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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스코프스키 2008-04-10 01:13:54, Hit :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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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김경서]생태 아나키즘 미술의 가능성 - 개체의 자율성을 공동체로 묶어주는,,,

생태 아나키즘 미술의 가능성 - 개체의 자율성을 공동체로 묶어주는,,,

김경서 - 미술평론가


1 현대 미술, 그 수용에 있어서의 쟁점들

2 현대의 미술은 아나키즘을 필요로 하는가?

3 현대의 미술은 필연적으로 생태미학을 요청한다.

4 생태아나키즘 미술을 위하여




아나키즘은 인간의 개체적 자율성이 어느 무엇으로부터도 침해받을 수 없다는 사고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그 외부적 침해의 가장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권력구조가 곧 국가이다. 근대 시민사회 이후의 국가는 보편적 행복의 산출이라는 유토피아에 의해 개체적 존재의 의미를 합리적인 구조의 틀 안으로 환원시켜 온 것이다.

잘 짜여진 구조가 그만큼 개인의 이익을 충족시켜 줄 것이라는 믿음은 마땅히 강력한 국가 체제를 수립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는 곧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극대화시킴으로써 더욱 타당성을 부여받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하여 수립된 강력한 국가 체제는 사회적 인간이라는 의미 아래, 인간존재 의 의미를 가두는 결과를 초래한다. 즉 어느 한 측면을 중심으로 또다른 필연적 의미를 환원시키는 어쩔 수 없는 이분법적 선택을 강요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양 측면은 어느 쪽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상호적으로 필수불가결한 관계상황에 놓여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요구되는 아나키즘은 단순히 국가의 부정과 전복이라는 종래의 무정부주의적 혁명전략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사회와 개인의 사이에 존재로서의 인간의 가치를 우선적으로 고려한다. 이는 생태아나키즘을 향하여 내딛는 첫 걸음이 될 것이다.

아울러 전체론적 국가주의에 저항하는 아나키즘의 이념은 예술에 있어서는 더욱 더 타당한 공감의 저변을 공유하며 등장한다. 예술이야말로 개체의 자율성 없이는 생산될 수도 존재할 수도 없는 특수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물론 문화·예술은 각 시대마다의 보편성과 패러다임을 형성한다. 그러나 보편은 구축되거나 전제되는 순수공식 같은 것이 아니다. 또한 원인과 결과가 정확히 마주하는 인과율로도 설명될 수 없다. 그것이 과학과 다른 점이다. 도식화된 생산양식이 아니면서도 언제나 생산을 멈추지 않고, 또 항상 감지할 수 없는 변화를 산출해 낸다는 점에서 예술은 그 가치를 소홀히 취급당하지 않아 왔다. 개체의 자율성을 필연적이고 내재적인 작동원리로 삼고 있는 예술은 그러나 인간의 사회적 삶에 직접적인 투사를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예술창작이라는 행위는 단순히 개인적인 주관적 취미에 국한되는 것도 아니며, 사회의 보편적 요구에 즉응하는 것도 아닌 것이 된다.

그것은 개별자와 보편자 사이에 있는 특수성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즉 개체와 전체의 매개자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는 작가 주체와 대상, 또는 내용과 형식이라는 대립적 관계를 넘어서서 자연과 인간의 삶 속으로 체험적이고 직접적인 다가섬이 필요하다는 요청으로서의 생태적 참여미학의 가능성을 제시해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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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대 미술, 그 수용에 있어서의 쟁점들


