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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낰 2004-05-24 22:11:37, Hit : 1890
Subject   심층생태학(Deep Ecology) or 이문재와 김지하의 대담
심층생태학(Deep Ecology)



심층생태학을 포함한 생태학일반의 입장은 환경과 인간, 환경과 사회, 그리고 정치. 경제적 생활양식의 근본적 변화가 환경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본다. 그 중에서도 1970년대 초반부터 환경론이 가진 한계를 비판하면서 등장한 심층생태학은 생태계 위기의 원인을 인간과 자연의 이분법에 기반한 서구 합리성의 개념에서 발견한다.

생태학의 철학적 기반, 즉 생태철학은 이성철학의 '구조변경' 위에서만 가능하고 이 구조변경은 '이성 말고 다른 무엇'으로 인간과 자연을 설명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그러므로 생태철학은 지금까지의 모든 철학, 특히 '자연철학'에 정면으로 대립한다. 자연철학은 의식과 의식의 주체라는 이분법적 구조 속에서 관찰자 이외의 모든 대상에 대한 지식을 추구한다.

여기서는 명백히 '인간화된 자연'이 대상이 된다. 이성의 자율을 자연 본래의 가치와 결합하고자 노력하는 자연철학은 우리시대의 근본적 결함을 드러내고 있다. 생태철학은 이와 반대로 '의식적 존재'가 주체가 되는 게 아니라, '자연존재가 주체이면서 자연의 자연성'을 문제삼는다.

생태철학(심층생태학)은 서구문명의 본질을 이성의 자기확대과정으로 포착하고, 자폐적으로 자기규정에만 몰입하는 이성의 광신적 자기확신을 대신할 '체계로서의 새로운 철학'을 시도하고 있다. 아도르노와 호크하이머가 비판했듯이 지금까지의 이성이 '이해를 위한 도구로서의 이성'에 불과했다면, 이제이성은 '이성과 다른 것'을 불합리로 몰아붙이는 행위를 지양한 헤겔식의 '전체로서의 이성 혹은 포괄적인 이성'을 기획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이성과 다른 것을 수용하고 배제하는 교묘한 전술을 통해 결국 이성의 범주에 집어 넣으려는 은폐된 전략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이성철학의 구조변경에서만 생태철학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할 때, 그것은 무엇인가? 이성의 마력에 습관적으로 몽롱해져 있는 환자가 순간적 각성의 상태에서 정상생활를 욕구할 때 저지르는 실수는 이성이라는 마약을 버리는 것이 곧 정상상태로의 회복이라고 착각하는 일이다. 지나친 폄하인지는 모르나 '이성의 해체'에만 골몰해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체계로서의 새로운 철학'을 시도하는 생태철학을 구성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이성이 아닌 것으로서 생태철학의 척도는 ' 그 자체로서의 자연' 이외에 별다른 대안이 없어 보인다.

'그 자체로서의 자연'이라고 강조하는 까닭은 지금까지의 자연이 철저히 이성적으로 가꾸어진 자연이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이성은 자기규정 혹은 자기원인(스피노자가 말하는 causa sui) 을 그 본질로 한다는 공식선언과는 달리 그 자체로써 규정될 수 없었고 언제나 다른 것과 구분하고 대비하며 다른 것과의 논쟁 속에서 규정되어 왔다. 이성 스스로는 타자에 의해 규정받지 않는 자율성을 강조하면서 모든 이성의 타자에 대한 규정에 있어서는 이성의 관여를 거부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이른바 모더니즘이라는 프로젝트는 근대과학의 방법론에서 절정을 이루는데, 바로 이것 때문에 이성의 범주 밖에 있던 자연이 이성적으로 대상화되었고 또 근대과학의 성과에 대한 신뢰만큼 그들이 다루어온 이성화된 자연을 신뢰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인간과 자연의 이분법에 기초한 근대적 세계관이 환경위기의 근본원인이라고 진단하는 심층생태학이 그 철학적 대안으로서 제시한 '그 자체로서의 자연'이라는 척도는 이성이 활개친 모더니즘의 견고한 울타리 안에 갇혀 있는 우리로서는 그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쉽게 접근할 수가 없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이점이 심층생태학이 풀어야 할 가장 큰 과제이다. 이성 없이 자연에 들어가는 법을 말이다.

어쨌든 인간중심주의를 포기하고 인간을 자연에 재편입시킨다는 심층생태학의 대원칙은 다음과 같은 기본적 개념들을 재정립하려고 한다.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아닌 새로운 인간이해, 그 자체로서의 자연관, 인간 이외의 생명에 대한 가치인정과 배려, 이 세 가지에 대한 전혀 새로운 이해가 선행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인간이 자연에 재편입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사실 인간 이외의 생명체의 가치나 관점이 고려되어야 함을 내포시키고 있다. 더 나아가 인간의 이성에서 자유로운 자연 그 자체를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은 인간이 자연에 재편입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표리의 관계에 있다. 즉 사실인식과 당위적 결단의 표리관계다. 그러나 이 두 명제의 관계는 사실인식이 선행하고 실천적 행위가 후행하는 논리적 선후관계가 아니다. 이성지배의 역사적 한계를 자각한 다음에 나온 당위적 실천명제(인간이 자연에 재편입되어야 한다는 명제)가 하나의 인식태도가 되어 사실인식(그 자체로서의 자연이해)을 유도할 수 있고 그 역도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 가지의 문제에 대해 현재까지 심층생태학자들에게 공유되는 관념을 살펴 보자. 우선 새로운 인간이해로서 인간을 ' 자연 속의 인간이라는 형상, 말하자면 인간, 동물, 대지가 영적인 상호관계를 인식하는 그런 형상 ' 으로 그려내려 한다. 중요한 것은 자연에 대해 혹은 타자에 대해 인간 스스로 초월적인 무엇이라는 자긍심을 버리고 생명공동체의 평범한 구성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점이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인간규정이 자율규정(이성의 독단에 힘입어)임에 반하여 외부로부터 인간을 규정하되 특히 특별한 취급을 받았던 이성까지도 외부로부터 규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규정은 철저히 자기규정 밖에 할 수 없다는 데카르트의 '코기도'정신이나 인간의 인식은 결코 물자체에 이를 수 없다는 칸트의 관념론이 헤겔의 화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패했음을 거울삼아 다시 한번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하지 않을 수 없음은 새로운 정세(환경위기)가 강요했던 것이다. 인간의 자연회귀가 인간의 자연으로의 유람여행은 아닌 것이다.

다음으로 심층생태학은 다른 생명체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고 또 배려해야 함을 주장한다. 그것은 인간의 인간에 대한 윤리의식이 단순히 다른 생명체로 확장되어서 나타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전통윤리의 기본전제가 환경위기를 해결할 수 없거나 심지어 조장할 수 있다는 반성에서 제기된 새로운 윤리의 명제로 나타난 것이다. 이와 더불어 생태학과 생물학의 발전으로 단위생명체가 분리되어 단절된 채 독립적으로 생명을 유지한다는 근대적 생명관의 기본전제가 잘못되었음을 밝혀낸 사실이 심층생태학의 생명관을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과학으로서의 현대 생태학이 발견해낸 사실은 모든 생물권이 자연의 균형을 창출할 수 있는 아주 섬세한 안정적 메커니즘으로 엮어져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생명의 단위는 개체 혹은 세포 등과 같이 분절할 수 있는 독립체로서는 규정할 수 없고, 한 생명 내부적으로도 그렇고 주위 환경과의 관계에서도 그렇고 작은 단위에서부터 큰 단위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역동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전체로서의 개체'라는 것이다.

