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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돕헤드 2003-04-13 16:30:48, Hit : 1282
Subject   [펌] 현대 자본주의와 그 대안으로서 생태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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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자본주의와 그 대안으로서 생태마을

강 수 돌(고려대 국제정보경영학부 교수)



1. 자본주의의 효율성과 파괴성



14세기부터 약 400년간의 준비과정을 거쳐 18세기부터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한 자본주의는 개별 생산자와 자본가의 능력(경쟁력)을 바탕으로 생존을 결정하는 방식으로 경제와 사회를 운용하는 시스템이다. 18세기에 아담 스미스가 고전적 자유주의를 부르짖었을 때, 공정한 경쟁과 시장 원리는 자원의 효율적 분배는 물론 개인의 행복과 사회적 부의 확대를 안겨다 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곧 공정 경쟁은 독과점으로 변형되었고 자원의 효율적 분배가 아니라 자원의 낭비와 파괴가 진행되었다. 독점의 확대와 제국주의 팽창, 공황과 빈부 격차 심화 등이 그 증거이다. 제국주의 세력 사이의 전쟁인 세계대전은 사회주의 혁명을 추동하였고, 동시에 수정자본주의, 복지자본주의도 반사적으로 추동하였다. 약 70년간의 체제경쟁이 시장자본주의의 승리로 끝난 90년대 이후 세계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통해 재편되고 있다. 국가의 복지부문이나 노동부문에의 개입은 금기시되고 세계자본에게 국경을 무한 개방해야 하며 공공부문의 사유화가 장려되고 자본에 의한 노동의 유연한 활용이 미덕으로 칭송되는 시기가 온 것이다. 황금만능주의와 편리주의가 판치는 가운데, 갈수록 삶의 질은 팍팍해지고 생존경쟁이 치열해지며, 삶의 토대인 흙과 물과 공기는 탁해진다. 바로 여기서 자본주의적인 삶의 근본 원리를 짚어보면 다음과 같다.
20년 가까이 오랫동안의 학교생활을 통해 양성된 노동력 상품은 노동시장에서 화폐(‘자본’)와 교환되어 생산과정 속으로 투입되고 관리를 받으며 노동을 수행하게 된다. 다른 한편 임금을 받은 노동자는 생산과정에서 나온 생산물의 일부를 생활수단의 형태로 일반 시장에서 구입하여 소비함으로써 생활을 해 나가고, 그 생활과정에서 또다시 자신은 물론 다음 세대의 노동력까지도 만들어낸다. 돈 놓고 돈 먹는 세상이 가능하려면 노동력 팔고 노동력 만드는 생활이 지속되어야 한다. 말 잘 듣고 일 잘하는 노동력을 기르는 과정이 학교생활이며, 그 이후 취업을 하게 되면 자연과 인간 모두를 파괴시키면서 ‘생산성’ 향상을 위해 매진하다가 생명력을 소진하게 된다. 재수없으면 정리해고의 형태로 중간에 폐기처분당하게 된다.
원래 경제는 ‘먹고사는 것’을 뜻하였다. 따라서 과연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를 연구하는 것이 중요한데, 지배적인 학문은 다음의 기본적인 가정에서 출발하였다. 그것은 ‘자원은 유한하되 인간의 욕구는 무한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한된 자원으로 욕구 충족을 시키자니 ‘효율성’(efficiency) 개념이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효율성이란 한마디로, 투입량 대비 산출량의 비율을 말한다. 동일한 투입량이라면 산출량이 늘어나야 효율이 향상되는 것이고, 또 동일한 산출량이라면 투입량이 줄어들어야 효율이 오르는 것이다. 그리고 투입이 줄면서도 동시에 산출이 늘면 효율은 가장 크게 올라갈 것이다. 이러한 효율성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지표가 바로 ‘생산성’(productivity)이다. 만일 이 정도 선에서 우리 삶의 문제가 순조로이 해결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그러하다. 그러나 문제는 ‘제한된 자원의 효율적 분배’를 위해 시장(market)과 경쟁(competition)이 우리의 모든 삶의 과정을 ‘주도’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크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7가지 분리 현상’이 강화되어, 마침내 우리가 경험하는 사회-생태적 위기가 도래한 것이다. 첫째, 봉건시대의 신분적 예속과 공동체적 관계로부터 개인들이 분리되어 나온다. 둘째, 예전의 농업 사회에서 통일되어 있던 생산수단과 인간 노동력이 분리되었다. 셋째, 기존의 노동 과정에서 통일되어 있던 계획과 실행의 기능이 분리된다. 넷째, 통일되어 있던 삶터와 일터가 분리되고 도시와 농촌의 분리, 생활시간과 노동시간의 분리도 강화된다. 다섯째, 자연과 인간의 분리, 인간과 인간의 분리도 가속화된다. 여섯째, 생산자와 소비자가 분리된다. 일곱째, 인간 자신의 내면 세계와 외면 세계가 분리된다.