지난 20여 년 간 우리나라의 미술 현장은 환원주의적 태도를 기반으로 한 모던 미술과 그에 반발하고 나선 민중 미술, 그리고 다시 이를 극복하려는 포스트모던 미술이 물밀 듯 밀려왔다가 다시 밀려가는 각축장처럼 보였다. 자연스런 문화의 교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빠르게 휩쓸고 간 그 자리에는 그야말로 과잉 문화의 쓰레기 더미들만이 쌓일 뿐이다. 마치 TV에서나 볼 수 있는 스타 만들기에 급급한 상품화된 신세대 문화처럼……. 그러나 그렇게 치열했던 공방전도 이제는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소위 다원화와 주체의 해체, 또는 개체의 자율성을 앞세운 포스트모던이라는 미명 아래 뿔뿔이 흩어진 것이다. 제발 그들의 흩어짐이 자발적인 해체이기를 바래 보지만, 안타깝게도 결코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여전히 그 이면에는 국가 권력과 그보다 더욱 강력한 주도적 거대 자본의 힘의 논리가 여전히 작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지방 분권화 움직임과 자유 경쟁, 그리고 문화적 계급의 평준화와 다양한 차이의 인정 등 매혹적인 현대의 담론들은 그러나 실상을 판단할 수 없도록 가려진 유혹일 뿐이다.

원래 서구 모더니즘 태동의 핵심은 합리성, 계몽성, 역사성 그리고 주관성 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자본주의의 발달 및 거대 산업사회의 등에 업혀 출현하였다. 이는 곧 인간 이성의 독립과 세계에 대한 합리적인 역사적 인식의 믿음으로서의 신화였으며, 막스 베버의 '합목적적 합리성'은 아직도 부인할 수 없는 서구 역사 변천의 필연적인 질곡을 거친 후에 나타나는 결과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근대성은 불행하게도 오랜 침묵의 역사의 장막을 스스로의 의지로 걷어내지 못했으며, 마치 폭우에 둑이 무너지듯 밀려 들어와 이성과 역사성은 이미 의미를 가질 수 없는 상황에서 급박하게 수립되지 않으면 안되는 식민지적 근대성일 수밖에 없었다. 문화는 자연발생적으로 성립될 때만이 역사성도 아울러 가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의 역사적 이성을 추스를 틈도 없이 밀려들어오는 서구 문화의 소용돌이 속에 급진적 현대화만을 따라잡고자 했던 우리 문화의 정체성이 오늘날 기반 없는 껍데기 문화를 양산해 내고 있다는 데 있다. 그것은 그래도 무엇인가 믿을 수밖에 없고 또 믿고 싶은 현대적 신화의 한 양상이기도 하다. 문화의 보편성을 감지할 수 없을 때, 그 문화는 계급성·주관성·차별성 등 그 괴리감의 불일치가 증폭될 수밖에 없다. 지적인 고급문화가 곧 첨단의 서구문화와 은연중 동일시되어 왔던 것은 곧 우리 문화의 패러다임의 부재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모더니즘의 아우라는 그리하여 지적으로 우세하고 주관적이며 지극히 자율적인 태도로 인하여 대중과의 괴리를 갖게 하였으며, "예술 자체가 삶으로부터 소외되어 비판할 수 없는 완전한 자율성을 갖게 되면서부터 모더니스트적 변형은 더욱 더 고통스럽게 실감되는 것이다." 또한 "모더니즘의 주관성이 한층 나약할 수밖에 없는 것은 모더니즘이 소수의 문화라고 하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모든 인류가 모더니즘의 충동으로 자기 정체성을 지닐 수 있다는 보장은 설득력은 있지만, 결국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다. 실제로 경험에 걸맞은 교육과 환경을 갖춘 소수의 전수자들을 빼놓고는 모더니즘의 주관성을 배울 수는 없다. 실상 모더니즘의 가장 어려운 임무는 주관성이라는 사상을 대를 이어가며 전달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모더니즘의 언약은 그 주관적인 국면들을 넘어서면, 우리시대에 대해 부끄러울 정도로 부정확한 진단을 내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총체적인 삶의 양태를 담아내지 못하는 예술·문화는 그 진보에도 불구하고 의미 없을 뿐 아니라 지속될 수도 없을 것이다. 오로지 진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들, 지적 우월감 내지는 순수가 실은 허망한 아우라로 뒤집어 씌워 은폐된 베일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국내에서의 모더니즘의 수용은 이상하게도 아도르노의 미학이론과 개념미술이 적당히 혼합된 편중성을 보이며 전개되어 왔다. 아도르노는 모더니즘의 영역으로 분류되는 철학자이나, 일면 일방적인 계몽에 의혹을 제기하는 사회비판 철학자임에 틀림없다.

