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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스코프스키 2008-04-14 22:24:19, Hit :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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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지행네트워크][콜로키움(3.3) 발제문] 생태아나키즘과 문학/ 신철하 선생님
*3.3(월)에 있을 신철하 선생님의 지행콜로키움 발제문입니다. 조세희 선생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고, 이 발제문을 미리 읽어오시면 좋을 듯합니다.


                    생태아나키즘과 문학

                     -“난장이”의 사회생태론적 시각  




                       신철하(문학평론가, 강원대 교수)










    사회생태론적 키워드                                                

지역자치의 측면에서도,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의 실질적 민주주의는 더 후퇴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그 바로미터 중 하나로 더 나빠진 삶의 질을 제기할 수 있다. 한국의 지역자치 13년째가 되고 있으며, 이제는 어느 정도 가능성이 엿보인다는 범박한 느낌에도 불구하고 그 내면에 부패와 부조리, 전횡, 철학부재, 정치적 퇴행 등이 난마처럼 얽혀 있다는 판단을 지울 수 없다. 전체적으로 한국 정치는 여전히 뒷골목 건달 수준의 의식에서 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를 충격하기 위한 참여의 하나로 문화운동을 들 수 있다. 문화운동은 그러나 이제 보이는 차원보다는 보이지 않는 차원, 단기적 처방이나 기획보다는 장기적인 안목에서의 지속적인 주민참여와 연대를 위한 지적인 그라운드 확보가 필요한 시기로 접어들고 있다.

삶의 실질적인 지속의 측면에서 의미있는 주민참여와 조화로운 시민적 삶의 질을 담보하기 위한 높은 단계의 지적 프로그램으로 생태아나키즘을 제시해볼 수 있다. 생태아나키즘은 조화로운 마을자치와 생태공동체를 위한 흥미로운 지적 수원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생태적 삶, 생태적 사회개입이 실존적 차원으로 전회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과도한 국가주의와 이데올로기적 관념을 거부하고 근대이후의 실존적 삶과 사회적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한 근대비판으로서의 대안도 내포하고 있다. 주지하듯이 아나키즘은 단순한 무정부주의, 폭력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낮은 차원에서의 국가주의를 인정하며, 그렇기 때문에 국가주의가 개인에게 가한 폭력적 억압과 규제를 본래의 자유와 자율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한 새로운 국가주의 모델을 상정한다. 그때 생태아나키즘은 아나키적인 것이 실천으로 나아갈 철학적이며 정치적인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는 한 모델이 되고자 한다. 이 글은 그 잡상의 입론적 근거를 북친의 사회생태론을 통해 고민해보고자 한다.