특히 자본주의 시장 경쟁에서는 생산성이 높아야 그 상품이 ‘경쟁력’을 가지게 되고 경쟁력이 있어야지만 그 상품에 투입된 노동이나 자원이 비로소 사회적 인정을 받게 되어 있다. 모든 것이 경쟁력을 중심으로 판정되고 인간의 생존 여부도 시장 경쟁력에 의해 결정되는 사회가 도래한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과 같은 범지구적 단일 시장의 시대, 즉 세계화 시대가 도래하면서 더욱 더 우리 피부에 선명하게 느껴진다.



2. 지속가능한 축적이 아닌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하여



현재 우리가 서 있는 위치를 이렇게 파악한다면,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마냥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 몸뚱이를 내맡긴 채 그냥 피난처만 찾아 헤맬 것인가, 아니면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잘못된 구조를 파악하고 그 ‘구조’는 물론, 그를 지탱하고있는 우리 자신의 ‘행위’ 모두를 송두리째 바꾸려고 발벗고 나설 것인가? 왜 이런 어리석은 질문을 던져야 하는가?
가장 먼저 필요한 일은, 소용돌이 속에서 피난처만 찾으려는 우리들 대부분의 행위는 단지 그러한 소용돌이의 강도를 더 강화할 뿐임을 지혜롭게 꿰뚫어보는 일이다. 솔직히 깨 놓고 말해보자. 현재의 경제 원리는 ‘너 죽고 나 살자’의 원리가 아닌가. 우리 기업의 경쟁력이 높아져야 다른 기업들을 물리치고 시장점유율을 높여서 돈을 많이 벌게 되어 결국 노동자의 임금과 복지, 승진 기회 따위가 좋아지는 것이다. 우리 회사가 이겨서 웃고 있으면 저쪽 회사는 져서 울고 있다. 그러나 노동자들끼리 피비린내 나는 경제 전쟁(경쟁)을 수행하는 사이에, 자본은 무대의 뒤에서 고급 호텔에서 고급포도주를 마시며 ‘환상적인 새 천년’을 이야기하고 있다. 요컨대 경쟁의 소용돌이란 결국 돈벌이의 소용돌이이고 마침내 대부분의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생존 싸움의 소용돌이이다. 이 속에서 경쟁력을 향상시키려는 노력(생산성 향상, 품질 경쟁력 향상, 기술 개발 등 모두가 포함된다)이나 아니면 사회적 안전망을 찾는 노력(각종 사회보험의 확충이나 실업자 대책 등)이나 모두, 소용돌이 자체는 그대로 둔 채 ‘자기만 살 피난처’를 찾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 회사가 살아야 나도 산다”는 말을 믿고 청춘을 바치며 일하다가 진짜배기 자기 삶은 하나도 찾지 못하고 오로지 ‘밥 세끼 먹고살기’에 인생 전부를 바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라가 잘 되어야 나도 잘 된다”라는 말만 믿고 오로지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일하다가 생명 자체를 잃고 만 수많은 군인들과 산업전사들을 생각해보자. 그리고 ‘대망의 80년대’니 ‘대망의 90년대’니 하면서 ‘선진국’ 환상에 젖어 더 이상 졸라매기도 어려운 허리띠를 자꾸만 졸라매다가 드디어 97년 말에 ‘대(크게) 망했던’ 사실을 상기시켜 보자. 노동자가 휴전선을 넘어가면 ‘국가보안법’ 위반이 되지만 정주영 같은 자본가가 휴전선을 넘어가면 ‘세계적 이벤트’가 되고 ‘경제협력 강화’가 되는 유별난 현실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 외자를 유치하고 고용을 창출한다는 명분 아래 노동권을 억압하고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강화하며 남녀차별, 학력차별, 외모차별의 구조를 확대재생산하면서 돈벌이 사업의 조건을 개선시켜 주는 일이 얼마나 ‘유치한’ 일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굳이 소득불균등이니 부의 편중화니 하는 수치를 일일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더 이상 저들이 말하는 경쟁력 강화 패러다임이 우리 사회의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행복과 평안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님을 이제라도 간파하자. 쉽게 말해, 지금까지의 경제 방식이 대부분의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데 성공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길바닥으로 내모는 데 성공했다고 솔직히 인정하자. 더 이상 믿지 말자. 경쟁의 소용돌이 자체를 거부하고, 일단 마음부터라도 빠져 나오는 것이 필요함을 확인하자. 동시에 ‘훌륭한 지도자(엘리뜨)’ 패러다임도 ‘신사적인 독재주의’와 크게 다른 바 없음을 솔직히 인정하자.