단지 그는 비판철학자임으로 하여 새로운 가치를 제공하는 일보다는 과학기술문명의 도구적 합리성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적 허구성에 대한 저항의 한 유용한 형태로서의 예술의 고유성에 기대를 걸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받아들여진 아도르노는 이데올로기에 오염되지 않는 고유한 예술언어가 근본적으로는 더욱 사회비판적일 수 있다는 매력적인 부정의 논지에만 치우친 경향이 있다. 그래서 "예술은 빈 병 속에 넣어져 물결을 따라 흘러온 구조요청 쪽지"이며, "반향도 없이 아무 듣는 이도 없이 사라져 간다"는 등의 문구가 설득력 있게 보여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새삼 중요하게 부각시킨 '미메시스'나 '필연적 인식'의 문제로 다시 돌아가 볼 필요가 있다. 즉 그의 비판이론의 이면에 엄연히 존재하는 것은 '자연미'임을 부정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매우 금욕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개념미술은 아도르노의 이론과 일정 부분 유사성을 띠기도 하고 또 차별성을 보인다. 그 유사성은 '이야기의 부정'과 순수인식의 추구라 할 수 있고, 차이점은 사회비판적 요소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물론 '미메시스'의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필자는 개념미술을 구조주의의 맥락 하에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국내 미술계의 논의에서 구조주의는 진지하게 거론된 적이 거의 없었다.

결국 우리의 모더니즘 논의는 근대성[Modernity]과 동시대성[Contemporaneity]의 의미를 구별 없이 취급하였다는 문제로부터 근대성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긍정적 부분은 도외시하였으며, 단지 반 이데올로기의 문제에만 급급한 결과 너무도 쉽게 근대성 없는 탈근대성으로 진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포스트모더니즘 논의 안으로 들어와서는, 미술의 자기 충족적 언어 구축의 모습은 경계를 허문다는 다원주의에 힘을 얻고 더욱 모호한 지점으로까지 뻗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타자의 복원과 개체의 자율성은 '보편윤리'와 '주체적 인식', 나아가 '자연미'까지를 전복시키고, 폐기되었던 일상의 문제에 감각의 촉수를 되살려 주는 자율성을 허락하게 된 것이다.

탈구조주의자 데리다(J.Derrida)는 자연의 현전(現前presence)에 대해 말한다. 발화된 언어는 언제나 그 본래의 자연성과 시간적 거리를 가지면서 '의미의 미끄러짐'을 유발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인식, 또는 표현의 필연적인 통과 과정을 거치면서 자연은 언제나 현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자연은 단지 수많은 차이를 내포한 흔적(trace)으로 드러날 뿐이라는 것이 대체로 현대적 논의의 한계인 것 같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은 주체, 또는 근대적 인식론의 해체를 선뜻 들고나선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데리다가 다시 언급한 '보충대리(suppl ment)'의 의미는 제거된 상태에서 해체 만을 논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 간단히 재해석하자면 자연과 인간은 단지 주체와 타자라는 이분법적 관계의 전복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상반적인 타자를 자신의 존재성을 확보하기 위한 필수적인 전제로서 요구하는 순환적 관계에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자연에 내재된 자기목적적 내재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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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현대의 미술은 아나키즘을 필요로 하는가?


미술은 근본적으로 아나키적 삶의 방식을 선호하여 왔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세계 양차대전을 전후하여 등장한 다다이즘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오염되어 가는 근대의 미술에 전격적인 반격을 가한다. 미술 행위는 더 이상 권력의 하수인으로 전락되어서도 안되며, 어떠한 이념으로부터도 자율성을 획득해야 한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그들은 기존의 틀에 의한 장르를 부정했고, 예전에는 미술의 범주에 속할 수 없었던 부분들까지도 수용하였다.