이러한 발견은 기존의 생명관과 자연관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심층생태학이 강조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하나가 전체성과 통일성인데, 이것은 '아마 생명의 크고 작은 단위들이(이것 자체가 임의적임) 전체로서의 그물망 속에서 끊임없이 상호의존적으로 작용하는 관계'라는 현대 생태학이 발견한 과학적 사실에 고무되어 형성된 관념일 것이다. 전체성과 통일성이란 중심주의적이고 환원주의적인 근대적 사고방식에 대한 대안이다. 한편 심층생태학은 또한 탈중심주의와 다원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전체성, 통일성이 탈중심성, 다원성과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가 문제된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생명관이 '개체의 전체성'과 '전체의 개체성'이 사실로서 조화되고 있음을 입증하고 있기 때문에 무소불위했던 형식논리로 수용되지 않는다고 하여 폐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마지막으로 심층생태학이 말하는 자연관을 살펴 보자. 그 자체로서 자연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기존의 자연개념 자체가 이미 이전의 철학과 종교사상에 의해 타락하고 변화된 것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깨달아야 한다.자연에다 입힌 인간의 옷을 벗기지 않은 채, 자연으로 회귀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자기확대를 자연의 옷으로 위장하는 일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연으로의 회귀는 이성으로 오염된 인간 자신의 자기정화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대단히 어렵다. 왜냐하면, 이성에 길든 정신이 그 정신으로부터 이성의 독단을 걷어내려고 할 때, 길을 잃고 말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명상의 체험(이성 이외의 정신체험, 깨달음의 경험; 신비주의적 종교체험과 다름)의 정신사가 결여된 서구 정신사에서 볼 때, 그 유일한 해결의 통로는 당위적 결단과 예지적 상상력에 의존하는 방법이다. 당위적 결단이란 이성철학의 한계를 벗어나야 한다는 부정적 인식에서 자연을 그 자체로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당위적 태도를 결정하는 것을 말한다. 예지적 상상력에 의존한다는 것은 니체처럼 서구의 이성철학의 기만성을 폭로하면서 동시에 이성 너머의 세계를 그의 예지적 상상력에 의해 놀랍도록 묘사하고 있는 사례와 같다.요컨대, 심층생태학이 이성의 범주를 뛰어넘어 그 자체로서 자연으로 가는 데 동원된 요소는 과학적 생태학의 새로운 생명관과 당위적 결단과 예지적 상상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그들은 새로운 자연관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즉 자연은 엄격한 운동의 법칙을 따르는 죽어있는 것이 아니고, 성장과 쇠퇴를 끝없이 되풀이하는 살아 숨쉬는 유기체이다. 자연의 조직과 운동은 다양한 환경적 요인들 간의 불안한 안정구도로서 항시 변하는 체계이며 자연 통일체는 변화하는 힘들이 불안하게 이루어낸 배열이다.그리고 자연의 이 유동성에 대해 영원한 것은 항상 변화한다는 양식이다. 전체로서 자연이 보여주는 이러한 양식은 그것이 자기 순환적 에너지 체계임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자연의 균형은 자연과정들이 그 환경과 연관되는 방식, 즉 에너지의 효과적인 순환을 통해 이루어진다. 요약하면, 자연은 상호의존적인 유기체로서 순환적인 에너지 체계의 양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심층생태학의 자연에 대한 이러한 통찰은 동양철학의 세계관, 더 정확히 말하면 불교의 화엄적 세계관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에코아나키즘



환경생태의 문제를 국외에서 아나키즘적 시각에서 접근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최근 국내에서 전개된 다양한 사회운동을 포괄하면서 종국적으로 환경생태 위기시대의 철학적-윤리적-정치경제적 대응원리로 제시된 이른바 '에코아나키즘(Eco-anarchism)'은 하나의 독자적 계보를 가진 것으로 평가하기에 충분하다.


근대적 산업사회의 모순을 해결하는 구원의 이데올로기로 등장한 맑스주의가 팽배하던 시절 비현실적인 유토피아사상으로 간주되었던, 그래서 자본주의와 맑스주의의 양 진영으로부터 매도되어 무참히 깨어졌던 아나키즘이 생태환경 위기의 시대에 다시 등장했다는 사실이 우리를 의아하게 만든다. 그러나 에코아나키즘은 분명히 말한다. 이것은 한 사회체제를 총체적으로 전망하는 이데올로기도 아니고 그것을 실현내려는 혁명적 실천이론이나 정치강령도 아니다. 다만 현실정치의 하부구조로서 현실적인 사회운동일 뿐이다.

에코아나키즘이 일단 건강하게 보이는 것은 나름대로의 철학적 지반과 그에 기초한 정치경제적 사회원리를 상당히 구체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점 때문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심층생태학과 같이 총체적이고 근원적인 통찰로서 반환원주의와 다원주의의 철학을 밑그림으로 하고, 생태맑스주의 같이 합리적이고 분석적인 '노동교환이론'이나 '협동교환과 참여의 경제'라는 공동체의 정치경제적 형상을 과감하게(?) 그려내고, 다시 생태사회주의의 진화생물학적 혹은 자연생태적 사회공동체에 유비되는 아나키공동체(탈중심적 상호의존적)로써 채색하여 하나의 작품을 완성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또 기술의 반생태적 위험성, 끝없이 확대재생산되는 관행화된 인간의 욕망, 얼굴도 모르는 생산자와 소비자가 시장이라는 익명의 심연에서 만나 서로를 소외시키면서도 그 책임을 은폐할 수 있는 거대규모의 사회체제 등의 문제까지도 해소시켜 나갈 것이 바로 익명이 보장되지 않는 하부구조로서의 '생태공동체적 공산사회' 라는 것이다.

에코아나키즘은 기존의 생태환경이론을 적절히 취사선택하여 종합한 이론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고 보인다. 예컨대, 맑스의 노동가치이론에 갈음하여 노동교환이론으로 대치한 것은 노동가치이론에 대한 정치한 반론에서 도출한 것이라기보다는 우리 앞에 명백하게 나타난 생태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당위명제의 논거로서 구성한 이론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즉 노동교환이론이 노동가치이론을 변조해서 도출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와 관계없이 노동 그 자체가 가지는 소외를 원천적으로 없애는 사회적 노동행위를 지칭한 것에 불과하다. 노동교환이론을 내세우는 것이 유의미한 것은 무슨 굉장한 이론이기 때문이거나 맑스주의를 생태환경학에 수용하려는 태도 때문이 아니라 맑스의 불멸의 명제인 인간의 노동소외문제를 생태위기의 핵심과제에서 결코 배제할 수 없다는 정신 때문에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코아나키즘은 여전히 망라적이라는, 그래서 아직 내적인 자기통일성이 부족하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여기서 망라적이라는 혐의는 환경생태이론에 대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환경운동과 환경윤리와 환경철학의 연결선상에서 어느 지점에 있는지 또는 어느 것에 중심을 두고 있는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에코아나키즘의 내용은 실천운동의 지침과 정치경제의 원리와 그에 상응하는 수사학적 윤리 혹은 철학이 뒤섞여 있으나 그 상호관계는 잘 파악되지 않는다. 이성철학의 독단성을 피하는 다원주의적 세계관을 예상하면서도 그 초점이 대체로 소규모 생태공동체의 실천원리에 맞춰져 있어서 일종의 사회운동 실천강령이 아닌가 생각된다.