다음으로 필요한 일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대안’의 창조이다. 경쟁과 분열의 소용돌이가 아니라, 아래로부터 연대하고 협동하면서 더불어 건강하게 살아가는 새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 새 세상의 구체적 모습이 어떠할 것인지는 미리 설정하기 어렵다(똑똑한 누군가가 그 작업을 하는 것 자체가 새로운 지배의 단초가 된다). 현재의 잘못된 것들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나가는 가운데 철저한 민주적 토론과 창조적 지혜를 통해 새롭게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새 세상을 위해서라도 현재 우리 속에 들어와 있는 각종 분열의 경계선을 과감히 뛰어넘어, 분열을 조장하고 확대하는 기득권 세력들에 맞서 싸워야 한다. 바로 이런 점에서 ‘연대’란 진정한 대안을 꿈꾸는 우리들에게 수단이자 목적이다.
그렇다면 지속가능한 대안 사회란 어떤 것일까? 새로운 대안 사회에 대한 밑그림 그리기를 시도하되, 민주적인 토론 속에서 모든 일하는 사람들이 공유하도록 해야 한다. 대안 사회 운동의 지향점은 누가 뭐래도 ‘인간답게 사는 것’이다. 인간답게 산다는 게 무엇인가. 그것은 건강한 먹거리를 먹고 건강한 집에서 이웃과 더불어 살며 남녀노소 등 아무런 차별 없이 여유와 문화를 즐기고 창조하면서 사는 것이다. 지금과 같이 스트레스 받으며 경쟁력 강화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며 ‘너 죽고 나 살자’ 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20%만 잘 살고 80%는 불안해지는 그런 것이 아니다. 또 ‘똑똑하고 잘난’ 지배 엘리뜨들이 하자는 식으로만 끌려가는 삶도 아니다. 온갖 제도와 규칙들은 공동체적인 삶의 질 차원에서 더 좋은 것이 있다면 언제든지 의논해서 바꿀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되려면 살림살이의 단위는 가능한 한 작아야 하며, 공동체 구성원들이 삶의 질 향상에 필요한 자율 능력을 기를 수 있어야 한다. 지배관계의 재생산을 위한 기능적 지식이 아니라, 삶의 기술과 삶의 지혜의 연마가 더욱 중요하게 될 것이다.
(1) 가장 원칙적으로, 경쟁(시장) 패러다임도, 명령(국가) 패러다임도 아닌 진정한 제3의 길, 즉 자율(자치) 패러다임에 기초한 새 사회를 원해야 한다. 이 세상의 서로 대결하는 200개 국가들이, ‘200만 개’ 이상의 연대하고 협동하는 자율적 생태공동체로 재구성되는 것이 하나의 밑그림일 수 있다.
(2) 자율자치의 패러다임을 실현하기 위한 정치경제, 사회문화, 교육의료 부문 등을 재구성해야 한다. 중앙 정치가 꼭 필요하다면, 더 이상 지배의 정치가 아니라 심부름꾼의 정치로, 통제의 정치가 아니라 조정의 정치로 변화되어야 하고, 대부분의 사회적 의사결정은 지역별 공동체가 자율적으로 행해야 한다. 200만 개 이상의 공동체들이 서로 다른 색깔의 정치경제, 사회문화, 교육의료 체계를 가질 수 있게 된다면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최소한 그러한 ‘방향’으로 가야 한다.