사회생태론은 인간과 사회,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유기적 전체로 파악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동원되는 의미소는 ‘자유의지’와 ‘변증법적 이성’이다. 사회생태(론)적 입장에서 자유는 인간의 보다 나은 생태적 조건을 규율하는 기본 모토이다. 한 실존의 자유의지는 생물학적 삶의 필요조건이자 그것을 이월하는 사회적 생태의 궁극이기도 하다. 자유의지가 더 나은 삶의 사회적 조건을 낳는다. 그것은 물론 역사적으로 같은 뜻을 가진 민중들의 헌신적인 투쟁의 산물이지만, 그 고투의 다른 편에 지혜로운 협동과 공공부조의 친화적 연대를 실천한 동․서양의 의미있는 기록들을 만날 수 있다. 그 역사적 전통은 근대 이후의 사회적 삶에서도 귀중한 자산과 거울이 될 수 있다. 의식적으로 아나키적 생태의 사회적 실천은 이 자유의지를 통한 작은 단위의 ‘공공부조’와1) 그것을 바탕으로 한 공생을 지향한다. 그 지향의 수렴은 가능한 작은 단위의 지역적 결합과 생태적 실존에 있다. 말하자면 변증법적 이성은 이 작은 단위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한 방법적 자각과 관계한다. 변증법적 이성이 하나의 주의로 주장하는 ‘A는 A이면서 동시에 A가 아니다’라는2) 명제는 ‘이중구속론’의 신경병리적 인간이해와 일정부분 겹친다. 주지하듯이 그레고리 베이트슨의 인간이해에서 주목되는 것은 주어진 한계적 상황에서 상반된 두개의 메시지가meta message 주어졌을 때 반응하는 인간의 양가적 감정과 심리적 분열에 대한 관심이다. 그것에 대한 판단은 바로 북친이 강조한 ‘A는 A이면서 동시에 A가 아니다’라는 이중부정, 혹은 이중긍정과 맥락을 공유한다.3) 즉 그것은 모든 생명(체)의, 혹은 생명과 관련된 ‘정체성의 본래적인 특성 그 자체’이다. 이것을 북친은 ‘변증법적 자연주의’라고 정의한다. 좀 더 부연하면 변증법적 자연주의는 휴머니즘에 바탕한 자연적 삶을 위한 사회적 반응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 사회적 반응은 생태적인 사유에 진화론적인 관점을 포갠다. 그러므로 변증법적 자연주의는 유한성과 모순을 자연적인 것, 즉 사물과 사회현상들이 발전 과정에서 완성된 것이 아니며, 동시에 실체화된 것도 아니란 의미에서의 자연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변증법적 자연주의의 주체가 되는 것은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이다. 그런데 기존의 ‘관습이성적 사유’로는 유기적 진화과정에서 왜 인간들은 다른 종과 달리, 다른 생명체들을 희생시키면서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자아를 실현하는가라는 물음에 답할 수 없다. 만일 모든 생명체들이 존중되어야만 하는 내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면, 이 가치는 오직 인간의 도덕적, 미적인 능력이 그들에게 이것을 귀속시키는 한에서만 인정되는 것이다. 이러한 능력을 어떤 다른 생명체도 아직 가지고 있지 않다. 인간만이 내재적 가치란 개념을 구성할 수 있고, 오직 인간만이 이에 대한 윤리적 책임성을 부여받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사회적 진보 과정에서 인간이 자의식 적으로 스스로를 창조적인 자연으로 실현해내기에는 아직 미흡하다는 점이다. 현재 존재하는 바로서의 인간은 스스로 의식화 된 자연을 갖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구생물권의 보다 나은 미래는 인간이 구성한 이차자연이 새로운 사회 또는 새로운 유기적인 협력 체계로 이행해갈 수 있는 가의 여부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그것이 가능하게 되는 새로운 세계를 머레이 북친은 ‘자유로운 자연’이라고 정의한다. 자유로운 자연은 의식적이고 윤리적인 자연이며 궁극적으로 더 나은 삶을 위한 생태적 사회이다. 이런 자유로운 자연을 ‘아나키적 생태사회’라고 재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변증법적 자연주의에 터한 사회생태론은 궁극적으로 자연이란 무엇인가, 자연 속에서 인간의 위치는 어디인가, 자연 세계와 사회의 관계는 무엇인가 등에 진지하게 고민한다. 오늘의 우리 사회가 당면한 비극은 환경오염이라는 가시적 문제뿐만 아니라, 자연의 생태 시스템과 사회관계, 인간의 정신까지를 단순화하고 획일화시키는 폭력적 세계화의 메카니즘에 있다. 그 메카니즘을 특징짓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유․무형의 폭력과 새로운 야만화이다. 반문화와 반휴머니즘으로 통칭되는 이런 문화의 기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새로운 인간주의의 회복을 주장하는 사회생태론은 문화의 뿌리를 역설적이지만 자연 속에서 탐구하고자 하며, 자연으로부터 사회에 이르는 생물 진화의 점진적인 변화과정을 아나키적 생태사회 속에서 모색한다.