생태사회주의와 생태맑스주의



심층생태학과는 달리 생태사회주의(social ecology)와 생태맑스주의(eco-marxism)는 환경문제의 원인이 자본주의 사회체제에 있다고 진단한다. 생태사회주의가 경쟁과 지배를 만들어 내는 억압적 사회구조가 생태위기의 원인으로 본다면, 생태맑스주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 그 자체로부터 생태위기를 이끌어 낸다. 그래서 그들은 경제 및 정치구조에 대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다. 요컨대, 생태사회주의는 인간사회를 자연생태에 맞도록 재구성함으로써 인간의 자연성을 실현할 수 있고 환경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하는 반면, 생태맑스주의는 특정한 사회적 생산양식(자본주의)이 환경위기를 가져 왔으므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청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먼저 머레이 북친으로 대표되는 생태사회주의의 주장을 알아 보자. 북친이 말하는 환경위기는 사회환경으로서 인간의 자연지배와 인간의 인간지배로 요약된다. 그 지배의 현상은 계층과 서열이 매겨져서 계산가능하고 획일적으로 평가되어지는 사회로 나타난다. 때문에 그는 사회(제2의자연)가 자연의 생태처럼 계층과 서열이 없는 그리고 무제한적 자유가 보장받는 진화된 사회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자연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분열을 극복하고 자연의 진화과정과 조응하여 인간사회의 연속성을 회복하려고 한 것이다.그의 이러한 시도는 사실 생물학과 사회학, 더 정확히 말하면 진화생물학과 정치학을 접목시켜 자연과 인간사회의 진화론적 통일성을 추구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면 그러한 목표를 어떻게 실현시켜 나갈 것인가? 그 해답은 그의 생태윤리학적 실천에 있다. 그의 실천적 윤리명제, 즉 그의 체계에서는 정치적 정언명령으로 드러나는데 보편적 방향성, 복잡성, 상보성, 자발성을 향해 가는 생태계 변화법칙에 조응하여 생명계의 창조적 진화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자연계 중에서 인간이 지금까지의 진화과정을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이 자연을 관리하고 이끌어 가는 목자라고 본 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생명체가 참여하고 공동으로 진화할 수 있는 자유, 그리고 자주관리되는 생태공동체 구현이라는 그의 목표와 명백히 모순된다. 또 인간과 자연의 완전한 동일성을 주장하는 심층생태학과도 차이가 있는데, 북친의 입장에서는 심층생태학의 그러한 자연이해가 비현실적이어서 결국 인간의 주관적 가치가 개입할 것이라고 한다. 더구나 심층생태학은 자연주의적 생태중심주의에 빠져 사회정치적으로는 부르조아 자유주의에 안주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북친의 생태윤리학이 가진 또하나의 특징은 그 이론적 근거가 유기체적 자연철학(진화론적 생물학)에 있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윤리학이 '객관적임'을 서슴없이 주장하는데, 그것은 ' 자연 속에 숨어 있는 잠재성'이 자연진화의 역사를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고 인간이 충분히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윤리학이 상대주의도 주관주의도 초월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생태윤리적 선의 행위를 위해서 자연의 목적과 진화의 방향을 객관적으로 감지할 수 있다는 논지에는 자신의 직관에 독단적 자명성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서열도 계급도 없이 평등하면서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는 자연에서부터 생태윤리에 맞는 선의 근거를 찾아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서 모순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한편, 맑스주의의 시각에서 환경생태문제를 해결하려는 생태맑스주의를 살펴 보자. 생태학적 측면에서 보면, 맑스는 인간중심주의자이다. 따라서 그의 주된 관심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보다는 생산력을 통한 사회발전과 억압적 사회환경으로부터의 인간해방에 있다. 그에게 자연환경 파괴의 문제는 사실 이차적인 것이다. 일차적인 문제인 인간해방의 논의는 대강 다음과 같다. 우선 인간을 추상적이고 사적인 개인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사회관계 속에서 '노동을 통해 자기를 구체화해 가는 유적인 존재'로 본다.

여기서 '노동'이란 경제학적 개념이 아니라 인간학적 개념으로서, 생산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다. 그것은 자유로운 삶의 표현으로서 자기창조행위(Akt der Selbst erschaffung)이며 인간과 자연이 관계맺는 과정이기도 하다.그러나 특정한 사회체제, 곧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는 인간의 노동은 소외된다. 이미 노동 그 자체가 상품이기 때문에 그것은 자기목적적 행위가 아니라는 점에서 자기로부터 소외되고, 생산활동 과정에서 소외되며, 생산물을 소유하지 못하므로서 노동대상으로부터 소외되고, 그 결과 동료로부터(유적 존재로부터) 소외된다. 노동의 소외는 인간소외의 구체적 형태다. 나아가 노동이 자연과 창조적으로 관계맺는 과정이라면, 노동소외는 자연으로부터의 소외를 의미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자본주의의 가장 큰 문제점은 부의 불공정한 분배가 아니라 노동을 강제노동으로 만들고 무의미하게 하기 때문에 인간을 정신적 육체적 불구자로 만드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인간해방의 논리는 인간의 노동을 소외시키지 않는 새로운 사회체제의 건설로 집약된다. 그러나 맑스는 그러한 사회를 실현시키는 토대로서의 생산력 , 그리고 그러한 생산력 증대를 가능하게 하는 기술을 승인하고 있다. 즉 그가 문제삼은 것은 생산력과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의 생산력과 기술이었던 것이다. 자본주의 아래에서의 생산력과 기술은 인간과 자연의 유기적인 상호작용을 저해하여 자연을 다만 착취의 대상으로 본다. 그리하여 자본주의는 소비지향적이고 불필요한 과잉 생산활동으로 오염과 공해를 방출하고 재생산될 수 없는 자원을 고갈시킨다.인구과잉의 문제 역시 자본주의제도적 요인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한편으로는 가난과 영양실조를 초래하면서 동시에 불완전 고용을 지탱할 수 밖에 없는 구조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맑스가 그토록 신뢰를 가졌던 생산력의 발전이란 자본주의제도와 관계없이 그 자체로서 그것은 물질의 소비를 뜻한다. 현실사회주의가 자본주의가 발전시킨 가공할 생산력의 발전 없이는 사회주의가 될 수 없었음을 잘 보여주었다면, 발전된 자본주의의 물질적 생산력 그 이상을 전제로 하는 사회주의의 목표는 비록 공평하기는 할지 모르겠지만 여전히 과도한(풍요로운) 물질적 소비를 의욕하고 있는 것이다. 공평하고 풍요로운 물질적 소비가 삶의 이상이 아니라 노동을 통해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생산적으로 엮여가는 사회가 진정한 인간해방이라는 초기 맑스주의는 현실사회주의보다 훨씬 생태주의적이다. 기술의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기술은 노동 속에 내재해 있는 '여가와 놀이'적 성격을 빼앗으므로써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기술 그 자체가 자본주의와 무관하게 이미 소외된 노동을 만들어 내는 성격이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자본의 이기적 욕구에 결합될 때 더 심각한 것이지만. 더구나 맑스는 과학과 기술의 역할을 대단히 의미있게 받아들였는데, 특히 기술에 대해 그 속성을 잘 파악하여 충분히 관리할 수 있는 것으로 보는 낭만적 기대를 하고 있었다.그러나 현대의 과학과 기술은 그 전문적이고 복잡한 속성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고 있어 이제 더 이상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스스로의 발전논리를 따르고 있다.

결론적으로 환경생태의 문제를 맑스주의로 풀어보려는 시도의 타당성과 한계를 지적해 보자.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현실의 사회경제의 구조적인 억압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킬 것인가 하는 맑스주의 제일의 명제에 여전히 귀기울려야 한다는 점이다. 그 유일한 해결의 방안이 자본주의의 청산에 있다는 이데올로기적 독단성과 이성관리적 인간중심주의를 유보시킨다면 말이다. 생태철학도 이기적이고 파괴적인 삶을 지양하고, 창조적이고 자족적인 사회적 삶을 육성하는 이성적 사회가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이라는 점을 주장한다. 그리하여 새로운 생태사회를 요구하는 현시기에 있어서 맑스주의의 유산은 다음과 같이 수정된다면 여전히 유효한 테제로 남아 있을 것이다. 즉 만국의 노동자들만 연대하는 인간중심적 공산주의에서 생물계 전체와의 연대를 인식하고 실천하는 '생태공동체적 공산주의'로.





동양철학의 생태적 자연관



서양의 '철학'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지적 호기심'에서 출발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정신적 욕구 중의 하나인 알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시키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 철학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동양의 철학은 삶에서 발생하는 걱정거리(憂患意識)에서 출발했다는 점에서 훨씬 생태적이다. 삶의 절실한 문제를 자연환경으로부터 해결하기 위해 자연현상을 생존적 시각에서 파악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그들이 구성한 우주관의 범위는 의외로 좁고 내용도 단조로우며 문제의식 또한 자연과 인간의 관계(天人之際)나 인간역사의 통시적 변화(古今之變)을 파악하는 데 있었다.한마디로 현세적 삶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소박하고 절실한 것이 그들의 기본적 관심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연을 실체적인 면에서 추구하지 않고 기능적인 면에서 파악하려 했다. 칸트식의 용어를 빌면, 시간과 공간이라는 인간의 선천적 감성형식 중 서양철학은 자연을 공간적(연장적인 것; 존재,실체,體 )으로 접근해 갔고 동양철학은 시간적( 운행,생성적 기능,用)으로 접근해 갔다고 할 수 있다.

