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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스코프스키 2008-06-18 17:06:04, Hit :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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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하승우]직접행동의 민주주의
직접행동의 민주주의


2008. 06. 13.
발제자: 하승우


조금 당황스러운 상황이다. 이런 상황이 오리라 예측하고는 있었지만 그 시기와 이슈가 이렇게 등장하리라곤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번 촛불집회를 계기로 ‘직접행동’과 ‘생활정치’라는 두 개념이 화두로 등장했다. 하지만 이 두 개념이 기성정치에 대한 근본적인(radical) 비판과 대안이라는 점은 사라지고 단순히 현재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한 임기응변식 단어(직접 나섰다 또는 먹거리 식의 반응!)로 사용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러다보니 단어의 사용 외에 이렇다할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직접행동은 그 개념상 생활정치와 밀접하게 연관될 수밖에 없고 그 자신의 정치관과 조직, 제도적인 대안을 마련하고 있다. 직접행동이라는 개념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단어만 사용하니 더욱더 설명이 어려워질 뿐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매체들은 이번 촛불집회의 ‘새로움’만을 강조할 뿐 그것이 과거의 저항과 어떤 연속성에 있는지를 주목하지 않고 있다(김상봉이 <시사인>에 기고한 글을 제외하면1)). 잘못된 권력에 대한 저항이 어찌 이번만이겠는가. 정부의 케케묵은 대처방식이 지금 세대의 감성, 새로운 소통방식과 맞물려 새로운 현상이 나타났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상황이 저항 자체를 설명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리고 시위 분위기와 문화의 다름이 저항의 다름을 뜻한다고 볼 수 있는지는 차분히 생각해볼 문제이다.

어쨌거나 온/오프 라인 모두에서 새로운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은 사실이고, 이런 변화가 한국의 정치지형을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지에 관한 고민이 필요하다. 이 글은 시위에 대한 반응들을 중심으로 직접행동의 정치사상이 민주주의에 어떤 문제의식을 던지는 밝히려 한다.2)




1. 선거 참여율의 저하 = 직접행동의 활성화?


지난 대선과 총선은 최악의 투표율을 보이며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회의를 증명했다. 그런데 정치적 무관심이나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회의적인 태도가 직접행동이나 생활정치의 활성화로 곧바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왜냐하면 직접행동이나 생활정치는 단순히 정치에 무관심이나 회의가 아니라 정치를 바라보는 관점의 근본적인 전환을 뜻하기 때문이다.

직접행동은 구체적인 현실의 욕구, 대중의 일상적인 삶에 기초를 둔 변화를 추구한다. “근본적인 변화를 만드는 데 필요한 주체의 활력은 능동적인 직접행동을 통해서만, 추상적인 논리가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의 욕구에 기반해서만 생성될 수 있다. 그리고 그 활력은 현실을 구성하는 대중들의 몫이다. 제도는 이런 주체의 능동성을 뒷받침할 뿐이고 능동성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변화되어야 한다.”

일상적인 사안에 관해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고 차이와 갈등의 과정을 겪으며 공동체를 구성해가는 과정이 바로 직접행동(direct action)이다. 이를 위해 직접행동은 빠르고 효율적인 결정을 위해 충분히 설명하거나 토의하지 않은 채 다수결에 호소한다든지, 일방적으로 다수의 의지를 강요하거나 소수의 활동가 중심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직접행동은 전위조직의 지도가 아니라 대중의 직접 개입을 요구한다. 아나키즘이 이론적으로 설명했듯이, “직접행동은 민중이 전위조직이나 지식인 등의 대리인을 거치지 않고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서 스스로 행하는 행동을 의미”(게렝 1993: 146)한다.

직접행동에 관한 정의에서 드러나듯이, 직접행동은 정치에 대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관심을, 그리고 대리인을 통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직접 관철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낸다. 따라서 직접행동은 무관심이나 회의같은 수동적인 태도와 달리 적극성과 능동성을 요구한다.

더구나 이 적극성은 단체나 조직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욕구를 직접 드러내고 같은 욕구를 가진 사람들을 조직한다. 따라서 직접행동은 개인과 조직을 구분하는 이분법을 넘어선다. “직접행동은 개인과 대중 사이에 ‘능동적인 관계’를 설정한다. 직접행동은 대중 속에서 개인이 욕구와 요구를 드러내고 그런 차이들을 근본적이고 자율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한다. 또 직접행동은 속도와 결탁한 표준화와 수동성의 굴레를 벗어나 창조적이고 능동적인 실험을 가능하게 한다.”

실제적인 퍼센트를 따져도 선거에 참여하지 않고 촛불집회에도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상황을 무조건 낙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치를 활성화시킬 적극적인 방안을 구상해야 한다.



2. 새로운 주체는 출현했는가?


현재 촛불집회를 주도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다양한 규정들, 예를 들어 2.0세대(김호기), 탈물질주의3), 뉴뉴소셜 무브먼트(조희연), 흐름으로서의 대중(이진경), 다중 등은 타당한가?