    아나키와 생태

아나키적 사회는 계급적 위계 형태로 억압된 사회구조를 해체하고 보다 작은 단위의 인간적 공동체와 상호부조를 정치적 지향으로 한다. 정치적으로 그것은 다위니즘으로 통칭되는 약육강식 형태의 적자생존이나 만인투쟁이 아니라, 협동과 상호부조, 느슨한 견제와 생물지역적 자치형식을 더 선호한다. 자유의지는 이 정치적 사회화의 필요조건이 된다. 강조되어야 할 것은 자유의지가 자폐된 밀실의 그것이 아닌, 공동체적 상호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생태론은 흔히 왜곡된 형태로 알려져 있는 ‘개인주의적 아나키’가 안고 있는 한계를 사회의 관계 속에서 변증법적으로 지양(조화)하는 노력을 필요로 한다. 역사적으로 한국의 아나키즘은 민족독립이라는 매개변수를 거느리면서, 서구의 그것과는 변별되는 독특한 방식으로 전개되어 왔다. 이 전통이 한국의 아나키즘을 유구한 농경사회적 문화를 통해 뿌리내린 공공부조(두레, 계 등)와 결합시킬 수 있는 개연성을 더 높여주는 요인이 되게 한다. 역사적으로 그것은 서구의 일부 아나키즘이 극단적 개인주의나 테러리즘으로 나아간 것과 비교해 보면 더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강한 민족주의적 색체와 새로운 모색을 위한 지식인의 사상으로 특징지어지는 한국적 아나키즘은 보다 대의적 성격을 지님으로써 오늘의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을 해소할 수 있는 제3의 대안으로도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그런 점 때문에 지나치게 실존적 자유에 탐닉하는 개인주의와 왜곡된 자율성을 강조하기보다는, 공공적 관계에 터한 사회적 자유를 더 강조하는 북친의 사회생태론은 한국적 아나키즘의 역사와 의미있게 조우할 수 있다.4) 그에 의하면 사회적 자유를 강조하는 생태윤리는 참여의 정치(특히 주민자치)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참여의 정치는 국가의 힘 기르기보다는 자신과 마을의 힘 기르기를 장려하는 정치이다. ‘이러한 정치는 정치 참여가 문자 그대로 얼굴과 얼굴을 맞댄 회의와 집회에서 가능하다는 의미에서, 민중화된 정치이어야만 한다. 이를 기반으로 가능해진 정치 윤리는 생산성에 매몰된 효율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보다 나은 인간적 삶을 위한 생태적인 공동체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태 공동체는 단순하게 환경적으로 깨끗한 마을이 아니다. 생태 공동체는 또한 공적인 합의라는 잣대를 제공하는 국가주의적 문화가 아니라, 자율적 자치 속에서 개인의 자유를 산출하는 사회정치적 실천인’ 것인다.5) 이런 입장 때문에 그는 이상한 형태로 변질된 대학과 지식장의 생태담론에 대해 강력한 비판을 개진한다.




아카데미에서는 논리성과 일관성도 결여된 생태철학이란 분야가 등장하고 있다. 이 분야는 온갖 것들을 쑤셔 넣은 저장소처럼 서로 논리적으로 어긋나는 경향들이 섞여 다만 무지에 대한 감상적 찬양이란 공통성 속에서 공존하고 있는 그런 분야이다. 도교로부터 회반죽을 빌려오고, 불교에서는 몰타르를, 하이데거에게서는 콘크리트를 스피노자에게서는 벽돌을,  그리고 커머너와 에어리히로부터 진흙을 빌려와 벌어진 틈들을 메운다고 해서 이것이 어떤 하나의 생태학을 도와줄 수는 없다. 매우 다양한 견해들을 근본 생태학 또는 생물 중심주의 밑에 혼합하려는 시도는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6)

  

북친의 비판은 근대이후의 서구사회에서 진행되어 온 개인주의적 아나키즘과 환경주의적 생태담론에 대한 날카로운 경고이자 사회적 환기이기도 하다. 담론을 개인의 쾌락과 취향으로 전락시킨 고립적 개인주의 아나키즘과 피상적 생태론은 건전한 사회의 진보와 인간적 휴머니티를 희구하는 사회적 공공성의 차원에서 부정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보다 후기자본주의가 내포하고 있는 지배적 상업주의 문화에 일정부분 순응한다. 말하자면 밀교적 마니아 문화의 형태와 유사하게 협소해진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은 동호인들의 쾌락적 취미의 성취로 귀결될 가능성을 안고 있다. 물론 자유는 아나키적 사유와 실천이 지향하는 핵심적 전언이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가 희망하는 자유의 유산이란 이념과 도덕적인 가치들, 사회적인 삶의 전 영역에서 건전한 인간이 자유와 자아의식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는 전통을 말한다. 사회생태론적 입장에서 ‘다양성과 상보성이 자연 진화에 부여하기도 하고 자연 진화로부터 등장하기도 하는 자유의 가능성과 다산성은 보다 질적으로 발전된 형태, 즉 사회 진화와 심리 발달에 적용된다고 말할 수 있다. 사회와 그의 정신적인 삶이 보다 다양화되면 될수록, 사회는 더욱 창조적으로 진화하고, 인간에게 부여된 새로운 선택이란 관점에서 그리고 다양성과 상보성이 창조하는 사회적 배경이란 관점에서 사회가 제공하는 자유의 기회는 커진다. 자연 진화에서나 사회 진화에서도, 우리들은 다양성과 상보성이 보다 큰 창조성과 선택 그리고 자유를 만들어냄을’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궁극적으로 사회생태론의 힘은 사회적인 것을 적어도 자연 속에 잠재화된 자유의 완성으로 이해하려는 점에, 그리고 생태적인 것이 사회 발전의 주요 조직 원리라고 생각하는 점에 있다.