공간적으로 접근해 간 자연의 대상은 점점 더 분할되어 갔고(원자의 단계) 분할된 요소는 전체와 질적으로 동일한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다. 그래서 이제 그들의 관심은 요소들이 어떻게 분화되고 종합되는가 하는 평면적인 구조(시간의 흐름에 따른 구조의 변화에는 무관심)에 있었다. 그래서 요소들을 엮어주는 '법칙'이 요소(존재)와 무관하게 따로 있어야만 했다. 또한 그들에게 시간이란 단지 불변적 공간구조(일정한 틀) 안에 나타나는 임의적이고 비본질적인 현상일 뿐이었다. 그들이 세계를 정확하게 기술할 수 있는 방법으로 고안해낸 좌표평면을 보면 이점을 더 잘 알 수 있다. 공간의 틀은 고정되어 있으므로 궤도(방정식)와 시간만 주어지면 미래와 과거의 모든 상황을 모조리 파악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공간상의 어떤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존재의 변화란 존재 그 자체의 내적인 원인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존재 밖에 있는 법칙에 구속되어 나타나는 현상일 뿐인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시간을 그 자체로서 인식하지 못하고 공간의 틀(공간상의 다른 위치관계를 시간의 함수로 표시)을 가지고 기술한다. 근세에 와서 하나의 충격으로 받아들인 '무한(無限)'이라는 문제에 있어서도 그것은 공간의 무한이었지 시간의 무한은 아니었다. 심지어 현대과학의 발견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그들은 삶의 경험에서는 결코 확인할 수 없는 태초와 종말이라는 시간의 한계점을 무의식세계에 확고하게 내장시키고 있다. 요컨대, 그들의 우주관은 무한공간과 유한시간으로 짜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생명이라는 것도 유한한 시간 안에 공간적 무한분할에 의해 해체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반면에 동양적 사고방식은 정확히 그 반대다. 세계의 형상은 지적 호기심으로부터 추상되어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삶의 체험에 기초하여 그려진다. 우주(宇宙)는 말 그대로 늘 살고 있는 집을 확대한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하늘이 둥글고 땅이 평평한 것도 삶의 체험이 보증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삶의 터전은 확실히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제한되어 있는 삶의 터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그 공간 안에서 끊임없이 재생되어 나오는 생명이라는 결실물이었다. 그리고 생명은 인간이 관리할 수 있는 그런 영역이 아니라 땅의 영역이고 시간의 영역이었다. 동양인에게 시간은 하늘의 영역이었다. 인간은 다만 하늘과 땅이 함께 만들어 내는 생명이라는 결실을 이용하여 삶을 유지할 뿐이었다. 생명은 분할하고 다시 종합할 수 있거나, 때를 앞지르거나 지나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찍이 터득해서 땅에 순응하고 때에 순응(時中)하려고 노력했다. 땅은 그 자체가 생명은 아니었지만 생명을 키워낸다는 점에서 생명적이었고 또 시간의 일정한 흐름에 ?춰 그 생명의 키워냄을 끝없이 반복했다. 중요한 것은 시간의 질서였다. 일정한 리듬을 가지고 무한히 반복되는 시간의 운행질서는 생명현상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시간의 흐름이 생명의 흐름과 표리관계인 것으로 받아들여진 동양적 사고에는 생명이 시간의 무한성을 타고 반복되는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생명의 한 순간을 무한한 시간의 압축된 현상(화엄사상의 一念卽時無量劫)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생명현상으로 내재화되어 있기 때문에 '변화'라는 현상도 내재적이다. 이러한 동양의 우주관은 한마디로 유한공간과 무한시간으로 틀지워졌다고 할 수 있다.이러한 틀에서 생명이란 유한한 공간(땅;자연)이 시간적 무한성을 타고 반복적으로 자기를 드러내는 현상이라고 여겨지는 것은 당연하다.

유한공간과 무한시간이라는 우주관으로 생명현상에 주된 관심을 둔 동양적 사고는 삶의 절실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데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동양철학의 자연관은 정확하게 표현하면 자연을 곧 생명체라고 보기보다는 생명을 중심에 놓고 보는 자연관이다. 그러나 자연(특히 땅)은 유한성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키워낸다는 점에서 생명적이다. 자연은 생명의 연장선에 생명의 근원으로서 존재한다는 점에서 어쩌면 더 생명적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 그 자체가 곧 생명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생명이라는 것이 분할할 수 없는 것이고 인간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존재로서 내재적인 자기변화를 이끌어 가는 것이라면, 그 생명으로 하여 그런 존재이게 하는 자연 역시 인간과 관계없이 스스로 있고(自存) 스스로 그러하며(自然)하다. 사실 자연이라는 것을 공간적 접근에서 실체로 보는 것부터 비생명적이다. 자연을 생명적 현상으로 보는 동양철학의 자연관은 생명의 흐름 즉 '움직이는 현상'으로서 말 그대로 일종의 형용사 개념이다. 자연은 죽은 공간이 아니라 생명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자연인 것이다. 서양적 관점에서 자연을 생명의 동적 흐름으로서 혹은 그 자체로서 보기 힘든 것은 자연을 자꾸 실체로서 규명하려는 태도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또 생명의 속성이 분할할 수 없다는 것은 생명의 통일성과 전체성을 의미한다. 대상을 분할하고 종합하여 파악하는 것이 대상의 본질을 흐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서양적 접근방법에서 자연을 생명적으로 포착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리하여 생명의 전체성을 언제나 개체들의 집합이나 종합과 동일하게 취급하여 파괴하고, 개체들의 관계를 개체에 초월해 있는 '법칙'으로 연결시키므로써 개체의 자발성을 파괴한다.

한편 근대과학의 하나인 생물학에서 획기적 발견으로 취급하는 '생명의 진화'현상을 생명의 중요한 본질로 보고 이를 여러 방면에서 활용하고 있다. 자연현상의 일반적 법칙으로, 심지어 사회변동이론이나 역사법칙으로까지 확대하여 응용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중, 삼중의 왜곡이 도사리고 있다. 무엇보다도 긴 시간의 경과를 요하는 진화현상을 매우 짧은 단위에 적용하는 왜곡이다. 진화현상을 입증하는 시간단위는 개체적 삶의 시간단위나 역사단위나 나아가 인류의 역사시대 전부와도 무관하다. 또 시점과 종점을 가정하는 서구의 유한적 시간관이 진화의 시간을 그 적용에 있어서 터무니 없이 단축시켰을 뿐만 아니라 직선론적 발전의 이념으로 왜곡했다. 사실 우리가 경험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한 개체의 발생, 성장, 소멸로 되풀이되는 현상일 뿐인데, 개체 생명의 자연스런 변화의 과정을 발전이나 진화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또 한 개체 생명의 자연스러운 조절력과 생명력을 원대한 '진화의 의지(목적)'로 확대해석하는 것은 인간중심적 사고이거나 이성중심주의적 발상으로 보인다. 자연이나 생명은 인간의 이성적 욕구처럼 그러한 발전이나 진보를 하지 않는다. 더구나 한 개체가 종(種) 전체의 진화를 목적으로 하는 행위를 윤리적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보인다.

그렇다면 동양철학의 생태학적 자연이해의 내용은 무엇인가? 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주역(周易)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주로 자연의 순환원리와 그에 상응하는 인간의 대응태도를 매우 암시적이고 상징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시간의 변화에 따르는 적절성(時變의 中正), 전체적 상관관계 속에서의 적응성(應和), 대립적인 두 힘의 작용과 반작용의 관계(相反相成; 相生相剋) 그리고 교체순환(交替循環)과 상쇄성(消長), 한 힘의 진행경로서 극한에 이르면 되돌아 가는 원리(物極必反) 등으로 표현되지만 요약하면, '생태적 환경 속에서 각기 자기를 조절하여 전체적으로 균형을 맞추는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존재의 생태학적 원리는 전체 혹은 타자에 대하여 언제나 교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자기조절(자기변화)를 통해 균형을 유지하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교감의 능력, 자기조절능력, 그리고 전체적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자기역할, 이 세 가지의 힘이 곧 생명력이라 할 수 있다.