일단 세대론은 세대간 차이를 부각시키고 특정한 사람들만을 그 세대에 편입시킨다는 점에서 배타적인 개념이고 정치적으로 올바르지도 않다(하승우, 2008). 대부분의 규정들이 세대론과 비슷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어느 한 특징을 부각시키는 순간 다른 특징은 무시될 수밖에 없다. 그런 주체 규정은 지금 드러나는 다양한 흐름을 포괄하지 못한다.

그리고 ‘흐름으로서의 대중’이나 다중 같은 규정들도 실제 생활영역에서 조금씩 진행된 변화를 포착하지 못하고 현실에 이론을 대입하는 한계를 드러낸다.4) 이번 시위의 특징은 기성 정치에서 소외되거나 배제되었던 개인과 집단들이 거리로 나온 것이지 개인적인 참여가 주류였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물론 다음 아고라를 통해 참여한 사람들의 수는 적지 않다. 하지만 촛불문화제가 촛불행진으로 바뀌고 난 뒤 거리를 가득 채운 깃발의 흐름은 기성 단체(단체의 성격과 상관없이)에 소속된 사람들의 수도 적지 않음을 증명한다.

그리고 촛불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여성들 역시 갑자기 주체로 등장하지 않았다. 지역적인 차원에서 생활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활성화된 여성들의 정치역량이 이번 시위에서 국가적인 차원으로 확대된 것으로 이해하는 게 바르다. 청소년들 역시 정부의 4․15조치가 도화선이 되기는 했지만 두발자유화나 청소년인권과 관련해 이미 활동을 벌여왔다.

그리고 청소년들의 시위참가나 다양한 계층의 시위참가가 이번만의 특별한 사례가 아니라 4․19부터 내려오는 저항의 전통이라는 점을 지적할 필요는 있겠다. 그 전통이 특정한 세대나 계층의 담론에 갇혀 정리되었을 뿐 실제 현실에서는 다양한 흐름이 언제나 존재했다.

생활정치란 것은 단순히 생활상의 이슈가 정치의 의제로 등장하는 현상을 뜻하지 않는다. 생활정치는 직접행동과 마찬가지로 일상생활에서 드러나는 모순과 갈등을 주민 스스로가 해결하는 정치이다. 그것은 “매일 매일의 일상세계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많은 모순과 갈등을 생활구성원 스스로가 해결해 나가고, 그 존재성을 회복하려는 총체적이며 포괄적인 삶의 정치”(김왕배, 2000: 110)를 뜻한다. 따라서 단순히 이슈의 차원에서만 접근할 경우5) 생활정치에서 과정과 자치의 문제가 생략되고 의제만 남게 된다. 이렇게 되면 누군가가 나서서 문제를 대신 해주겠다고 외치고 실제로 문제가 해결될 경우 대중의 정치적인 잠재력은 감소하게 된다.



3. 디지털은 민주주의의 새로운 대안인가?


새로운 주체의 출현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예로 드는 것은 문자메시지, 디카, 웹캠, 블로거, 실시간인터넷방송과 같은 디지털 문화이다. 그런데 이런 디지털의 특징인 ‘드러내기’와 ‘전파하기’는 그것이 가능한 사회적 조건을 필요로 한다. 과거 군사정부 시절 핸드폰과 디카가 보급되었다 한들 ‘나를 숨겨야 하는 운동’이 ‘나를 드러내는 운동’으로 변화되었을 리는 없다. 기술발전에 따른 변화는 분명히 이루어졌지만 그것이 사회적 환경의 변화보다 더 강조되어야 할까? “정부, 정당, 언론, 경찰 등 기존의 권위들 일체에 대한 존중이나 두려움이 없다는 점”(이재영)은 어떻게 가능해졌을까?

그리고 집회현장에 가보면, 과거와 달리 다함께의 유인물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유인물이 배포되지 않는다. 주로 짧은 구호를 적은 내용들. 짧은 구호는 주체들의 성장을 얼마나 자극할 수 있나?

또한 웹 2.0이나 위키페디아같은 인터넷 ‘집단지성’의 가능성이 많이 얘기되고 있지만, 그것은 아직 가능성으로만 얘기되고 있다. 과학기술 자체가 민주주의를 보장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활용하는 사람들에 따라 그 기술은 다른 방향으로 발전될 수 있다.6) 따라서 디지털 자체가 민주주의의 대안일 수는 없다.

사실상 직접행동의 정치는 새로움보다 경계를 넓히고 확장하는 것을 강조한다. 이것을 위해 주체는 ‘학습과 성장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런 성장이 없다면 대중은 ‘욕망의 배치’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다. 이명박을 지지했던 사람이 촛불집회에 나서는 것은 이런 배치의 논리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전히 대중은 기륭전자, 이랜드, KTX 노동자들의 저항에 무심하다. 비정규직에 관한 구호들이 집회현장에서 간혹 나오지만, 그것이 대중의 마음에서 어떻게 이해되고 실감을 가지고 있는지는 따져봐야 할 문제이다. 내 식탁의 안전성을 주장하는 것이 다른 나라 대중의 식탁의 안전성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쉽게 발전하지는 않는다. 소위 386세대의 욕망배치만 봐도 그 점은 쉽게 증명된다. 욕망의 배치구조를 깨지 않는다면 변화는 지속성을 가지기 어렵고, 그런 구조변화는 자각과 성찰을 요구한다.