(3) 바로 그런 점에서 노동운동과 여성운동, 생명운동의 3자 연대가 시급하다. ‘생산성 향상’의 파괴적 성격에 대한 성찰과 더불어 노동운동 내부의 가부장주의와 반생태주의를 극복하려는 프로그램을 추진해야 하며, 이윤(자본)논리 반대 운동과 지배관계 반대운동을 여성운동이나 생명운동과 공동 추진해야 한다. 요컨대, 시장주의, 관료주의, 국가주의, 위계주의, 가부장주의, 기술만능주의, 인간중심주의, 엘리뜨주의, 생산력주의 따위를 근본적으로 배격해야 한다.




3. 생태마을의 방향성 잡기



이런 맥락에서, 나름대로 정리한 대안적 생태마을 또는 자율자치 공동체의 기본 방향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 삶의 질(quality of life)을 높이는 지역 공동체: 이미 많은 자율공동체들이 이 세상에 다채롭게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 가장 자본주의적인 나라인 미국이나 영국에도 애미쉬 공동체나 여러 생태공동체들이 있고, 유럽 대륙에도 곳곳에 여러 형태의 공동체들이 있다. 일본이나 한국에는 야마기시 실현지가 있고, 인도의 티벳 고원에는 라다크 공동체가 있으며, 스리랑카에는 사르보다야 슈라마다나 운동이 있고, 한국엔 한살림 공동체나 풀무학교, 실험학교 공동체 운동도 있다. 더 중요한 것은, 남들이 하고 있기에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나부터라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하는 절박성이다. 이 모든 공동체들의 성공과 실패를 모두 배우면서 동시에, 현재의 지방자치제를 내부로부터 혁신하여 진정한 주민 자치를 이루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와 만물이, 나와 이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라다크 공동체의 ‘확장된 자아’라는 개념은 온 마을 식구가 한 식구라는 개념으로, ‘우리가 남이가’라고 항상 되묻는 것이다. 그래야만 보살핌과 나눔이 가능해지고 ‘돈벌이 경제’가 아니라 ‘선물의 경제’가 가능해진다. 이것이 가능해야지만 삶의 질(건강, 삶의 여유, 인격 존엄성, 공동체성, 생태적 감수성)이 향상된다.
둘째, 풀뿌리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자율 공동체: 그래서 다음으로 확인할 것은, 이 공동체 내부의 사람들이 삶의 자율성(life autonomy)을 지니는 한, ‘삶의 행복’을 누리면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자본에 의해서건 아니면 내부의 선택에 의해서건 공동체 구성원들에 의한 삶의 자율성이 깨지는 순간, 이 모든 운동은 생명력을 잃게 된다는 사실도 인식해야 한다. 따라서 성공적인 공동체가 있는가 하면, 실패하는 공동체도 있다. 우리는 이 모든 공동체들의 성공과 실패를 모두 겸손하게 연대하는 자세로 배울 필요가 있다. 동시에, 우리 내부로 와서 현재의 지방자치제를 보다 자세히 들여다보자. 현재의 지방자치제는 크게 보아 두 가지의 근본 문제를 안고 있다. 하나는, 말이 지방분권화이지, 지역 주민에 의한 자치가 아니라 중앙정치권의 하부 단위화, 또는 기껏해야 중앙정치계의 축소판 정도로 전락하고 말았다. 몇몇 거물급 인물 중심주의, 금권정치(돈 많은 이가 권력까지 쥐는 정치), 정경유착, 관료주의, 위로부터의 정치 등이 그 특징들이다. 중앙 정치권력을 지역 수준에서도 철저히 재생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지방자치제로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둘째는, 이 지방자치제가 한국에서 자본주의 원리를 전국 방방곡곡, 사람들의 마음 구석구석까지 확대, 심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 두 가지 과정은 사실상 하나의 과정이다. 그것은 결국 사람들의 삶에 대한 자율성을 하나씩 앗아간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지방자치제를 내부로부터 혁신하여 진정한 주민 자치, 아래로부터의 정치, 자율 정치를 이루어야 한다. 나아가 이를 위해서라도 바람직하지 못하게 팽창하고 있는 대도시와 공업 단지를 해체하거나 분산시켜야 한다. 바로 여기서도 ‘삶의 질’ 중심의 구조조정이 필요한 것이다.