2) 동양철학의 생태론적 인간관



동양철학의 인간관이 이성중심적 인간관이 아니라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렇다고 하여 도구적 인간이라든지 유희적 인간이라든지 하는 서구적인 다른 인간유형으로 규정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대개 한 사회공동체의 조화를 위한 행동준칙을 충분히 자각하고 그것을 내면화하여 자발적으로 실천하는 인간, 즉 도덕적 인간을 이상적인 모델로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사회공동체의 조화를 위한 윤리적 준칙을 어떻게 구성하는가 하는 일이다. 이 기준은 농업적 자연공동체로부터 자연스럽게 형성된 관습(대가족 사회에서의 孝悌)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자연의 질서)이다. 즉 혈연적 지연적 공동체의 상호의존적 정서와 자연의 원리( 교감의 능력, 자기조절능력, 전체균형을 지향하는 힘)를 두 축으로 하여 인간행위의 지표로 삼으려 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나중에 소위 천인합일(天人合一)설로 정형화되었고 주역에 내재하는 근본사상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의미에서 동양의 인간관은 자연주의적 인간 혹은 생태론적 인간을 지향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과의 조화를 바탕으로 사회와의 조화를 이룬 도덕적 인간이 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는 것이었다. 동양철학의 인간관을 거론할 때, 특이한 점은 보편적인 인간유형에 대한 정의가 아니라 목표로서 성취해야 할 이상적인 인간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평범하게 일상적으로 사는 사람이나 잘못 길들어진 사람과 매우 이상적인 사람을 항상 대비시키는 방법을 택한다. 그 까닭은 인간은 '원래 완전'(도가의 입장)하거나 혹은 ' 원래부터 완전할 가능성(정통유가와 불교의 입장)' 을 가지고 있지만 현존하는 삶은 그렇지 못하다고 함으로써 인간에게 '교육'이 필요함을 역설하기 위해서이다. 적어도 인간 안에 완전성으로 갈 수 있는 근거를 소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을 원천적으로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고 할 수 있고, 또 교육에 있어서 '자발성'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양극의 대립적 인간유형을 제시하여 교육의 존재이유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한편 현실적 인간들끼리는 그 양극 사이에 수많은 편차가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입장이기도 하다. 물론 정치적으로는 이 논리를 이용해 사회적 계급을 정당화하지만 이러한 차이는 잠재적인 인간성을 계발한 정도의 차이에서 비롯한 것이지 사회신분의 차이에 말미암은 것은 아니다.

불완전한 인간에 내재해 있는 완전가능성을 교육을 통해 계발함으로써 비로소 인간성이 실현된다는 것은 사실 씨앗이 '환경의 조건에 적응하면서 자기를 키우고 잠재성을 드러냄'으로써 마침내 생명성을 완결결시킨다고 하는 것과 같은 생태론적 구도이다. 생태론적 교육론은 당연히 생태론적 인간관을 전제했을 때 가능하다. 즉 교육론을 통해서 볼 때도 동양철학의 인간관이 생태론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동양의 교육론에 나타나는 중요한 특징은 다음의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소위 공부론(工夫論)이고 다른 하나는 수행론(修行論)이다. 공부론이란 간단히 말해 지식을 머리로써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익히고 내면화시켜 삶의 자연스런 태도로 발현될 때까지 하는 자발적 노력을 말한다. 행동이나 느낌이 따르지 않은 채, 지적 이해만 앞서 나가면 그러한 공부 자체가 이미 불균형적 인간을 만들게 된다. 한 인격체 내부의 생태가 파괴되는 것이다. 수행론이란 '없는 것'에서 '만들거나 얻는 것' 으로의 노력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이 '잘못 만들어지거나 불필요한 것'을 '닦아내는 것'을 뜻하는데, 특히 후자의 '원형회복'을 위한 '버림'의 교육이 서양 교육론과 다른점이다. 생명의 주요한 특성 중의 하나는 노폐물의 배설작용이다. 얻어진 것을 취한 다음 반드시 버리고 비우기 때문에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육을 통해 얻은 노폐물이 정신과 몸 안에 남아 있을 때 버리고 비우기의 교육을 함께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동양철학에서는 자연에서의 인간의 지위와 역할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한마디로 자연에의 개입을 긍정한다. 동양철학의 요체를 천인합일(天人合一)이라고 흔히 일컫는데, 이것은 인간이 자연과 대등한 지위에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말이다. 또 천. 지, 인의 삼재(三才)를 말할 경우도 같은 뜻이다. 이 의미를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인간의 주관성을 이중으로 탈피해야 함을 말하는 것 같다. 인간중심을 극복하기 위해 자연중심주의를 제안할 수 있는데, 그것은 사실 인간중심주의의 도치된 형태일 수도 있고 또다른 편견일 수도 있다. 인간이 자연에서 예외일 수 없듯이 자연 또한 인간에서 예외일 수 없다. 우리는 인간중심주의에 대해서도 객관적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자연중심주의에 대서도 객관적이어야 한다. 이것은 자연을 통해서 인간을 보고 인간을 통해서 자연을 보아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요컨대,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라는 동양철학의 기본명제는 우주론적 생태계의 세 주체가 된다는 말이다. 이 세 주체가 동등한 자격으로 함께 참여하여 만들어내는 생태현상이 인간의 문화이다.그러나 우론적 생태계에서 인간이 동등한 자격의 주체가 되려면 이상적 인간, 즉 성인(聖人)이 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동양철학에서는 인간이 자연과 더불어 동등한 주체의 지위를 주지만, 그것은 인류라는 보편성에 주는 것이 아니라 이상적 인간이라는 특수성에 주고 있는 것이다. 자연의 생태를 진실로 체득한 자만이 그러한 존재일 수 있는 것이다.



3) 자연 그 자체로 들어가는 길



생태환경론에서 가장 핵심적인 과제는 인간중심주의에서 어떻게 자연중심주의로 넘어갈 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 여기에 대한 동양철학의 답변은 대개 세 가지의 통로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 첫째 경우는 동양철학의 생태론적 자연관이나 생태론적 인간관에서 말한 바 있듯이 생태론적 시각과 태도이다. 이것은 유한공간과 무한시간의 관점으로 인간과 자연을 바라보는 문화적 풍토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자연 그 자체의 세계로 들어가는 길은 사실 논증적이 아니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 길이 가장 일반적이고 실제적인 길이라 할 수 있다.

둘째의 길은 장자(壯子)사상에서 강조된 바와 같이 '인간인식의 한계' 를 확실하게 인식하고 그 인식을 자기의 실존에 다시 적용시켜 존재 그 자체로 돌아와 정신적 소요(逍遙)를 획득하는 길이다. 장자의 이 방법이 체계적으로 잘 설명되고 있는 부분이 [제물론(齊物論)]이다. 장자의 이러한 사상은 이른바 ' 존재(실존)회귀의 인식론적 초월주의'라고 부르고 싶다. 장자사상의 전반을 여기서 거론할 필요는 없기 때문에 생태론적 측면에서만 이야기 한다면, 우선 그의 [양생주(養生主)]의 사상을 살펴 보기로 하자. 양생주(養生主)란 곧 '삶을 올바로 기르는 원칙' 을 말하는데, 그는 첫머리에 이 윈칙을 제시한다. 인간은 육체적인 존재인 동시에 정신적 존재이다. 육체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한계가 있다. 그러나 정신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한계가 없다. 그런데 인간들은 한계가 없는 정신적 욕구를 가지고 한계가 있는 육체를 이끌어가려 한다. 이것이 삶이 파괴되는 원인이다. 그러므로 양생의 원칙은 한계없는 정신적 욕구를 한계있는 육체적 존재에 맞추는 길이다. 요컨대, 모든 존재는 원래 완전하고 자족적이지만 인간의 정신이 만든 얼개가 존재를 그렇지 않는 것으로 볼 뿐이므로 정신의 얼개를 걷어내는 인식론적 전회를 통해 존재 그 자체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정신의 주파수를 육체의 파장에 맞춤으로써 심신의 완전한 일체(정신소요)를 획득하고 이것을 통해 다시 자연과의 일체(物我一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정신소요를 통한 물아일체로 나아갈 수 있는 조건으로서 정신의 얼개를 인식하는 일과 만물이 존재론적으로 평등하다는 인식(萬物齊同)을 얻는 일이다. 이 작업을 위해 장자는 주로 '인간인식의 틀'과 '인간종족의 인식틀'이 가진 문제를 노출시켜 그러한 인식을 유도해 내고 있다. 이점을 논증적으로 접근하기도 하지만 비유나 우화의 방법에 더 큰 비중을 두어 실제적 인식를 기대했다. 어쨌든 심층생태론이 자연에 접근하려 했던 방법과 다른 점은 자연과의 통일 이전에 심신의 자기통일이라는 실존적 방법이 선행해야 한다

는 점이다.