그런 자각과 성찰이 필요하기 때문에, 직접행동은 ‘사회적 개인’이라는 개념을 주장한다(이 개념은 아나키즘에서 비롯된 것이다).7) 사실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는 새로운 정치를 구상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틀이고 주체에 관한 논의 역시 이 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영국의 정치철학자 무페(Chantal Mouffe)는 다원주의와 개인주의를 구분하면서 개인의 중요성을 받아들이지만 개인주의를 인정하지 않는다. 즉 공동체 내의 여러 가지 사회적인 관계들이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개인은 사회와 분리된 존재로 가정되거나 어느 한 차원(계급이나 성, 인종 등)으로 환원될 수도 없다. 오히려 개인은 그런 사회적인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에 따라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8)

개인이 개인답게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타자가 필요하다. 다른 생명과의 공생을 전제로 하지 않는 자급과 자치는 허구이기 때문이다. 직접행동은 개인과 사회를 대립시키지 않고 공존을 위해 서로가 서로를 필요하다고 본다. 그래서 강하고 자율적인 개인을 만드는 과제는 강하고 자율적인 사회를 만드는 과제이기도 하다. 자기만의 강함을 추구하는 건 권력정치로 변질되기 쉽다.

새로운 주체에 관한 구상은 반드시 이 문제를 건드려야 한다. 이런 논의는 서구사회에서 68년에 논의된 것이기도 하다. 저항의 즐거움, 저항의 축제는 가능한가라는 물음만이 아니라 비폭력은 무조건 인정되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함께 따라야 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새로운 감성’(Marcuse)이 출현할 수 있는가? 세상을 해석하고 즐기는 새로운 이성과 감성이 출현하지 않는 이상 새로운 주체가 등장했다고 선포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 아닐까?




4.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치와 자율로


원래 직접행동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모순적인 관계에 있다. 왜냐하면 직접행동은 단순히 대의민주주의에 의문을 던질 뿐 아니라 국가기구를 비판하고 대안공동체를 구성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민소환이나 국민투표와 같은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은 직접행동의 정치와 맞지 않는다고 얘기할 수 있다. 오히려 연방주의나 마을공동체와 같은 적극적인 대안과 맞물려 있다.

그런데 『직접행동』을 쓴 카터는 이런 직접행동이 다른 모든 정치행위를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카터는 대의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직접행동이 대의민주주의를 보완하고 발전시키는 방안이라고 본다. 카터는 “토크빌처럼, 참여민주주의가 시장사회의 부정적인 측면과 대중여론의 조작이라는 측면을 긍정적으로 상쇄해준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에 “직접행동을 참여적 기능을 충족시키는 추가적 수단으로 보자고 주장”(카터, 2007: 532)한다. 그래서 카터는 대의제도와 직접행동이 서로 보완하며 민주주의를 활성화하는 모델을, 즉 직접행동과 의회제도의 공존을 모색한다. 카터는 독일 녹색운동처럼 “완전히 혁명적 체제 전복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자유민주주의 테두리 내에서 정책이나 제도변화를 모색”(카터, 2007: 94~95)한다.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지 않음에도 카터가 직접행동을 강조하는 중요한 이유는 “직접행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자력화 효과(empowering effect)를 경험한다는 것”, 즉 “직접행동에 가담하는 이들이 공개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당당하게 냄으로써 자부심과 존엄감을 얻을 수 있고,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있으며, 타인과 연대감을 고양할 수 있”(카터, 2007: 515)기 때문이다. 이렇게 직접행동은 시민의 능동성을 자극해서 “민주적 조직방식을 실험해볼 수 있고 새로운 민주주의 사상을 생각해낼 수도 있다.”(카터, 2007: 492)

그렇다면 지금 촛불시위는 한국이 표방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어떤 관련을 맺을 것인가? 이 관련성은 폭력/비폭력의 대립구도만이 아니라 대의민주주의 제도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라는 물음과도 맞닿아 있다.

집회 때마다 거리에서 가장 많이 울려퍼진 노래는 “대한민국 헌법 제 1조”이다. 예전에 나온 노래가 아직도 애창되는 것은 우리 현실의 상황이 여전히 헌법정신과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도가 헌법정신을 실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거리로 뛰쳐나온 사람들이 헌법을 외치고 있다.

사실 행정권력만이 아니라 입법권력이 대중과 분리된 현재의 상황에서 제도적인 대안을 찾을 수 없다는 점은 국가기구가 지속적으로 시민들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게 만든다. ‘거리의 정치’가 ‘공론장’을 구성할 수는 있지만 한국에서는 그 공론장이 입법이나 행정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영향력의 정치’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리라 보긴 어렵다. 최근 조중동에 대한 강력한 압박이 여론형성의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고 있지만 그것이 근본적인 대안이라 얘기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카터의 주장처럼 법에 호소하고 자유민주주의적인 절차에 따르고 난 뒤에 직접행동에 호소해야 한다면, 우리는 누가 법을 만들고 누가 법을 해석하는가라고 먼저 물어야 한다. 법치주의는 “법 앞에서 누구나 평등하다”고 규정하는데, 바로 그 점 때문에 법은 이미 불평등하다. 왜냐하면 자유주의가 전제하는 평등함은 현실세계의 강자와 약자를 구분하지 않아서 현실의 불평등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대한항공의 조양호 전 회장, 두산그룹의 박용성 전 회장, 현대자동차의 정몽구 회장, 한화 그룹의 김승연 회장이 명백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세상을 살고 있다. 반면에 KTX여성노동자들이 500일을 넘게 싸우고도, 뒤이어 새마을 여성노동자들이 반년을 넘게 싸우고도 여전히 그 해법을 찾지 못하는 세상, 이랜드의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거리로 내몰리고 구속되는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현실이기 때문에 직접행동이 필요하다고 얘기할 수 있겠지만, 대의정치체계와 사법권력을 근원적으로 변화시키지 않은 채 직접행동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강자를 위한 법이 제정되고, 강자를 위해 법이 해석되는 현실에서 직접행동은 대의제도 자체에 맞서야 한다.