    ‘난장이 연작’의 경우

‘난장이’ 해석에서 주목해 보아야 할 키워드는 난장이 일가의 생존을 위한 가족적 연대와 노력이 근본적으로 벗어나기 힘든 구조 악이라는 데 있다. 그것은 시대와 체제가 가한 억압의 전체적인 힘이기도 하다. 벗어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점에서 난장이 일가의 삶에 대한 집착과 노력은 허망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다른 체제로의 고민을 생각하게 된다. 이 연작의 주제가 될 만한 모티브를 작가는 프롤로그에 해당하는「뫼비우스의 띠」의 수학교사를 통해 의미심장하게 제시한다. 두 아이, 검은 색과 흰색, 안과 밖을 상징하는 ‘뫼비우스의 띠’가 함의하는 대극적 세계구조는 지배자/피지배자의 이분법적 세계(binary opposition)위에 이 작가의 시선이 기초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대결구조에서 전자는 늘 승리자이다. ‘난장이’와 ‘꼽추’로 대변되는 후자가 선택하는 유일한 방법은 폭력이다. 그는 가진 자들의 폭력에 같은 방법으로 대항함으로써 패배의 대가로 죽음을 받아들인다. 서사적 배경에서도 엿볼 수 있듯, 싸움은 70년대를 지배한 주요한 삶의 일상이 된다.「칼날」의 ‘신애’는 중간계급, 혹은 중산층에 속할 인물이지만 70년대적 현실에서 희망을 접는다. 그것을 대신하는 것은 ‘증오’와 테러이다. 신애와 세무서 조사과 직원으로 대분되는 사회적 구조악은 이 서사의 캐릭터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적어도 삶을 새로 설계할 시기에 신애와 그의 남편은 ‘깊이 사랑했’으며 ‘서로의 이상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고, 큰 희망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도, 희망도, 실제에 있어서는 아무 도움이 되어 주지 못’(27쪽)하는 현실에서 그들이 맞닥뜨린 것은 돈을 벌기 위한 처절한 생존투쟁이다. 생존투쟁에서 확인되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죽음의 목록이다.「은강 노동 가족의 생계비」를 들여다보면 ‘어머지의 가계부’는 말 그대로 ‘살아남기 위한 생존비’에도 못미치는 위태로운 조건 속에 ‘난장이 가족’이 처해 있음을 보여준다. 영수와 영호, 영희 삼남매의 노동 총액은 생존의 조건에 훨씬 못 미친다. 나아가 영수는 자동차 조립 공정에서 ‘일을 하면서 기계에 의한 속박을 받’으며, 영희는 ‘작업장의 실내 온도가 무려 섭씨 삼십 구도’에 이르고 소음은 90데시벨이 넘으며, 그 더위에 지쳐 졸음을 달래다가 작업반장의 뾰족한 핀셑에 몸을 찔리기도 한다. 이 구조적 악의 삶에서 아버지의 꿈은 허황된 것이다. 그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달에 가서 천문대 일을 보겠다는 것이 아버지의 꿈’이 되도록 한다. 흡사 낭만적 공산주의를 연상케 하는 아버지의 꿈은 그러나 현실과 치열하게 부딪치면서 내면화 한 세계인식이라는 점에서 비극적이다. ‘아버지에게는 숭고함도 없었고, 구원도 있을 리 없었다. 고통만 있었다’라고 영수는 기억한다. 그 고통의 현실에서 그는 ‘지섭’이라는 시대적 지식인을 통해 각성함으로써 새로운 세계변화를 향한 의지를 충전한다. 그 의지는 사용자/노동자의 대립으로 특징지어지는 계급적 대립으로 표현된다. 영수가 온갖 노력과 현실타협의 과정을 거쳐 공장의 사장인 윤호 아버지를 죽이기로 결심하는 과정은 양 계급, 혹은 계층 간의 소통이 불가능함을 암유한다. 소통의 부재는 힘에 의한 억압과 폭력의 악순환으로 외화된다. 외화된 악순환의 끝이 보여주는 것은 폭력과 죽음이다. ‘노동의 소외’는 70년대 현실을 지배한 화두가 되고 있다. 그 현실이 반 생태적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말하자면 ‘압축성장’으로 특징지어지는 개발독재식 근대화가 70년대를 향해 충격한 것은 보이는 폭력과 보이지 않는 폭력으로 요약된다. 약간의 희망과 무방비의 폭력 앞에 민중들은 삶의 공포와 불안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근대화도 서구의 경우와 크게 다른 것이 아니다. 버먼의 수사적 언설을 빌리면 우리의 경우에도 역시 ‘근대화된다는 것은 모험, 권력, 쾌락, 발전, 우리 자신의 변화 및 세계의 변화를 보장해 주는 동시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 지금 우리의 모든 모습을 파괴하도록 위협하는 환경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것과 동시에 ‘근대적인 환경과 경험은 지역과 인종, 계층과 국적, 종교와 이데올로기가 지니고 있는 모든 장벽을 무너뜨’린다. 이런 의미에서 근대성이란 모든 인류를 통합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역설적인 통합, 즉 분산된 통합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 영원한 해체와 갱신, 투쟁과 대립, 애매 모호성과 고통이라는 커다란 소용돌이 속에 우리 자신을 밀어 넣는다. 근대화된다는 것은 마르크스가 “견고한 모든 것은 대기 속에 녹아 버린다”라고 말한 바 있는 극히 위기적인 의미에서의 세계의 일부분이’7) 되는 과정인 것이다. 벤담 식으로 말하면 소외된 민중에게 근대화라는 거대한 프로그램은 ‘보이지 않는 손’, 혹은 ‘보이지 않는 눈’인 체계 속에 유약한 개인이 갇히게 됨을 암시한다. 다시한번 강조하여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노동의 소외, 혹은 엔트로피의 증가가 동반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근대화이라고 말할 수 있다. 