그리하여 결과로서의 작품의 개념을 넘어서서 미술 행위 그 자체를 더욱 중요한 가치로 문제삼게 되었다. 왜냐하면 화랑이라는 고립된 장소에 전시된 액자화된 작품은 어떤 방식으로든 상품화의 연쇄고리에 걸린 권력적 이데올로기의 산물이 될 수밖에 없으며, 그렇게 표현된 예술언어는 고유한 창의적 자율성을 펼칠 수 없도록 조작될 수밖에 없다는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결국 다다이즘의 저항은 무너졌다. 그들은 스스로 자율성이라는 딜레마에 빠져버린 것이다. 혁명에 성공한 저항주의자가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 부딪친 것처럼, 단지 부정을 위한 저항은 방향성을 가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 방향성 없는 저항은 미술의 영역을 더욱 깊은 경계선 안으로 고립시키게 되었다. 즉 그것은 공동체적 연대감이 부재하는 무제한적 자율성의 구가에 있다. 미술에 내재된 시각적 언어의 특수한 의미는 개체적 자율성의 표출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이미 사회적으로 연대지어진 인간의 삶의 양태가 체험적이고 직관적으로 선재 되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는 곧 나의 필요 안에 너의 필요가 충족되는 부분을 포함하고 있다는 상호 의존적 가치 태도가 선행되지 못하면 사회적 연대, 혹은 사회적 전체는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본질적으로 아나키즘에서의 개인의 자유란 필연적으로 공동체를 전제로 한 자유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예술과 아나키즘이 결부되기 쉬운 것은 예술이 개인적인 것이기 때문이고, 아나키즘이 어떤 권위로부터도 해방된 개인의 자유를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나키즘이 말하는 참된 예술은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전문적인 예술가들의 천재적인 걸작이 아니라,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예술적 본능의 개화로서의 민중적 정서의 표현을 말한다.

아나키즘은 예술을 모든 인간이 창조적 예술가로서 행하는 하나의 시도로 본다. 따라서 예술을 직업과 생활의 수단으로 삼는 예술가란 아나키즘이 부정하는 것이다. 아나키즘은 모든 인간이 갖는 예술창조의 권리를 인정하며 모든 사람이 예술가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걸작의 죽음, 미술관과 음악회의 폐기를 선언한다. 미술관은 골동품들의 창고에 불과하므로. 작품 자체보다는 그 창조의 행위를 더욱 중요하게 받아들이며, 따라서 창조의 행위는 생활 속에서 생활과 일치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7, 80년대를 거치는 동안 우리나라 미술계에 뚜렷이 부각된 두 개의 논쟁은 작품의 순수형식에 몰입된 금욕적이고 환원적인 모더니즘의 경향과 그에 반발하여 권력적 순수미술의 견고한 틀을 무너뜨리려 한 민중미술의 대두였다. 그것은 한편으로 형식과 내용에 대한 논쟁이기도 하다. 사회구조 내에서 상용되는 언어방식의 수용은 그것이 반사회적이라고 할지라도 결코 사회적 권력의 부산물로 작용하게 될 수밖에 없으며, 그리하여 진정한 부정성을 지닌 예술의 순수영역을 지켜낼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 순수형식을 추구했던 모더니즘의 이유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한스 제들마이어에 의해 제기되었던 '중심의 상실'을 떠올리게 한다. "양질의 포도주는 오랜 숙성을 통하여 만들어지는데 오랜 숙성 과정이란 화학적으로 보아 포도의 성분은 감소되고 알콜 성분이 증가됨을 의미한다. 그러나 지나친 순수에의 추구는 포도주에서 포도성분을 제거시키고 알콜만을 남겨놓는 결과를 가져오게 한다. 우리는 양질의 포도주를 원하는 것이지 순수한 알콜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용이 제거된 형식이다.

