 잘못된 길을 선택했다. 오늘날 보르디가주의자들은, 불합리하게도 볼셰비키의 실수에서부터 장점을 끌어오고 "원칙은 없다."고 선언한다. 보르디가주의자들은 모든 계급의 공통된 지위에 도달하기 위한 형식주의적이고 추상적인 방법을 비웃음으로써 프롤레타리아 권력을 실행하는 문제를 마술로 쫓아버린다.

아주 유동적인 상황에서 합의를 세울 수 있는 결코 완벽한 수단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인 반면에, 노동자 평의회 또는 소비에트가 전체로서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 의지를 담아내고 발전하게 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수단으로 여겨졌다. 비록 1918년의 독일과 다른 지역에서 드러난 경험이 노동자 평의회나 소비에트가 부르주아지에 의한 회복에 취약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긴 했지만. 보르디가주의자들은 당이 대중없이 혁명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일 만큼 너그러웠지만, 당을 통해 그리고 당의 허락하는 것을 빼고는 대중은 전체 계급으로서 그들의 혁명적 의지를 표현할 수단을 지니지 못했다. 그리고 당은 필요하다면 크론슈타트에서처럼 기관총으로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바로잡을 수 있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두 가지 모순적인 표어(슬로건)를 갖는다. 즉 혁명 전에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혁명 후에는: "모든 권력은 당으로."

Octobre의 편집진과 달리, 보르디가주의자들은 부르주아지 혁명과는 대조적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과업이 소수집단에 대표될 수 없지만, 자기 의식적인 다수를 통해 수행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잊었다. 노동자의 해방은 노동자 계급 스스로의 과업이다.

보르디가주의자들은 둘 다 마치 기만인 것처럼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노동자 민주주의를 모두 거부한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자본주의의 전복을 위해 스스로를 동원하는 수단인 소비에트와 노동자 평의회는 프롤레타리아 계급 내의 긴장과 차이를 담아내고 조절하는, 그리고 이행기 국가를 통한 무장 권력을 유지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조직이어야만 한다. 당은, 특정 시기에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나머지보다 명확히 앞 서 있는, 없어서는 안 될 전위는, 이러한 권력을 노동자계급 자체와 대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실제로, 비록 "원칙적이지" 않지만 당이 노동자를 쏠 수 있는 권리를 입증하면서, 보르디가주의자들은, 마치 이러한 결론의 끔찍함에서 피하려는 것처럼, 크론슈타트 봉기가 어쨌든 프롤레타리아의 특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그 때 레닌의 규정 가운데 하나에 따르면, 크론슈타트는 백군 반동세력을 위해 문을 열어주는 "쁘띠 부르주아적 반-혁명"이었다.      

모든 종류의 혼란되고 심지어 반동적 생각들이 크론슈타트의 모반자들에 의해 표현되었다는 것은 확실히 진실이다, 그리고 몇몇 내용은 강령에 반영되어 있기도 했다. 반혁명 세력의 조직된 군대가 그들 자신의 목적을 위해 반란을 이용하려고 애썼다는 것도 진실이다. 그러나 크론슈타트의 노동자는 그들 자신을 1917년 혁명과 연속성을 지니고 있고 세계적 규모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 운동의 통합 부분으로서 계속 생각해왔다:

전 세계 노동자에게 소비에트의 권력의 방어자인 우리가, 사회 혁명의 획득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자. 우리는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대의를 위해 투쟁하면서 크론슈타트의 폐허 속에서 이기거나 죽을 것이다.(the Kronstadt Pravda, p. 82)

크론슈타트 반란자들이 아무리 혼동을 표현한다 하더라도, 그들이 내건 요구는 또한 끔찍한 생활조건, 국가 관료제의 점점 늘어나는 억압과 쇠퇴한 소비에트에서 정치적 권력의 손실에 부닥쳤던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이해들을 반영하고 있었다는 것을 절대로 부인할 수 없다. 그때 볼셰비키가 반란자를 쁘띠 부르주아지와 반혁명 세력의 정치적 대리인으로서 낙인을 찍은 시도는 물론 힘에 의해 프롤레타리아 계급들 안에 있던 끔찍한 위험과 복잡성의 상황을 해결하고자 하는 핑계였다.