노동의 소외 혹은 엔트로피의 증가는 생태적 삶의 불안과 위기를 전면적으로 가중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슈뢰딩거가 ‘생명은 반엔트로피를 먹고 산다’고8) 했을 때, 그 주장은 현대적 삶의 분열된 의식에 대한 각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열역학 제2법칙은 ‘엔트로피는 계속 증가 한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인간은 이 증가하는 엔트로피의 세계 속에서는 생존이 불가능하다. 생명을 보존하고 살리기 위한 에너지는 엔트로피를 더 낮추는데 있기 때문이다. 엔트로피를 낮추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인간은 외부로부터 낮은 엔트로피의 에너지를 공급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인간은 매우 불안전한 존재, 즉 독자적으로 생명을 보존하지 못하고 무엇인가에 의지해야 하는 ‘보생명(co-life)’의 존재인 셈이다.9) 근대화는 진보와 개발이라는 명목아래 공존하고 의지해야 할 타자와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대상화했다. 약탈과 파괴가 뒤따랐고, 자연히 소외된 개인과 자연은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근(현)대화 약 300여 년 동안 그 개발과 물적 진보의 이름아래 특히 서구제국은 화석연료를 통해 에너지를 공급받아왔고, 그 결과는 지구 온난화와 생물계의 교란을 가시적으로 가져왔다. 당연히 뒤따르게 된 엔트로피의 증가는, 부수적으로 근대화와 그 속도의 증가를 통해 오히려 인간 삶의 위기를 증가시키는 요인으로 나타나고 있다. 근본적으로 ‘생명은 그 생명을 살리는 방향으로 유기화하고 새롭게 복잡화하는 성질을’10) 지닌다. 근대적 실존의 위기와 생태적 죽임의 징후들은 이 생명의 결에 대한 역행과 무관하지 않다. 그 역행은 근대적 삶의 구조 속에서 각 실존들에게 필연적으로 주어진 억압의 일종이다. 근대자본주의의 진행과정에서 배태한 근본적이면서도 주요한 문제들은 역설적이게도 더 행복해지기 위하여 더 불행해 질 수밖에 없는 기이한 생태적 조건으로 결과하고 있다. 그것은 마르크스의 중요한 대안적 전언을 통해서도 암시받을 수 있다. 그는 인간의 인간지배와 더불어 자연 지배를 비판했다. 말하자면 그는 근대 자본주의 진행과정에서 발생하고 있는 인간착취가 자연착취와 다르지 않다고 강조했다. ‘인간은 자연을 먹고 살아간다. 이 말은 자연은 곧 인간의 신체임을 의미하며, 이러한 인간의 신체는 그가 살아 있는 한 끊임없는 자연과의 상호 교류를 통하여 생존할 수밖에 없음을’11) 의미한다. 마르크스는 산업혁명 이후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로 진행되고 있는 자본주의적 근대화와 그 과정에서 초래한 인간파괴와 자연파괴의 위기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본주의적 생산은 상품 속에 포함되어 있는 물질화된 노동에 관해서는 매우 경제적인 성격을 띤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생산은 다른 어떤 생산 양식보다도 심하게 인간의 생명, 즉 생명을 유지하는 노동과 피와 살뿐만 아니라 심지어 신경과 두뇌까지도 낭비하고 있다’라고 경고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적 생산은 ‘현실화된 노동, 즉 상품으로 구체화된 노동에 대해서는 지극히 경제적이다. 그런데 그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다른 어떤 생산 양식보다도 생명을 유지하는 노동에 대해, 다시 말해서 피와 근육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두뇌와 신경에 대하여 훨씬 많은 낭비를’ 초래하게 된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물론 마르크스가 여기서 더 주목한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그에 부수되는 ‘토지’와 ‘노동’에 관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자연과 관련된 세계이해는 폭력적인 근대화에 대한 경고이자 생태학적 현실이해의 주요한 전거가 될 수도 있다. 사실 현재도 환경문제, 나아가 생태학의 현실적 이해에서 토지와 노동의 문제는 가장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다. 인간과 자연의 착취는 ‘지속 가능한 개발’(ESSD)이라는 개량화된 구호아래 지속적으로 노동의 착취로 환원되고 있으며, 그것은 인간 억압의 형태로 거대한 하나의 사슬을 형성하고 있다. 체계 속에 갇힌 개체적 실존이 할 수 있는 것은 그 체계의 규율대로 순응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궁극적으로 피폐한 인간관계와 실존적 위기의 현실로 환원된다. ‘난장이’가 처한 70년대적 현실이 인간과 인간, 계급과 계급 간 극단적 대립과 투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그 사회의 위기신호를 반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민중의 노동소외와 반생명적 죽임으로 결과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드디어 반생태적 사회구조에 저항하는 방식을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다.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는 대결구조는 그 자체로 반생태적일 수밖에 없다. 집단에 집단으로 맞서는 대결방식 또한 반생태적임은 췌언할 필요가 없다. 그런 면에서 사회생태론적 공공부조의 대안을 ‘난쏘공’은 성찰적 명제로 부각하게 한다.