한편 민중의 삶을 강조하고 정치권력에 대항하는 민중미술이 권력을 부정하는 아나키의 이상과 일치되는 것 또한 결코 아니다. 민중미술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또다른 모습으로 새로운 권력관계를 생산해 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 두 흐름은 모두 기존의 권력체계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으며, 예술의 개체적 자율성 또한 보장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90년대는 이 둘을 적당히 중재하는 듯한 모습으로 포스트모더니즘 논의가 본격적으로 확산되었다.

한국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은 따라서 탈근대성 의 의미만을 갖지는 않는다. 한국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본래의 의미에서보다는 이 두 흐름의 쟁점에 대한 하나의 대안적 역할자로서의 필요성에 의하여 수립된 경향이 다분하다고 볼 수 있다. 젊은 작가들에 의해 적극 수용된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 미술이 안고 있던 귀족주의적 순수형식으로부터 탈피하려 했으며, 아울러 민중미술이 보여준 집단 이데올로기적 심각성에도 반기를 든다.

우선 그들은 엄격하게 구획 지어진 장르간의 벽 허물기를 시도한다. 회화의 고유 영역인 평면성으로의 내재적이고 금욕적인 환원을 시도했던 모더니즘으로부터 탈피하여, 재료의 제한성을 무한대로 확장시키며, 나아가서는 시간성과 우연성, 그리고 이전에는 예술이라 할 수 없었던 부분까지도 수용하는 다변화된 모습을 보인다. 이제 부언설명이 없이 불려질 수 있는 순수 영역으로서의 미술은 불가능한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즉 각각의 미술 작품은 하나의 보편적 범주로 설명될 수 없는 개체적 자율성을 드러낸다.

문학과의 만남을 꽤하고, 음악과, 무용과, 연극과, 그리고 일상의 사소한 사건들과도 관계한다. 그것은 주체 중심적 인식에 의해 주변으로 던져진 타자들에 대한 관심의 회복이라고도 할 수 있다. 미술의 조형언어에는 항상 그 이면에 번잡하고 무거운 상징이 내재되어 있어야 한다는 종래의 관념을 부정하고 사소한 일상으로 다가설 수 있게 된 것이다. 상징은 오히려 미술을 여타의 철학이나 이념에 종속시키는 이분법적 계열화를 강화시켰다는 반성에 의해 허구로 전락하게 된다.

그리하여 미술 작품은 설명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 주는 것이 된다. 선을 그어 나가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행위로서의 선의 자율성이지만, 선을 다 긋고 났을 때의 결과는 원이라던가 사과라던가 하는 하나의 관념의 덩어리로 이해되는 것과 같다. 즉 행위가 결과에 이르면 예술행위 그 자체로서의 의미는 사라지고 본질과는 다른 하나의 상징체계가 강요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미술작업은 의미의 전제나 이념의 표출을 의도적으로 감추고 단순한 보여주기 의 방법을 취하려고 한다. 그 결과 개체의 자율성은 보장되는 듯 했고, 환원주의적으로 위계 지워진 허구적 전체는 무너진 듯 했다. 그러나 문제는 분산되어 버린 개체와 개체간의 체험적 상호성을 어떻게 회복하느냐 하는 것이다.

개체의 자율성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에서 미술의 특수성은 분명 아나키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의 포스트모던주의가 얘기하는 해체 는 근본적으로 아나키즘의 공동체적 연대성에는 위배된다. 이 지점에서는 잘못 수용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수정이 전제된다. 그것은 말하자면 무방비한 개체의 자율성이 어떠한 토대도 부정함으로 하여, 어떻게 해도 상관없다는 식의 무의미를 산출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공백 사이에는 여전히 은밀한 권력의 침투가 더욱 손쉬워질 것이다. 그것은 보편적 인식의 틀을 깨뜨려야 한다는 의미에서의 자유의 요청이 아니라, 인간의 삶의 존재론적 실상을 드러내 주어야 한다는 의미에서의 자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는 공동체적 연대감을 포괄하는 아나키적 예술의 진정한 자율성이 필연적으로 요청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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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현대의 미술은 필연적으로 생태미학을 요청한다.