더구나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반공주의와 친시장이라는 한계를 띠어 왔다.9) 설령 한국의 특수성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자유민주주의는 적극적인 시민참여를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미국의 정치사상가 스위프트가 얘기했듯이 자유민주주의는 약한 민주주의와 연관되어 있다. “약한 민주주의에서 인민 주권은 사유재산권에 포위되어 있으며, 사유재산권은 공동체의 집단적 권리를 좌우하게 된다. 이런 이론은 소유권적 개인주의 개념에 기초한 강한 시장/약한 민주주의 모델이다.”(스위프트, 2004: 46) 자유민주주의는 민주적인 가치들을 개인주의적이고 사적인 목적을 위해 선택하는 수단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시민참여를 강조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유민주주의는 소유권에 대한 공격이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평등에 강하게 반발한다. 그래서 “자유주의는 본질적으로 민주적이지 않으며, 실제로는 전면적 민주주의 개념에 적대적”(스위프트, 2004: 53)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실제로 무페는 법치주의, 종교의 자유, 공공영역과 사적영역의 구분과 같은 자유주의적 세계관과 평등과 인민주권이라는 민주주의적 전통을 구분한다. 법치주의, 인권보장, 개인적 자유에 대한 존중을 강조하는 자유주의적 전통과 평등, 치자와 피치자의 동일시, 인민주권을 강조하는 민주주의적 전통은 구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무페는 이 두 가지 전통 사이에 어떠한 필연적 연관성도 없고,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기 위해 치열한 투쟁을 벌여 왔다고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무페는 자유주의적 전통이 강조되고 민주주의적 전통이 약화되는 것이 ‘민주주의의 빈곤’을 초래한다고 우려한다. 예를 들어, 인권에 대한 존중은 자유주의와 긴장을 유발하고, 자유를 위해 인민주권을 제한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생각도 민주주의의 역설을 불러온다. 따라서 자유민주주의를 고정된 체계로 이해하기보다 그것을 투쟁의 장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유민주주의를 구성하는 양자 사이의 긴장은 정치세력들 사이의 실용적인 협상에 의해 일시적으로 안정화될 뿐이며, 그러한 협상을 통해서 언제나 상대방에 대한 일방의 패권이 확보된다.”(무페, 2006: 19)

따라서 직접행동은 이런 자유민주주의를 넘어서 ‘강한 민주주의’, 궁극적으로 자치와 자율의 삶을 추구한다. 앞에서 봤듯이 직접행동이 추구하는 자치와 자율은 사회적 개인의 것이다. 나는 근대의 대의정치를 직접정치로 전환시키는 근본적인(radical)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자율적인 개인을 만드는 과제가 자율적이고 강한 사회를 건설하는 과정과 무관하지 않다고 전제하면서, 나는 선거보다 추첨제도가, 그리고 집단적인 힘을 생성하는 코뮨(commune)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 이유는 자유민주주의가 개인을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작은 인간’으로 만들며 그들이 직접행동에 나서고자 하는 능동성을 갉아먹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수동성의 중심에 바로 비폭력(비폭력은 ‘비폭력주의’와 다르다. 비폭력주의는 폭력적인 수단을 쓰지 않는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자치와 자립이라는 의미도 가지기 때문이다)과 대의제도가 자리를 잡고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직접행동의 ‘논리’만이 아니라 직접행동의 ‘상상력’이 필요하다. 현실의 부조리에 맞서는 ‘저항의 정치’가 필요하지만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구성의 정치’가 더 절실하다. 그러기 위해 직접행동은 현실을 근본적으로 재해석하고 새로운 틀을 짜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선거라는 대의민주주의의 방식이 아니라면 어떤 것이 가능할까? 이미 제비뽑기를 비롯한 추첨제도의 민주성은 지속적으로 강조되어 왔다. “추첨과 패각추방은 뛰어난 한 인간이 오랫동안 권력을 장악하는 걸 구조적으로 막음으로써 대중의 정치개입을 자극했을 뿐 아니라 (더 중요한 점으로) 사람들이 끊임없이 자신을 개발하고 탁월함을 추구하도록 만들었다. 즉 이런 제도적인 장치들은 남과 다르고 남보다 뛰어나려는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해서 개인이 강함과 위대함을 기르고 드러내도록 했다.”