셋째, 실업의 공포와 자본의 횡포로부터 자유로운 공동체: 노동 생산성과 필요 물자 등을 잘 계산하여 모든 사회(공동체) 구성원들이 골고루 ‘일을 나누어’ 가지며, 갈수록 조금씩이라도 여가가 많아지도록, 그리하여 창조적인 여가 생활과 수준 높은 문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가야 한다. 특히 개별 생산 조직들은 관료주의(bureaucracy), 부정부패(corruption), 낭비(waste) 등의 요소를 철저히 척결함으로써 경영 과정을 ‘삶의 질’(quality of life) 차원에서 쇄신해야 한다. 그리고 토지․주거․육아․교육․의료 등에 대한 ‘공개념’을 도입하여, 먹고사는 데 닥치는 많은 삶의 문제들을 공동체적으로 해결하도록 한다. 그 과도기에서의 재원은 예컨대, 평화협정 체결을 통한 군축과 방위비의 대+폭 절약, 모든 부정부패 고리의 척결(예컨대 뇌물, 비자금의 철저한 추적과 압수), 소득세 누진제의 철저한 실시, 탈세와 누세의 포착(예컨대, 모든 영수증에 대한 일정액 보상제 실시), 잘못된 정부지출(예컨대 과잉․중복 투자)의 지혜로운 활용 등이 될 수 있다. 결국에 가서는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화폐(또는 자본)에 대한 의존도’가 거의 없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 일의 내용도 또한 돈벌이를 위한 소외된 일, 무가치한 일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들(남녀노소 불문)의 다양한 욕구 충족과 삶의 질 향상을 위한 보람있는 일, 가치로운 일이 되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아깝지만 뜯어내어 없앨 생산조직(삶의 질 향상에 도움이 안 되는 것)과 새로 만들 생산조직(삶의 질 향상에 꼭 필요한 것)을 분별력 있게 찾아내야 한다. 특히 건강한 먹거리 생산과 관련된 1차 산업이 중심이 되고 고급스런 문화생활과 참교육, 폭넓은 사회활동 등이 가능하도록 도와주는 범위에서 2, 3차 산업이 보완적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먹고사는 데 필요한 것을 가능한 한 ‘자립’하도록 하고 공동체끼리 협동해서 풀어야 할 것은 상부상조하면서 함께 푼다. 나아가 모든 사회적 노동은 종속 노동이 아니라 자율 노동이, 궁극적으로는 (임금) 노동이 아니라 (자유) 활동으로 변해야 한다. 그래서 일하는 과정과 방식도 위에서부터 찍어 내리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들의 소망에 맞추어 나가도록 한다. 나아가 원료나 물품을 만들더라도 생태계를 해치거나 자연의 순환고리로부터 빠져나가게 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순환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순리에 맞게 만들고 써야 하는 것이다. 결국은 생산 방식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생활 방식의 문제이다.
넷째, 자율성과 책임성을 드높이는 자치 공동체: 이러한 내용과 방향성을 가지는 자율공동체들이, 자본이 그어놓은 온갖 종류의 분할의 경계선들을 과감히 넘나들며 범지구적으로 다양하고 풍부하게 건설된다면 모두가 ‘자본의 지배’와 ‘실업의 공포’로부터 해방되어 진정으로 시간주권과 삶의 기쁨을 되찾고 더불어 사는 보람을 느낄 수 있다. 그렇게 되도록 지금부터 하나씩 ‘준비하는 일’이 더욱 신바람 나지 않을까? 자율적인 공동체들이 다양하게 창조된다면 이것은 우리 자신은 물론 우리의 후손들에 대해서도 역사적,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일이 될 것이다. 시장 경쟁력이나 생존 경쟁에 모든 것을 갖다 바치는 왜곡된 삶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자율적이고 책임성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라도 풀뿌리 민주주의에 기초한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어내어야 한다. 이제부터라도 노동운동을 비롯한 모든 시민․사회운동은, 이러한 삶의 자율성 회복을 위해 과연 ‘무엇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에 대해 보다 겸허하게, 보다 근본적으로, 보다 유연하게, 보다 다양하게, 보다 생기 있게, 보다 연대해서 접근해야 할 것 같다. 지역의 참된 일꾼들이 서로 편견 없이 ‘자기조직화’(self-organizing) 사업을 하면서 지역공동체를 참된 자율공동체로 재편하는 일이 매우 절박한 과제로 다가온다. 그러한 노력이 착실히 쌓이고 연대의 전선이 형성되면 자연스럽게 자율공동체끼리도 네트워크(network)를 맺어 더욱 큰 연대와 협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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