권력에 억압되지 않는 미술의 자율성 요구는 어느 시대에나 있어 왔고, 포스트모던으로 대변되는 현대에는 더욱더 타당성을 갖고 등장한다. 모더니즘 시대에 있어서도 그것은 극단적인 아방가르드 정신으로 드러났다. 그것은 전체성에 대하여 부르짖는 예술의 저항정신이기도 하다. 그래서 미술 작품은 기존의 어떤 형식도 거부하는 새로운 혁신을 찾아 나섰다.

마치 작가는 '새로 굴착한 탄광의 막장 깊이 날려보낸 한 마리 카나리아'처럼 그 생존의 가능성을 온 몸으로 짊어진 척후병의 역할을 기꺼이 감내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모더니즘의 지고한 아방가르드 정신은 개체의 자율성을 담보로 대중과의 결별이라는 고립된 세계를 구축하게 된 것이다. 이는 작가 주체에 대한 지나친 신뢰로 말미암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절대적 주체로 등장한 모더니즘의 지고한 작가 정신은 미적 대상을 단순한 소재로 전락시킨다. 그 결과 자연미는 작가의 주체적 인식에 포섭되고 분석되어야 할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에 탈근대주의는 인식 주체를 해체시키고 타자에로의 접근을 시도한다. 그러나 이미 주지한 바처럼 우리의 미술 현장에 수용된 탈근대주의는 방향성을 상실한 채 자유경쟁 자본주의의 은밀한 전략에 말려들고 있다. 권력의 구조는 그 방향만을 전환하였을 뿐이다.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당면한 문제는 생태계 위기에 처한 인간의 생존에 있다. 인간의 오만이 자연에 대하여 무모한 권력 다툼을 벌이고 있는 동안 하나밖에 없는 지구는 황폐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미술이 눈앞에 닥친 현실과 거리를 둔 채 끝없이 스스로의 자율성만을 주장하고 있는 동안 인간 존재와 그 존재의 터전은 위험수위까지 도달하게 된 것이다. 이는 미술의 영역과 관심이 체험적 삶의 영역으로 다가가지 못했다는 이유와 함께, 전체와 부분에 대한 이분법적 태도가 지나치게 환원주의의 틀 안에 갇혀 있었다는 원인도 있다.

아나키즘은 전체를 지향하는 것도, 그렇다고 어느 부분만을 독자적으로 옹호하는 것도 아니다. "부분에서 전체에로의 이행은 무조건적인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단순히 임의적인 개인들의 집합을 총체성에로 이행시킬 수 없다. 총체성이 가능하려면 부분은 어떤 식으로든 전체적인 것에 관련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부분은 통합적인 속성을 가져야 한다. 전체적인 것이 존재하며, 환원 가능하다고 보면서도 사회적인 것을 부정하는 것은 부분이 이와 같은 통합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동일하다. 통합적인 속성이 부분에 주어져 있다면 이 속성에 연관되는 적절한 '전체적인 것'이 정의될 수 있다.

거꾸로 전체적인 것이 존재한다면 전체의 부분은 통합적인 속성을 가져야만 한다. 예를 들어 부분이 존재하고 적절한 통합적인 속성을 갖는다면, 그러므로 전체적인 것은 존재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떤 적절한 통합적인 속성이 있다는 말은 결국 부분의 전체적인 것에로의 이행의 기준이 된다. 이러한 통합적 속성이란 그러면 무엇인가? 그것은 말하자면 'A'의 속성이 결정되는 것은 'B'의 속성의 결정에 근거하는, 혹은 그 반대인 'A', 'B'라고 하는 두 부분의 속성이다. 다시 말하면 관련 개체들의 적절한 관계 속에서 그것은 '상호 독립적으로 변형되지 않는' 두 항목의 '상호 의존적 관계'이다.

이와 같은 상호 의존적 관계가 설정되지 못하면 사회적 연대, 혹은 사회적 전체는 불가능하다." 이는 곧 반환원주의적 태도이면서, 동시에 상반적인 타자를 자신의 존재성을 확보하기 위한 필수적인 전제로써 요구하는 관계, 즉 상호 대대(對待)적이며 상함(相含)적인 관계라 할 수 있다.