자연 그 자체로 들어가는 동양철학의 또 하나의 길은 명상의 방법이다. 이 길은 확실히 인도적이다. 현세적 세계관을 가진 중국인들에게 정신의 깊은 내적 체험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승인되기까지 많은 시간의 경과가 필요했고 여러 가지 오해가 있었다. 그러나 일단 그와 같은 새로운 차원의 세계를 승인하자 그들의 현세적 세계관과의 독특한 변증적 종합이 일어났다. 변증적 종합의 구체적 대상은 인도의 대승불교사상과 중국의 장자철학이었다. 그 결과 가장 중국적인 대승불교로서 화엄종과 선불교가 나타났다. 전자가 이론적 측면이 많았다면 후자는 실천적 측면이 많았다. 우리가 알고자 하는 바가 어떻게 존재의 세계 그 자체로 들어가는가 하는 데 있기 때문에 그점에 초점을 맞춰 논의하기로 하자. 사실 두 철학이 다 존재(자연)로의 진입을 목표로 하는 것보다는 자신 안에서 존재와 인식의 통일을 더 우선시한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이나 결과가 곧바로 우주론적으로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보면 마찬가지다.

자신 안에서의 존재와 인식의 통일이라는 과제는 불교적으로 말할 때 '깨달음'과 '닦음'의 역동적 관계로 진행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진입방법은 인간의 정신신체적 구조에 대한 불교의 독특한 해석에 바탕을 두고 있다. 대승불교가 전제하고 있는 인간의 정신신체적 구조는 네 차원의 심층구조로 되어 있다고 본다. 가장 근저에 있는 차원은 그 자체가 바로 우주적 본질로서 존재-인식의 통일체(아뢰야식)이다. 그러므로 존재(자연)로의 진입이란 사실 자기 안에 있는 존재-인식의 통일체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것은 언제나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근저의 정신신체적 통일체는 현실적으로 분화되고 뒤집혀서(顚倒) 드러나는데, 그것은 다시 깊은 데서부터 표층까지 세 개의 차원으로 분화된다. 아주 미세하지만 이 왜곡의 첫 단계는 자아의식의 형성이다. 이 자아의식이 만들지는 순간 대상을 구성하는 의식이 형성되니 말하자면 주객의 구분이라는 이분법적 분열은 이때 시작된다. 여기까지의 왜곡은 대상세계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구조 안에 잠재해 있는 과거경험의 영향력 때문이다. 이러한 분열은 바깥세계와 관계없이 일어나는 왜곡이라 하여 심불상응염(心不相應染)이라 한다.

왜곡의 두 번째 차원은 분별하고 판단하는 생각의 작용이 만드는 것을 말한다. 소위 이성의 작용을 지칭하는데, 불교에서는 이것을 분별지(分別智)하여 왜곡의 첫단계가 만든 주객 이분의 토대 위에서 감각기관이 외부로부터 받아들인 감각자료를 분별하고 개념화하여 왜곡을 구체화시킨다. 뿐만 아니라 이 사념작용은 분별하고 개념화하는 왜곡에 매우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감각자료 없이도 상상적으로 개념을 구성하고 분별하는 행위를 잠시도 쉬지 않는다.

왜곡의 마지막 차원은 감각기관이 외부의 대상을 감각하고 거기에 집착하는 왜곡을 말한다. 가장 구체적인 것으로 표상되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현실의 토대라 한다. 그러나 불교적 관점에서 볼 때는 가장 표층적 차원이다.

우리의 논의의 초점인 인간과 자연의 이분법을 어떻게 극복하여 자연 그 자체의 세계로 들어가느냐에 대하여 심층생태학의 접근방법과 불교의 접근방법은 원천적으로 다르다. 불교의 입장에서는 인간과 자연을 이분화하는 근본적 요인이 자연적 대상과 관계없이 인간의 정신구조 안에 원초적으로 내재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그 극복의 과제는 자기 안의 문제이며, 그것의 극복이 곧 인간과 자연의 이분법을 통일하는 것이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질이 곧 자연의 본질이며 인간의 본질 안에 이미 자연과의 완전한 통일이 주어져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 이점에서 장자의 접근방법과도 구분된다. 장자의 사상은 정신과 육체로 분열된 인간의 자기균열을 극복함으로써 인간과 자연의 이분법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인간의 정신구조 안에 원초적인 형태로 이분화의 단초가 있다고 진단하는 불교에서는 어떻게 이것을 극복해 갈 것인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정신구조 안에 이분화의 단초가 구체적으로 형상화된 것이 자아의식이다. 세계를 주객으로 이분화한 왜곡된 삶의 현실로부터, 통일된 원형의 세계로 회복해가는 전환점의 절정이 바로 자아의식이기 때문에 자아의식의 해체(無我)야말로 최대의 과제가 된다. 그러므로 이성을 통하여 자아의식을 강화해가는, 혹은 이성적 사유 그 자체가 바로 자아라고 선언하는 서양철학이 이성을 해체하고 자아와 자연을 통일시키고자 하는 일은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것은 마치 다른 것을 벨 수 있는 칼이 자신을 벨 수 없는 것(刀不自割)과 같고 손가락이 손가락 자신을 가르키지 못하는 것(指不自指)과 같은 것이다.







인간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시급하다




이문재와 김지하의 대담


94년 시집 『중심의 괴로움』을 펴내며 생명운동의 새로운 차원을 제시했던 김지하 시인(57)이 삼 년여의 침묵을 깨고 ‘율려문화운동’을 펼치고 있다. 율려(律呂)―『천자문』 도입부에 있는 율려조양(律呂調陽)을 출전으로 하는 율려는 우주를 관장하는 중심음을 뜻한다. 김지하 시인은 지난 8월 ‘율려학회’를 조직하고 매월 1회씩 율려를 주제로 한 학술 토론회를 진행하면서, 우주적 휴머니즘으로도 불리는 신인간주의의 이론적 토대와 구체적 실천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지난 시월 하순, 경기도 일산 자택에서 만난 김지하 시인은 건강해 보였다. 술도 끊고 담배도 끊었다. 십여 년 만에 숙면을 취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곧 시도 다시 쓰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같은 변화는 지난 1년 동안 단학선원에서 기수련을 해온 덕택이었다. 자주 웃음을 섞어가며 근황을 털어놓은 그는 곧바로, 거침없이, 동학과 단학, 생명운동과 율려운동 사이를 연결한 뒤, 미당과 김동리의 정신사적 배경을 들추어내면서 율려문화운동론과 율려문학론의 일단을 내비쳤다.

김지하 시인은 율려학회 제2회 세미나 ‘풍류와 율려’ 초청장에서 다음과 같이 썼는데, 율려의 등장 배경과 개념, 그리고 그 지향이 어느 정도 압축되어 있어서 율려라는 말을 낯설어하는 독자들을 위해 먼저 여기에 인용해놓는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요즘 시절은 서서히 거칠고 세상은 험악하며 지구가 병들고 절기가 뒤틀리는 말세가 분명합니다. 세계 대공황의 가능성이 높아지는 가운데 우리의 경제 위기는 장기화되어가고 있고, 보험금을 타기 위해 자식의 손가락을 자르는 아비가 나타나는가 하면 혹독한 기상이변으로 생물 생태계의 혼란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옛 사람들은 깊은 명상 속에서 우주의 소리에 귀기울이고 천지의 변화를 관찰하여 율려를 새롭게 했습니다. 새 시대의 중심음, 황종(黃鐘)을 다시 찾아 정하여 예악을 새롭게 일으키고 온갖 제도를 근본적으로 혁파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우주의 변화로부터 너무도 멀리 절연되어 있습니다. 우주질서의 조화로운 변화를 인식하고 표현하며 그것을 인간의 마음과 사회질서에 적용하는 율려를 잃어버렸습니다. 오늘의 음악과 예술과 문화를 지배하는 것은 극도의 해체와 타락, 즉 만(慢)입니다. 그러나 만은 또한 새로운 율려의 시작을 예고하기도 합니다.