    상호부조

근대적 개발과 통제된 국가주의적 체제의 한계를 ‘난장이’는 미학적 형식을 통해 성찰적으로 체현한다. 체제적 억압과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된 인물들이 한결같이 보여주는 것은 사회적 삶의 패배와 인간적 소외이다. 그 사회에서 삶의 조건은 거의 명확하게 가진 자와 못가진자로 대분된다. 이분법적 삶이 상징하는 사회는 그러나 반생태적이며 반휴머니티를 깔고 있다는 점에서 위험한 사회이다. 그 사회가 희망적인 미래가 아닐 것은 분명하다. 더 나은 사회와 삶을 희망하는 난장이 일가의 고통스런 몸짓은 그 행동이 크고 강할수록 역설적으로 절망적이라는 것을 간명하게 반증한다. 이 미학적 충격은 투쟁과 갈등을 선동한다. 그러나 역사적 진보의 과정에서 투쟁이 실존적 차원에서 더 나은 삶과 미래를 보장하고 희망으로 작동한 예는 많지 않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다시한번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에 주목하고자 한다.

사회와 자연에는 상호투쟁의 법칙 이외에도 상호부조의 법칙이 존재하는데,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특히 종이 계속 진화하기 위해서는 상보부조의 법칙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케슬러의 생각에 지배당했던 크로포트킨은 인간의 진화에서 상호부조는 훨씬 더 눈에 띄는 역할을 해왔다고 언급한 다음,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나는 분명 생존경쟁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물계 특히 인간이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데는 상호경쟁보다는 상호지원의 혜택을 훨씬 더 많이 받았다고 주장한다. … 모든 유기체들은 두 가지 욕구 즉 영양 섭취의 욕구와 종족 번식의 욕구를 지닌다. 영양 섭취의 욕구는 유기체로 하여금 서로 투쟁하고 말살하게 만들지만, 반면에 종족 유지의 욕구는 유기체로 하여금 서로 접근하고 지원하도록 한다. 나는 유기적 세계가 진화하는 데 -즉 유기체의 점진적 변화에 있어서 - 개체들 사이에 상호지원이야말로 상호투쟁보다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고 싶다.12)