이제 나는 부분과 전체간의 통합성에 대하여 보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생태미학 의 범주로 말할 수 있는 바, 미술 본래의 자율적 특수성에 생태적 존재로서의 유기적 삶을 상호적으로 연계시키는 미적 태도로 설명될 수 있다. 왜냐하면 미술 행위란 그 자체로 생태적 체험의 표출이기 때문이다. 단지 창조적 생명력의 드러냄 이라는 미술의 내재적 특성이 지나친 인식론적 환원주의에 의해 은폐되지 않았었더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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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생태아나키즘 미술을 위하여


근간에 전개되고 있는 미술의 흐름 속에서 아나키즘은 거론된 적이 없다. 그러나 그 현실적 중요성만큼이나 확산되고 있는 생태학적 미술의 제 양상 속에서 필자는 아나키즘이 필연적으로 요청되고 있음을 감지한다. 그것은 생태주의의 요구 안에 이미 공동체적 아나키의 이상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생태주의는 우선 독점적 거대국가에 의한 권력이 생태적이지 못하다는 입장을 취하는 것으로부터 알 수 있다.

일차적 의미로 그것은 서구가 이룩한 근대정신, 곧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반성일 것이다. 현대의 선진 사상가들은 낙관적인 전환점(turning point)을 이야기했다. 인간의 문명이 어느 수준에 도달하면 지구 에너지나 환경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이 그것이다. 따라서 기술 과학의 발전은 그들이 기꺼이 내맡겨야 할 해결책이며, 인간은 그것을 개발해야 할 합리적 이성을 보지한 세계의 중심일 수 있었던 것이다. 나아가 이는 보다 높은 차원의 문화적 바벨탑을 구축하는 힘으로써의 예술의지 를 앞세웠다. 자연을 대상화시키고 조정하고 아름답게 꾸밀 수 있는 관리자는 곧, 근대의 주체 이다. 그러나 오늘날 자명하게도 대지의 여신은 그 자정능력을 상실해 가고 있다.

둘째로 그것은 이성이라는 공허한 껍질 속에 가려진 인식적 주체로서의 인간의 탈을 벗고 스스로가 자연과 공존할 수밖에 없는 생태의 일부임을 깨닫는 일이다. 이는 타자의 복원, 또는 다양한 개체의 경계 없는 해방이라는 의미에서 많은 부분 포스트모던 담론과도 유사성을 띤다. 포스트모던은 분명 주변에 버려져 있던 타자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입장에 근거해서 볼 때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이제는 타자의 부활을 지시하고 관리하는 자가 작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는 죽었다. 여기에 남는 것은 결과물로서의 작품이 아니라, 하나의 텍스트로서의 자료, 또는 작품행위의 흔적일 뿐이다. 따라서 생태 문제의 내적 수용은 그 계몽적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작가가 작품에 대하여 관계하는 시각적 전환이 요구되는 것이다.

생태는 인간에 의해 의미화 되어야만 거기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의미화된 창작 으로부터 생태의 유기적 생명연관에 의해 촉발될 수 있는 내재적 창조력의 형식을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공동체를 단지 생산의 총량을 위한 유용한 도구적 집단으로 보는 것이 아닌, 노동과 협동이 포함된 체험적 연장으로서 바라보는 반환원주의적 아나키의 이상과 일치된다. 작품의 결과에 의해 등급이 매겨지는 위계적 환원론이 아닌 전형성(pre-figuration)으로서의 체험적 제작 행위의 자율성을 창조적 원동력으로, 공동체의 연대적 힘으로 받아들이는 관점이 그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미술 현장에서는 규격화되고 상품화된 화랑을 벗어나 직접 자연으로 나가 설치하고 행위하는 체험적 작업이 점차 확산되고 있다. 바깥미술회 , 야투 , 금강미술제 , 바다미술제 , 비무장지대전 , 대청호 아홉 용머리 등이 그것이다.