그리고 바버는 일상의 정치를 재구성하기 위한 방안으로 다양한 형태의 민주주의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시민정신의 재활성화를 위한 강한 민주주의적 프로그램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1. 천 명에서 5천 명의 시민들로 구성되는 <이웃회합들>(neighborhood assemblies)의 전국체계­처음에는 토의기능만을 가지나 나중에는 지역의 입법능력도 가질 것이다, 2. 새로운 원거리 통신기술의 시민이용을 관리․감독하고 국민투표적 이슈들에 관한 논쟁과 토론을 감독하는 전국적 <시민통신회사>, 3. 정보획득기회를 균등하게 하고 모든 시민들에 대한 충분한 시민교육을 촉진하기 위한 <시민비디오텍스 서비스>(a civic videotex service)와 <시민교육우편법>(civic education postal act), 4. 지방의 시민참여에 의한 <비범죄화>(decrimination)와 <비공식적인 비전문가 재판>(informal lay justice)의 실험, 5. 다선택 포맷과 두 단계의 투표계획을 갖춘, 의회입법에 대한 대중발안과 국민투표를 허용하는 전국적인 <국민발안과 국민투표과정>(initiative and referendum process), 6. 시민통신회사의 감독하에, 처음에는 교육적 여론조사적 목적만을 위한 <전자통신을 이용한 투표>(electronic balloting)의 실험, 7. <추첨>(lottery)­급료를 인센티브로 제공­에 의해 선택적으로 지방공직을 선거, 8. 선정된 학교, 공공주택공급 프로젝트, 교통체계 등을 위한 <내적 보증체계>(internal voucher system)의 실험, 9. 모든 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군복무 선택을 포함한 <보편적 시민봉사>(universal citizen service) 프로그램, 10. 공동작업과 공동활동에서의 <지방자원자프로그램>(local volunteer programs)의 공적 지원, 11. 경제적 대안을 위한 모델로서 공적인 제도를 갖춘 <작업장 민주주의>(workplace democracy) 실험에 대한 공적 지원, 12. 새로운 <시민적 공공장소의 건축>(architecture of civic and public space)(Barber, 1992: 444~445) 우리는 일상의 정치공간을 재구성하기 위한 어떤 전략을 가지고 있는가? 그런 전략 없이 직접행동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5. 직접행동 전략의 필요성


직접행동의 시대에 정당과 사회운동은 어떤 역할을 맡게 될 것인가? 촛불집회가 계속되고 있지만 이명박 정부는 재협상 요구를 수용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 상황은 어떻게 해결될 수 있을까? 그와 관련해 국민들의 목소리를 지속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정당체제의 제도화가 요구되고 있다. 최장집은 “민주주의 운영의 핵심 메커니즘이라 할 정당과 정당 체제가 제대로 제도화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를 지적하며 “민주주의에서 정당이 필수적인 까닭은 결정 과정에서 숱한 갈등과 요구를 내부화하고, 조정을 통해 타협가능한 대안을 만들기 때문”(최장집)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김호기 역시 “정당정치와 탈현대적 정치를 어떻게 생산적으로 공존, 결합시킬 것인가는 현재 우리 정치에 부여된 최대의 과제”(김호기)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정당체제의 제도화를 이룰 방법은 여전히 제시되지 않고 있다. 제대로 된 야당이나 정당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그 방법에 관한 논의 없이 필요성만 주장하는 게 한국사회의 민주화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그런 정당이 등장할 때까지 행동의 수위를 조절하며 기다려야 할까? “기존 정당이 시민들의 역동성을 못 담아낸 것에 대한 실망인가 아니면 정당이라는 시스템에 대한 실망인가?(권미혁)라는 물음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한국 정당체계가 정치 보스를 따르는 인물정당이었고, 정책정당으로의 전환이 시급하다는 주장은 많았다. 하지만 정당이 정책을 생산하는 기능을 제대로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예를 들어, 지구당의 역할이 중요하다. 지구당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근간이며 하의상달의 통로 및 정치참여의 기본단위이기 때문이다. 지구당을 폐지한 것은 이익집단이나 사회적 결사가 발전하지 못한 상황에서 그나마 존재하는 사회적 여론수렴기능을 폐지하는 것과 다름없다(박찬표, 2003). 지구당이 아래로부터의 의사수렴을 위한 기본토대가 되어야 한다는 점은 말할 것도 없고 지구당 위원장도 선출되어야 한다. 그리고 지방선거 후보자를 공천할 때 지역의 사회단체에게 추천이나 지명을 받도록 하는 방법은 정당과 지역시민사회단체를 연계시키는 중요한 고리가 될 수 있다.10) 또한 공천과정에서 후보자들이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토론회를 열어야 한다는 점을 명시해야 한다. 그런 토론과 논쟁과정에서 공천과정의 민주성이 자연스럽게 담보되고 정책도 개발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정당 내부의 제도들은 정당의 이익대표기능과 시민사회의 활성화를 접목시킬 수 있는 근거들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 당원만이 아니라 지역주민들의 참여를 보장할 경우 자연스럽게 시민교육의 효과도 낳을 수 있고 정치참여를 자극할 수도 있다.