사회와 자연에 대한 그의 분석과 판단은 상호부조와 상호지지를 통해서 경쟁이 제거되면 더 좋은 조건들이 창출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필연적으로 야기된 근대사회적 삶의 조건인 생존경쟁 속에서 자연선택은 지속적으로 가능한 한 경쟁을 피하는 방법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결합해서 상호부조를 실천하라! 이것이야말로 각자 그리고 모두가 최대한의 안전을 확보하고 육체적으로, 지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살아가고 진보하는데 제일 든든하게 받쳐주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다’라고 그는 힘주어 설파했다. 이것이 자연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주요한 교훈이라는 것이다. 그의 발언은 선동적 정치가의 그것이 아니라, 그가 평생 동안 관심을 기울인 지리학과 생물학적 토대위에서 고구하고 집적한 지적 개안을 통해 도출된 것이라는 점에서 근대적 관점에서 말하는 ‘과학적’이다. 러시아 혁명의 한가운데서 그것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그 진실을 해석하고자 했다는 점에서도 그의 과학적 사유는 근대적 지식체계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면서, 혁명의 시대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을 창조적으로 해석한 상호부조론과 절묘하게 결합함으로써, 근대 이후의 인간적 삶에 대한 중요한 대안으로 유효성을 발휘할 수 있다. 이를 위해 그는 직접적으로 상호부조를 실천한 역사적 증거를 고찰하는 가운데, 역사의 전 영역을 통찰하는 생태적으로 더 나은 삶과 사회를 향한 의미있는 고찰을 시도한다.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종족과 촌락 공동체에서 발전한 상호부조의 핵심은 제도, 습속, 관습 속에 여러 형태로 남아 있다. 상호부조를 통해 인간은 사회와 결합해 문명이 진보할 수 있는 길을 열었으며, 탄알 대신에 문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날이 다가오면 그렇게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 문명 세계에도 똑같은 상황을 적용할 수 있다. 근대화로 인해 필연적으로 도시가 빈곤화되면서 수백만 사람들의 삶의 터전은 파괴되어진다. 수많은 사람들의 이성과 감정은 소수의 이익을 위해 길들여지면서 소외를 경험한다. 이 결과 탄생한 만인에 대한 개인의 투쟁이라는 이론은 과학이란 이름으로 제시되었지만 절대로 과학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이론을 받아들이기 보다는 자신들의 관습, 신념 그리고 전통을 더 고수하려고 한다는’ 것이 거듭되는 크로포트킨의 의미심장한 주장이다. 이런 전통은 근대사회에 들어와서도 유효한 삶의 모델이 될 수 있다. 타인의 욕구와는 상관없이 무모하게 자기 이익만을 채우려는 경향이 근대적인 삶의 유일한 특성만은 아니다. 사랑, 연민, 그리고 자기희생은 분명히 우리의 도덕적인 감정이 꾸준히 발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인간 사회의 근간이 되는 것은 사랑도 심지어 동정심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연대의식이다. 이는 상호부조를 실천하면서 각 개인이 빌린 힘을 무의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며 각자의 행복이 모두의 행복과 밀접하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각 인간마다 자기 자신뿐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의 권리도 존중해주는 의식 즉 정의감 혹은 평등 의식을 무의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 폭넓고 필수적인 기반 위에서 보다 높은 수준의 도덕 감정이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난쏘공』에서 영수는 ‘아버지’가 사랑 때문에 고통 받았다고 진술하면서, 그렇지만 ‘아버지는 사랑에 기대를 걸었었다. 