그들은 모더니즘의 흐름에도 속하지 않았고, 민중미술과도 일정 거리를 두고 있으며, 포스트모더니즘과도 그 범주를 달리한다. 또한 인스톨레이션이나 퍼포먼스라는 생소한 개념으로 설명되기에도 충분치 않다. 그리고 그 때문에 그들은 바깥 으로 배척받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 스스로가 바깥 이라는 의미를 여전히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술이라는 기존 형식의 틀거리 안에서 쳇바퀴 돌고 있는 답답함을 그들은 싫어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은 보편화된 권력 내부로부터의 일탈을 선택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방향을 선회하여 미 라는 가치가 부여된 근원을 탐색하며, 창조력을 가능케 하는 생명의 조건을 찾아 나선다.

그것은 곧 인간 생존의 조건이자 체험된 미 그 자체이기도 하다. 환경미학자 벌리언트(A.Berleant)는 미적 이라는 말은 미적이라는 별도의 경험의 한 종류를 의미하는 데 사용되는 말이 아니라, 경험이 발생하는 한 방식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파악한다. 곧 '미적 지각은 곧 수동적인 관조상태'라는 전통적인 미학적 입장을 지각자의 능동적 주목과 참여의 반응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따라서 미적 경험이란 활동과 지각, 행함(doing)과 겪음(undergoing)이라는 두 계기의 상호 역동적 교호작용을 전제로 하는 것이 된다. 나아가 그의 미적 경험론은 작품과 지각자를 구분해 놓고 양자간의 관계를 분석함으로써 얻어진 정적인 미적 관조를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미적 경험이 일어나는 '미적 장(aesthetic field)'이라는 개념을 전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들 작업의 중요성은 언제나 그 처한 환경 조건에 따라 유기적인 차별성을 추구한다는 데 있다. 물과 나무 또는 기후 조건에 따라 그 변화의 움직임에 작가 자신을 몰입시키는 행위를 반복한다. 이러할 때 자연은 이미 작가의 바깥에 있지 않게 된다. 예술의지가 던져 버린 소재화된 자연을 다시금 감싸안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각기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주역이 말하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원리처럼 조화로움은 차별성을 전제로 한다.

각각의 체험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 작가의 작품이 언제 어디서나 불변하는 하나의 이니셜처럼 획일화되는 것이 아니라, 마주하는 장소와 상황에 따라 각기 상이한 관계에 의해 새로운 체험의 연장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자기세계 를 강요하는 미술은 이미 그 안에 창의성을 묵살시키는 권력이 내재된 것이며, 고유한 존재로서의 인간과 자연이 만나는 유기적이고 자율적인 변화 가능성을 관념적인 보편미의 틀 안에 고정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미적 행위는 다시 그 본래의 생태적 유기성을 되찾아 창조 행위의 원동력인 기운생동(氣韻生動) 을 드러내 주어야 하며, 이는 곧 미에 대한 인식론적 규정 이전에 창조적 생명체인 인간 행위 안에 몸의 선험성 이 선재되어 있음을 깨닫는 일이기도 하다. 이러한 생태미학적 반성은 지나친 위계적 보편주의나 방향 없는 개체의 자율성을 주장하는 무책임한 태도로부터 상호간의 자율적 가치를 존중하면서도 연대를 가능케 하는 공통항으로 작용하리라 생각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권력을 부정하고 상호부조의 공동체적 삶을 지향하는 아나키즘의 이상과, 자연을 밟고 서있는 인간중심주의로부터 유기적으로 관계하는 생태적 삶을 지향하는 생태주의 , 그리고 체험적 연장으로 드러내는 창조적 생태미학의 합치점으로서의 생태아나키즘 미술은 현대의 위기상황에 대처하는 필연적 대안으로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자료제공 : 미술평론가 김경서
 http://www.myloveart.com/technote/read.cgi?board=non&y_number=46&nnew=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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