이번 촛불집회는 정당만이 아니라 사회운동단체에도 새로운 과제를 던졌다. 촛불집회에서 드러났듯이 단체나 지식인의 지원을 거부하는 대중에게 사회운동이 어떤 역할을 맡아야 할 것인가? 대중이 운동의 지도를 거부할 경우, 조직화되지 않는 대중, 조직화를 거부하는 대중들 사이에서 사회운동은 어떤 역할에 집중해야 할까? 더구나 정당이 정책적인 기능을 담당하고 대중이 스스로 변화의 동력이라면, 사회운동은 무슨 역할을 해야 하나?

안진걸은 “과거 운동권 단체들이 중앙집중식으로 집회를 진행한 것을 대성찰해야 한다는 지적은 맞지만 지금 국민대책위가 제공하는 최소한의 서비스가 참여시민들의 ‘난장’과 ‘자율’을 제약한다고 보지는 않는다”고 얘기하지만 시민들이 단체에 보이는 반감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2002년 촛불시위에서 ‘깃발논쟁’이 벌어졌다. 그런데 지금은 그 논쟁의 수위가 조금 더 심각해졌다. 깃발논쟁이 집회방식에 대한 문제제기였다면, 지금의 ‘프락치 논쟁’은 상호간의 신뢰가 사라지고 있음을 말한다. 6월 10일 집회 때 벌어진 스티로폼 논쟁 역시 그런 불신을 반영한다. 이 논쟁이 과거보다 심각한 것은 그것이 상호간의 신뢰를 제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회운동단체와 대중과의 소통이 심각한 수준으로 단절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중은 사회운동단체를 정치적, 성과중심적, 폭력적이라고 파악하고, 단체는 대중이 비정치적, 무대책/무목적, 비폭력에 집착한다고 생각한다. 정치권이 만든 알리바이에 걸려들어 오해하고 있는 부분도 많다. 말 잘하면 빨갱이였다면, 이제는 말 잘하면 프락치나 운동권으로 분류된다. 따라서 단체와 대중간 소통의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

이를 위해 일단 2002년에 대한 평가로 돌아가 보자. “촛불시위는 탈중심 비제도화된 대중 권력에 기초한 개방적 교통과 토론의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지만 촛불시위에서 네티즌들이 보여주었던 ‘시위의 순수성’에 대한 과도한 집착 내지 ‘정치적인 것에 대한 경계’, 반미 의제에 대한 거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에 의한 분할의 수용 등은 스스로를 제도적인 틀 내로 제한하는 ‘역설’을 낳기도 했다”(김원, 2005) 지금의 촛불집회는 이 역설에서 얼마나 벗어났을까?

그리고 인터넷의 소통은 속도가 빠른만큼 감정적이다. 특히 분노의 전파속도가 빠르다. “시민들의 반응도를 향상시키는 인터넷 효과는 사회연결망과 감정 변수의 결합으로 강화될 수 있”는데, “인터넷에서 개인의 감정은 오프라인과 달리, 텍스트로 저장되고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지는 ‘가시성’을 띠게 되며, 널리 유통될 수 있는 ‘정보’가 되기 때문이다. 분노와 같은 감정은 온라인 네트워크를 통해 밀도 있게 표출될 경우 다른 사람의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자원이 될 수 있다”(김경미, 2005) 감정과 정서는 정치를 움직이는 힘이고 소통의 한 가지 방식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소통이 이루어질 수 없다.

사실상 사회단체에서 활동한 경험과 직접행동, 생활정치의 능력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직접행동의 관점에서 보면 실제로 대중이 생활정치적 능력을 더 많이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생활정치의 장에서 사회운동은 대중과 소통할 뿐 아니라 때로는 대중에게 학습을 받을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런 필요성을 인정할 단체가 몇이나 될까? 여전히 대부분의 단체는 대중에게 계몽의 관점을 가지고 접근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리고 정치의 세계는 진리의 세계가 아니다. 그렇기에 갈등을 통한 충돌이 필요하다. 소통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많이 드러내는 편견은 갈등을 회피해야 할 것으로 본다는 점이다. 하지만 “대중은 훈련과 학습을 통해 무관심과 수동성의 껍질을 깨고 새로운 정치의 주체로 거듭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훈련과 학습에는 ‘반드시’ 갈등이 필요하다. 직접민주주의는 암묵적인 동의나 허구적인 만장일치가 아니라 ‘능동적인 반대’를 통해서만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목소리만이 기존의 선입견과 틀을 깨고 새로운 내용을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합의’나 ‘순수함’보다 ‘차이’와 ‘혼성’을 강조해야 한다.”

비폭력과 관련된 논쟁도 마찬가지이다. 카터는 비폭력을 얘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직접행동과 아나키즘을 분리시키지만, 아나키스트들은 직접행동의 비폭력성을 체제의 폭력성 또는 정치폭력과 구분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미국의 아나키스트 엠마 골드만은 이렇게 얘기했다. “자본과 정부의 전반적인 폭력과 비교할 때 저항세력이 행사하는 폭력이라는 정치적 행위는 넓은 바다에 떨어진 물 한 방울에 불과하다. 폭력적 저항이, 이 사회에 감내할 수 없는 불평등 요소들이 존재하고 이로 인한 갈등이 심각할 지경에 이르렀다는 가장 강력한 반증임을 반박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골드만, 2001: 99) 체제의 체계적이고 기계적이며 압도적인 폭력을 얘기하지 않고 짓눌린 자들의 대응하는 폭력만을 얘기하는 것 자체가 이미 현실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아직도 공권력의 폭력적인 진압으로 국민이 목숨을 잃기도 하는 한국사회에서 우리는 그런 체제의 폭력에 대해 너무 둔감한 게 아닐까?