아버지가 꿈꾼 세상은 모두에게 할일을 주고, 일한 대가로 먹고 입고, 누구나 다 자식을 공부시키며 이웃을 사랑하는 세계였다.…아버지가 꿈꾼 세상에서 강요되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으로 일하고 사랑으로 자식을 키운다’라고 회고한다. 그 사랑 때문에 아버지는 죽어서야 현실적 삶의 고통을 벗을 수 있었다. 영수가 판단할 때 아버지의 비극적 사랑은 지고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고통스럽다. 그 사랑이 고통스러운 것은 대물림의 형태로 지속된다는데 있다. 근대적 부의 불균형은 단순히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반생태적 사회의 구조악은 필연적인 폭력의 악순환을 예고한다. 우리는 여기서 스탈린이 추구한 병영형 공산주의나 포디즘식의 자본주의가 모두 왜곡된 근대화 모델이며 그렇다는 점에서 근대화에 대한 분석과 성찰을 강요받게 된다. ‘난쏘공’에서 비교적 이성적으로 현실을 직시하고자 한 지식인의 한 전형을 대변하는 ‘지섭’의 모델이 그것에 미치지 못함은 자명하다. 그 마저도 폭력의 현장에서 다른 방법의 폭력적 방법으로 맞서는 대결의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의 기저를 형성하는 ‘난장이’ 가족의 따뜻한 연대와 품성은 생태적이다. 아버지 ‘김불이’가 죽고 어머니의 회고에서 그녀는 고통과 억압만 주는 도시 ‘은강’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를 짓고자하는 마음을 흘린다. 그 품성은 그들이 바라는 농촌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땅의 정직성을 믿고 있다는 것이 된다. 땅과 호흡하며 땅을 통한 노동에 바라는 희망이 현실적으로 그녀에게는 유일한 미래가 되고 있음을 엿보게 한다. 그러나 그 희망은 근대적 사유에서는 퇴행적이며 반근대적 비전으로 폄하된다. 이 인식의 차이를 크로포트킨은 공공부조라는 생태적 관점에서 극복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이 서사에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보아야 할 것은 가족연대에 대한 것이다. 연대는 공동체 삶의 근본을 이룬다. 그리고 그것은 인류 역사의 가장 견고하고 아름다운 제도에 속한다. 가족의 연대가 제도적으로 깨지는 역사적 흐름은 항용 어떤 지역이나 할 것 없이 근대적 기제가 정점을 향해 팽창할 때와 긴밀하게 연동돼 있다. 그런 점에서 근대화의 완성은 다른 의미에서 가족적 연대의 파괴를 필연적으로 불러온다. 『난쏘공』에서 가족 연대는 휴머니즘에 근거하고 있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위해 죽음을 담보로 한 테러를 서슴치 않으며, 그 아버지의 사랑을 물려받은 영수는 그것에 대한 연민과 공공부조의 도덕의식 때문에 마찬가지로 테러를 하게 되며, 아직 소녀티를 벗지 않은 영희는 가족의 생존공간을 위해 자신의 몸을 ‘딱지’와 교환한다. 그 각자의 생존투쟁은 가느다란 가족적 연대로 이어져 있다. 반면 억압하는 자의 연대는 강하고 폭력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은 반도덕적이며 반생태적이다. 대결에 기초한 이 이분법적 방식은 생태적 세계이해의 결함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이다. 그 사유 자체가 근대에 맞서는 생태적 사유로부터 기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족연대의 위기와 그 징후를 『난쏘공』은 한 사회의 근대화 정점에서 보여준다. 그것이 미래에 결과할 것은 생태적으로 공공부조의 와해와 그로 인한 실존적 삶의 위기일 것은 췌언할 필요도 없다.

대결에서 상호부조와 자율적 자치로의 이행을 생태아나키즘은 호소한다. 근대화가 조건없이 개인의 행복과 더 나은 삶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통찰이야말로 우리가 ‘난쏘공’을 통해 인식해야 할 유익한 근대이후의 시대적 교훈이다. (신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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