좌익 공산주의가 역사적으로 뒤늦게 알게 된 지혜와 이론적 작업 때문에, 우리는 일련의 추론이 지닌 기본적 오류를 볼 수 있다. 즉 볼셰비키가 크론슈타트 반란을 진압했고 반-프롤레타리아 독재, 즉 자본주의 관료주의의 절대 권력인 스탈린이즘이 아직도 공산주의자를 대량으로 학살했다는 것이다. 사실, 소비에트를 다시 세우려는 크론슈타트 노동자의 노력들을 진압하고, 그들 자신을 국가와 동일시하면서, 볼셰비키는 알지도 못한 채 스탈린주의로 가는 길을 닦고 있었다. 볼셰비키는 백군의 복원보다 노동계급에 훨씬 더 끔찍하고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된 반혁명 과정의 가속화를 도왔다. 러시아에서 반혁명 세력은 자신을 공산주의자로 선언하면서 승리했다. 스탈린주의 러시아가 살아있는 사회주의의 체현이며 10월 혁명과 직접적인 연결선 상에 있다는 생각은, 전 세계에 있는 모든 노동자 계급 대중에게 끔찍한 혼동과 막대한 혼란을 낳았다. 우리는 여전히 1989년 이래로 부르주아지가 공산주의의 죽음과 스탈린주의의 사망을 같다고 하는 것처럼 실재에 대한 이러한 왜곡의 결과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보르디가주의자들은 이런 경험을 했지만 여전히 1921년의 비극적인 실수와 동일시하고 있다. 그것은 그들에게 거의 "비극적" 필요가 아니라, 되풀이되어야만 할 공산주의자의 의무이다!

아나키스트들과 같이, 보르디가주의자들은 소비에트에서 조직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무장된 의지를 이끌기도 하고 연기하기도 하고 의지하기도 한 1917년 볼셰비키 당과, 소비에트를 그들의 이전 권력의 그림자로 축소시키고 노동자 계급에 맞선 국가의 폭력으로 전환시켰던 1921년의 볼셰비키 당 사이에 있는 모든 모순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나키스트들이 그들의 현재 캠페인들에서 볼셰비키를 마키아벨리적인 압제자들로서 묘사함으로써 부르주아지를 돕는 반면에, 보르디가주의자들은 이러한 부정적 이미지를 혁명적 비타협의 극치로서 찬양한다.

그러나 좌익 공산주의는 볼셰비키 유산에 관계하면서도 그 이름에 걸맞게 실수를 비판할 수 있어야만 한다. 크론슈타트 반란의 진압은 가장 해롭고 끔찍한 것들 가운데 하나였다.

Como 8. 1. 2001

옮긴이: 이건민

[1] International Review, 2001, vol. 104

[2] Voline,『알려지지 않은 혁명』(The Unknown Revolution), Black Rose Books, 1975, p. 534-538.

[3] 크론슈타트 반란이 내건 강령(platform)에 대해서 알고 싶으면 International Review 3, 51쪽을 참조하시오.

[4] 공산주의자 좌파의 또 다른 지국인, 혁명정당을 위한 국제적 국(局)은 크론슈타트에 대한 모호한 태도를 갖고 있다. Revolutionary perspectives No 23(1986)에 출판된 논문은 10월 혁명과 볼셰비키 당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재확인하고, 크론슈타트 반란이 깊이 불리한 조건들을 반영했고, 그것이 많은 혼란스럽고 반동적인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크론슈타트 반란의 아나키스트적 이상화를 거부한다. 동시에 그 논문은 크론슈타트에 대한 습격이 당의 독재를 지키기 위한 불가피성이었다고 하는 Bordigist의 생각을 비판한다. 그것은 크론슈타트의 기본적인 교훈들 중 하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그 계급 자체에 의해서 즉, 당에 의해서가 아니라 노동자 협의회를 통해서 수행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또한 프롤레타리아 요새의 고립이라는 전체적 정황에서, 당과 소비에트 당국 모두의 내부적 타락을 가속화시켰던, 당과 계급 사이의 관계에 관한 볼셰비키 세력의 실책들을 보여준다. 그 논문이 그 반란을 프롤레타리아적인 것으로 특징화 짓지 않고 근본적인 물음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노동자 계급의 불만에 대항하여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답하지 않음에도, 그들은 그것이 노동자 운동에서 느린 고투의 장으로 열릴지라도 그것을 반혁명의 조종의 결과로서, 그 반란의 진압은 더욱 정당화된다고 심지어 말한다.


http://ko.internationalism.org/ir104/understanding_kronsta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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