율려문화운동이 자신의 인생의 마지막 라운드라고 토로한 바 있는 그는 질문을 던질 때마다 긴 답변*을 내놓았다. 그의 ‘그물망 같은 답변’은 길게 질문할 능력이 부족한 질문자의 다음 질문까지 내포하고 있을 때가 많아서, 질문자는 입을 열 기회가 거의 없었다.

―전화 통화할 때, 요즘 문학을 읽지 않아서 문학에 관해 할말이 없다고 하셨는데, 일부러 문학과 거리를 둔 것입니까?

어떻게 그렇게 됐습니다. 내가 원래 애를 써서 글을 쓰지를 않았어요. 그냥 떠오르면 쓰고 안 떠오르면 안 쓰고, 쓰려고 애쓰지도 않는 게 버릇이 됐어요. 내가 소설가도 아니고.

―지난해 여름 토지문학관 기공식 때 뵈었을 때보다 훨씬 건강해 보입니다. 기수련 때문입니까?

몸이 아파서 단학선원에 나가기 시작했어요. 나보다 먼저 시작한 아내(김영주씨)가 좋다고 권유해서 지금까지 일 년 다녔지. 그러다가 지난봄부터 좋아지기 시작했어요. 내가 십 년간 약(신경안정제)을 먹어왔는데 삼 개월 전부터 약도 끊었어요. 정신이 돌아온 거지. 율려학회 시작하고. 이제 겨우 제대로 돌아온 거죠.

―선생님의 시나 글을 보면 이 문명이 시각이나 머리 쪽에 지나치게 치중돼 있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이번에 『중심의 괴로움』을 다시 읽어보았더니 「줄탁( 啄)」에 나오는 다음 구절이 새삼스러워 보였습니다. “저녁 몸속에/새파란 별이 뜬다/회음부에 뜬다/가슴 복판에 배꼽에/뇌 속에서도 뜬다”. 지난해 선생님께서 기수련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미 시나 글에서 기수련을 예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몸과 만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몸이 그렇게 중요한 주제인 모양이죠?

―예. 제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90년대 들어 시와 미술 분야에서도 몸이 주요한 주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나는 신인간주의라고 하는데, 우리가 젊었을 적에 서구식 교육을 받았잖아요. 근대화 이후 우리가 배운 것이 서구식 휴머니즘이라구요. 그런데 이게 뭔가 잘못된 거라. 인간에 대한 이해가 너무 단편적이고 단면적이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갖고 있는 인간관이 부분적이고 단편적인 거라고. 그런 인간관을 갖고 사니까 자꾸 문제에 부딪치게 되고 그것이 노출되니까 문제들이 생기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시를 쓰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인간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었다, 서구식 휴머니즘은 부분적이다라는 반성이 있었던 거지요. 인간이란 것이 물질적인 것만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적인 것만도 아니라는 인식이지요. 인간은 물질적이고 육체적이면서 동시에 지적이고 과학적이며 영적이고 우주적이다, 이 세 가지 방향이 다 같이 있는 거죠. 그런 인식이 시적으로 표현된 것이 「줄탁( 啄)」 같은 겁니다. 단학에는 각각 정(精) 기(氣) 신(新)을 뜻하는 상·중·하단전이 있는데 이 세 단전이 다 충실해야 한다고. 그 가운데 상단전이 충실해야 완전한 거죠. 여기서부터 인간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것 아닐까? 물질적인 것 즉 기운, 정서적인 것 즉 지적인 것, 영적인 것 즉 우주적인 것 이 방면이 모두 충실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걸 나는 신인간주의, 또는 우주적 인간주의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몸, 특히 몸을 충실히 함으로써 진리를 깨닫는다, 몸으로 진리를 깨닫는 것이 단학의 기본 캐치프레이즈예요. 그래서 기수련부터 한다고.

―단학은 오래 전부터 있어온 것으로 아는데 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 까?

전부터도 단전 호흡을 하기는 해야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못 했죠. 동학은 수련은 안 하고 머리로만 했어요. 이래서는 안 되겠다 하고는 새로 시작하려고 했는데 그만 아파버렸죠. 그런데 단학을 해보니까 단학이 동학의 현대적 부활이라.

―매우 중요한 언급으로 보입니다.

최수운, 최해월, 강증산 이후는 단학이에요. 그래서 원시반본한 거라. 환인, 환웅, 단군의 삼신오행 사상과 천부경에 근거를 두고 신선도, 풍류도를 현대에 부활시킨 거죠. 심신 수련법이 여기서부터 나온 거라고. 삼일신고에서. 그러니까 나로서는 무슨 단절이 아니라 죽 연속해서 발전해온 것이 되죠.(웃음)

―수운, 해월, 증산을 단학으로 보시는 겁니까?

결론은 그렇게 나지요. 강증산이 무악산 밑 구리골에 광제국이라는 약굴을 냈는데 그 방에 가보면 벽 양쪽에 최수운 신위와 강증산 신위를 놓고 그 가운데 단군 신위를 붙여놓았어요. 강증산은 원시반본이라는 얘기를 분명히 했다고. 그런데 단군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나오지 않아요. 단학에서는 단군이 본격적으로 나와요. 2천 년 전 고조선의 마지막 단군, 즉 고열가 단군이 세상이 험하고 악하다며 수도장을 폐관했는데 『환단고기』 같은 걸 보면 2천년대를 약속했다는 것 아닙니까? 2천 년 후에 다시 천부의 역사를 시작하겠다고 했는데 이제 단학에서는 때가 됐다는 거죠. 홍익인간을 할 수 있는 때가 됐다고 보는 거죠. 세상에서 어떻게 보든지 간에 나로서는 연속성이 생긴 거예요.

―지난해에 미국 세도나라는 곳에 다녀오신 걸로 압니다.

아주 아름다운 데예요.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데, 거기가 야바파 인디언들의 성지예요. 붉은 바위산이 비쭉비쭉하게 여러 군데 서 있어요. 볼텍스라고 하는데, 일렉트릭파와 마그네틱파가 지구 내부에서부터 나선형으로 우주 공간으로 올라가는 힘과 우주 공간에서 나선형으로 지구 중심으로 들어가는 힘이 어우러지는 데라는 거라. 히말라야를 비롯해 지구 전체에 스물네 개의 볼텍스가 있다고 하는데, 세도나에 네 개가 모여 있다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거기를 지구의 단전이라고 합니다. 지난해 시월 이맘때쯤 한 달 반 있었고, 지난 2월에도 가서 열흘 머물렀습니다.

―세도나에서 명상만 했습니까?

수련만 했어요. 그런데 벨 락(Bell Rock)이라고 종처럼 생긴 바위에 올라갔는데 내 몸의 중앙을 수직으로 관통해 땅과 하늘로 이어지는 기운줄이 서는 것 같더라고. 거기서 한 달 반 있었는데 어떻게 된 게 그냥 누우면 잠들고, 눈 뜨면 그냥 일어나게 되더라고. 나는 몸이 좋지 않아서 잠들려면 꽤나 힘이 들었었거든. 몸이 아주 좋아져서 돌아왔어요. 그런데 돌아와서 게을러져서 수련을 안 했더니 다시 가라앉는 거야. 그래서 다시 갔는데, 거기서 누굴 만났느냐면 단학선원의 일지 이승훈 선생과 사물놀이하는 김덕수씨를 만났어요. 거기에서 율려 얘기가 처음 나왔지요. 율려운동을 하자고 해서 김덕수하고 약속을 한 거예요.