민주주의는 저항의 과정에서만 생명력을 누릴 수 있다. 그래서 대중의 직접행동이 있을 때에만 민주주의는 살아있을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 직접행동은 ‘거리의 정치’만이 아니라 ‘일상의 정치’로 파고들 때에만 변화의 잠재력을 구성하고 실제 변화를 이끌 수 있다.
참고한 글


골드만, 엠마. 김시완 옮김. 2001. 󰡔저주받은 아나키즘󰡕. 우물이있는집.
김경미. 2005. “인터넷이 집합행동 참여에 미치는 영향: ‘2002 여중생 추모 촛불집회’를 중심으로”. 『한국사회학』.
김왕배. 2000. 『도시, 공간, 생활세계』. 한울.
김원. 2005. “사회운동의 새로운 구성방식에 대한 연구: 2002년 촛불시위를 중심으로”. 『담론201』.
라인골드, 하워드. 이운경 옮김. 2003. 『참여군중』. 황금가지.
리처드 스위프트 지음. 서복경 옮김. 2004. 『민주주의』. 고양: 이소출판사.
무페, 샹탈. 이행 옮김. 2006. 『민주주의의 역설』. 인간사랑.
벤자민 바아버. 박재주 옮김. 1992. 『강한 민주주의: 새 시대를 위한 정치참여』. 인간사랑.
박찬표. 2003. “한국 ‘정당민주화론’의 반성적 성찰: ‘정당민주화’인가 ‘탈정당’인가”, 『사회과학연구』11집.
스프레트낙․카프라. 강석찬 옮김. 1990. 『녹색정치』. 서울: 정신세계사.
조현연. 2003. “‘자유민주주의’ 지배담론의 역사적 궤적과 지배 효과: ‘반공주의적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로”. 조희연 편. 『한국의 정치사회적 지배담론과 민주주의 동학』. 함께읽는 책.
카터, 에이프릴. 2007. 『직접행동』. 교양인.
하승우. 2004. 『참여를 넘어서는 직접행동』. 한양대출판부.
하승우. 2008. “청년의 역사, 비관과 단절을 넘어”. 이동수 엮음. 『미래와의 소통』. 이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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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00년 정조가 사망한 이래 이 나라는 본질적으로 씨알과 국가기구 사이의 잠재적 전쟁상태…이땅에서 국가는 때마다 다른 가면을 쓰고 우리를 지배하는 ‘그들’의 통치기구였을 뿐이다. 권력을 사적으로 전유한 ‘그들’에게 씨알들은 국가 공동체의 동등한 구성원이 아니라 단지 착취와 수탈의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김상봉)
2) 직접행동의 개념과 문제의식에 관한 기본틀은 2004년에 펴낸 『참여를 넘어서는 직접행동』(한양대출판부)에 바탕을 뒀다. 출처가 없는 인용문은 책의 내용이다.
3) “‘뉴타운’과 ‘특목고’라는 물질주의적 욕망과 대비되는 ‘먹거리 안전’이라는 탈물질주의적 가치를 추구한다”(김호기)
4) 예를 들어, “공포를 ‘상실’한 채 신경망과 같은 네트워크로 연결돼 유연하게 움직이는 대중, 특정한 지도부가 없고 모두 ‘지도자’가 되어버린 대중, 이질적인 요소들로 구성되지만 그 이질성이 충돌하며 방해하는 게 아니라 서로 결합하며 예측 불가능한 움직임을 창안하는 대중, 그리고 가볍고 즐겁게 싸우는 대중, 이 새로운 양상의 대중이, 박정희를 모델로 하고 있으며 그 시대의 감각으로 기업 운영하듯 작동하는 정부를 겨냥해 싸우고 있는 것”(이진경)이란 주장이다.
5) “남의 얘기가 아니라 내 식탁의 문제”(박수진/한겨레21기자), “취직, 등록금, 먹거리 문제라는 생활정치의 영역에서 시작하는 ‘솔직한’ 운동”(최갑수), “과거 사회운동의 주요 이슈가 민주화 노사관계 등 거시적 제도에 있었다면, 이번 이슈는 먹거리 안전에 연관된 미시적 일상생활이다. 제도정치에 맞서는 생활정치의 등장을 우리 사회는 지금 지켜보고 있다.”(김호기), “자신의 생활과 가장 밀접한 이해관계가 침해당한 것에 대한 분노…광우병 소고기, 0교시 자율학습, 물가와 기름값 인상 등 일상의 이해관계가 사회의제의 중심이 되는 것”(권미혁/여성민우회)
6)그런 점에서 라인골드의 지적은 시사적이다. “첫째, 도구를 과제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PC, 인터넷, 무선 이동통신장비들을 통해 가능해진 출판과 통신과 조직의 민주화는 풀뿌리 행동주의를 위한 중요한 도구입니다. 그러나 민주주의에 실질적인 힘을 부여하는 것은 투표가 이루어지고, 정치적 결정이 내려지며, 전쟁과 시위가 벌어지는 현실 세계 사람들의 지식과 의향과 행동들입니다.…둘째, 모든 영리한 군중이 반드시 현명한 군중은 아니라는 점을 양지하시기 바랍니다.…만약 충분한 수의 사람들이 당일의 중요한 사안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 사안들과 그들에 의해 영향받는 정부 정책들에 관해 토론하지 못한다면, 모든 지도자들이 공정한 선거를 통해 선출되었다 하더라도 민주주의는 공허한 것, 쉽게 조작될 수 있는 것이 될 것입니다. 신중함은 지도자들만의 덕목이 아니라 국민들 모두의 덕목이기도 합니다. 셋째, 공공 영역(민주주의의 기초를 제공하는 시민들 간의 자유롭고 공개된 담론의 장)을 종종 생산적인 정치적 토론을 잠식하는 감정적이고, 무지하고, 구호가 난무하는 온라인 상의 전투와 구분하는 것은 예의와 이성과 증거입니다.…넷째, 인터넷의 자율성을 보호하고, 혁신의 공유지를 사유화하려는 시도에 대해 저항하십시오.…기득권자들의 힘을 결코 과소평가하지 말기 바랍니다(라인골드, 2003: 8~9).
7)“중앙집권적인 국가권력과 자본의 집중과 축적은 자유로운 개인의 사회계약에 따른 것이라는 허구적인 이론으로 포장되었다. ‘동의’와 ‘선택’라는 미명(美名)하에 억압과 착취의 현실은 은폐되어 왔고, 그 현실에서는 타자와의 연대마저도 개인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명목으로 금지되어 왔다. 이런 허구에 반대하며 아나키스트는 사회적 개인을 주장했다. 사회적 개인은 공동체와 관계를 맺으며 성장하고 자아를 실현해 간다〔아나키즘 내의 흐름에는 개인의 절대적인 자유를 주장하는 슈티르너(Stirner)나 터커(Benjamin Tucker)같은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들도 있다〕. 따라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그가 어떤 사회에 살고 있는가를 통해 드러난다.”(하승우, 2004)
8) 주체위치들 중 어느 하나도 분리된 위치로서 자신을 궁극적으로 공고화할 수 없다고 한다면, 불가능한 총체성의 지평을 재도입하는 주체위치들간의 중층결정의 게임이 존재하게 된다. 헤게모니적 접합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 게임이다(라클라우․무페 1990: 151).
9) “첫째, 한국 사회에서 자유민주주의는 역사적, 정치적 실제 상황과는 무관하게 형식적이나마 ‘최소한 공개적으로는 범할 수 없는 정치적 신성성을 대표하는’ 최상위의 담론으로 국민적으로 수용되었으며, 반공주의, 발전주의, 국가주의 등과 함께 국가의 중핵적인 지배담론의 구성요소였다.…둘째, 그 과정에서 ‘정상적’인 자유민주주의 지배담론은, 한편으로 그 자체로는 효과적인 대중적 침투를 통한 동원적 기능을 전혀 수행하지 못한 채 반공주의와 동일시되거나 또는 반공주의를 보조하는 기능적 담론으로서 그 의미가 제한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 반대의 저항담론적 공간을 제공해 왔다는 것이다.…셋째, 이러한 사실은 한국에서 자유민주주의를 논의하고 실천할 만한 사회세력이 부재했다는 것을 반증해준다. 즉, 서구와는 달리 한국의 부르주아계급은 냉전분단반공체제와 국가주의적 발전동원체제의 수혜자로서, 국가권력의 보호와 지원 속에서 계급적 기득권을 향유해 온 것이다.…넷째, 민주주의 이행의 시대에 들어와 ‘반공주의적 자유민주주의’ 지배담론의 사회적 영향력이 쇠락하는 가운데, 자유민주주의 담론이 국가적 차원의 지배담론으로서 명실상부한 지위를 차지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조현연, 2003: 356~357)
10) 독일 녹색당은 시의회, 군의회, 주의회, 그리고 연방의회에서 여러 시민운동 단체의 목소리가 되는 것이며, 또한 그러한 기구들로부터 여러 민중운동 단체에게 특별한 정보들을 제공해 주는 것을 자신들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로 여기고 있다. 녹색당에서 선거의 후보자가 되려는 사람은 우선 지방집단에 대해 자신이 보증받을 만한가 하는 점을 묻게 된다. 지방집단의 보증을 받은 후보자는 그 다음 주 조직에 자신의 이력서와 정치성명서를 제출하게 되는데, 그것은 모든 당원들에게 배포된다. 마지막으로 후보자들은 주말에 열리는 주 전체의 당대회에 참석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견해와 의회에 있어서 자신들의 우선 과제가 무엇이 될 것인가를 피력한 뒤 일반당원들로부터 질문을 받게 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녹색당의 일부 지부들은 시민운동단체의 대표들과 같은 비당원들이 녹색당의 결정 사항들에 대해 표결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지부들은 투표권을 주지 않더라도 비당원들이 토론에 참여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스프레트낙․카프라,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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