―율려운동이 그렇게 갑자기 태동된 것입니까?

4년쯤 전에 생명문화운동에 필요하다는 취지로 심정수 채희완 김영동 최태연 등이 신풍류회의를 결성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내가 몸이 아파버렸잖아요. 그것의 새로운 형태가 곧 율려문화운동으로 지속되는 거죠.

―그런데 율려라는 말이 매우 낯섭니다.

그렇죠. 동양 개념인데, 간단히 얘기하자면 우주의 조화로운 질서를 율려라고 하죠. 좁게 얘기하면 음악이죠, 우주의 음악. 그러니까 율려란 육율(六律) 육려(六呂) 12음인데, 육률이 양음이고 육려는 음음이죠. 동양이 5음, 12음 그러잖아요. 이걸 합쳐서 율려라고 하는데 『천자문』 『예기』 등 여러 군데에서 나와요. 예를 들어 『주역』에서는 우주가 태극이고 황극이라고 하잖아요? 본체를 황극이라고 하죠. 체인 황극의 용이 곧 율려예요. 그러니까 모든 게 율려지요. 12달, 사계, 8풍, 8박은 물론 우주의 별자리 이동, 사회질서에 이르기까지 전부 율려의 세계라고 하지요. 이 율려의 세계에 맞춰 음악을 짜잖아요. 그러니까 특히 음악을 율려라고 하지요. 예술은 율려입니다. 시도 율려죠.

―처음에 율려학회를 조직하고, 율려운동을 주창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러면 생명운동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생명운동과의 단절인가라는 의구심부터 들었습니다. 생명운동과 율려운동 사이에는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

감옥에서 생명 사상의 중요성을 깨닫고 나와서 단순한 변혁운동에서부터 생명운동으로 입장을 바꿔서 줄곧 해왔잖아요. 한살림운동, 도농직거래운동, 유기농운동, 환경운동이 거기에서 나온 거죠. 사람들이 마음으로부터 살아 있는 세계에 대한 인식, 무기물까지도 살아 있는 것으로 느끼는 그런 인식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문화운동이 중요하겠다 싶어 생명문화운동을 펼치기 위해 신풍류회의를 시작했던 겁니다. 그런데 내가 아픈 바람에 그게 안 되어버렸어요. 그런데 문화운동의 필요성은 늘 있어왔고, 또 내가 생명운동이라는 것의 근본을 짚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지엽적이더라고. 보다 근본을 짚어야 하지 않느냐, 그러면 그것은 무엇일까 했을 때 율려라는 말이 나온 거죠. 내가 구태여 율려라는 말을 중심에 놓는 이유가, 동양에서 『예기』 같은 데 보면, 나라가 망하려고 하면 음악과 예술이 병든다고 하죠. 정치가 문란하고 경제의 빈부 격차가 심하고 사회적으로 무질서해집니다. 인간이 거칠어지고 폭력적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변혁을 하려면 우주의 변화를 인식하고, 그 우주의 변화 한가운데서 황종음이라는 중심음을 찾아야 합니다. 중심음을 중심으로 해서 새로운 음악을 느껴야 한다고. 그게 율려죠. 율려에 맞게 음악을 만들고, 그 음악에 터를 두고 예를 만들고, 그 예학에 기초해 정치를 새롭게 시작한다, 동양에서는 그렇게 이해해왔단 말이에요. 문화가, 최초의 음악과 문화가 정치에 선행하는 거라. 우주와 인간의 마음의 관계를 밝히고 그것을 음악과 예술문화로 표현하고 여기에서 도덕을 창출하고 정치와 사회제도를 혁파하자, 이게 동양 세계라. 그러면 동양적인 정치활동, 동양적인 우주관에 기초해서 문화운동을 새로 이해해야 하지 않느냐는 거죠.

―소위 IMF 시대를 맞아 우리 사회가 극도의 정신적 혼란과 패배주의로 빠져들고 있는데 어떻게 보십니까?

신문을 열심히 보는데, IMF가 왔다고 하니까 이것만 이겨내면 그 다음에는 천국이 올 것 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요. IMF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얘기를 안 한다고. 세계화라는 것은 좋은 거고, 금융자본주의, 소위 돈을 가진 자들이 전 세계질서를 교란하는 현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어요. 또는 새로운 금융질서가 나와야 한다는 소리를 계속 합니다. 이렇게 보도하면서도 마치 헤지 펀드가 교란하는 세계자본주의의 이 질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여기에서 살아남으려면 무한경쟁시대의 경쟁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소리를 부끄러움 없이 하는 거예요. 어떻게 해서 경쟁력이 중요합니까? 경쟁 없이 살아야죠. 지구인들 전체가 화해롭게 협동하고 살아야지, 무기물까지도 사랑하면서 살아야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완전히 카지노 자본주의라. 사회주의의 견제력이 없어져버리니까 자본주의가 초창기 자본주의처럼 아주 난폭한 형태로 전 세계에 군림하고 있다고. 특히 아시아 지역에 금융 위기가 오면서 우리는 IMF 체제로 들어갔는데 우리의 경우에는 더 심각하죠. 아시아의 경제 위기라는 것을 통해서 아시아의 가치가 몰락했다느니 하면서. 사실은 그게 아니에요. 미국식 난폭한 금융자본주의, 헤지 펀드들, 핫머니들이 판을 치면서 이렇게 된 건데 어떻게 보면 무질서한 거지. 이런 세계에 살면서 지구는 병들어가고, 보세요, 엘니뇨니, 오존층 파괴니 환경 오염이라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고, 환경 호르몬이니 해서 생명 자체가 위기에 부딪쳐 있단 말예요. 그리고 문화를 보세요. 서구의 문화도 아니고 완전히 미국식 문화가, 자본주의 상품문화가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헐리우드 영화, 폭력, 섹스, 미국식 록들, 청년문화들 이런 것들이 우리들의 감각적인 생활 전부를 지배하고 있다고. 그러니까 내가 보기에는 이것은 그냥 세기말이 아니라 문명 말기라고. 서양 문명이 기울고 있는 거죠.

―이 문명 말기가 바로 율려문화운동의 토양이겠습니다.

그렇죠. 그렇다면 새로운 시작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 새로운 시작을 어디서 할 것이냐? 우주와 인간의 마음이 완전히 멀어져버렸어요. 아까 제가 얘기했지만 서양식 휴머니즘이 한계에 부딪쳤다는 것 아닙니까? 서양식 휴머니즘은 자연과 인간을 대립적인 관계로 보는 거예요. 자연을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고, 훈련시키고 복속시켜야 할 대상으로만 봐왔어요. 그 결과가 이렇게 된 거죠. 그렇다면 자연과 우주와 인간의 관계를 다시 살펴야 할 것 아니냐? 특히 인간의 마음, 영적인 측면과 우주의 변화를 다시 살펴보기 위해서도 율려가 필요한 것 아니냐? 거기에서부터 음악, 예술로 발전하고, 새로 나타난 문화에 의해서 새로운 사회이론, 사회 정치 경제 도구가 나타날 때 동양, 동북아시아로부터 새로운 문화운동이 시작돼 금융자본주의의 폐해, 문명 말기에 처한 세계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내놓아야 할 것이 아닌가, 이 과정에서 민족 통일의 바른 길도 찾고, 우리들 생활도 건설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그런데 정보지식사회가 온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새로운 문명이 오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신문들 가만 보면, 인터넷 페이지 같은 것을 보고 굉장히 들떠가지고 마치 컴퓨터에만 달라붙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처럼 들띄운다고. 이건 장사꾼들이 하는 것이거든. 그런데 그것 가지고 무슨 새로운 문명이 옵니까? 그건 하드웨어에 불과해요. 그것을 채울 수 있는 소프트웨어가 갈수록 문제가 됩니다. 어떤 문화, 어떤 철학과 예술과 정신적인 지향이 있어서 새로운 삶을 개척할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하지, 그 과정에서 컴퓨터든 인터넷이든 그 수단이 무슨 새로운 삶을 가져오겠어요?

―동북아시아가 미래를 이끌 것이란 지적은 4년 전 선생님께서 구상하셨던 동북아 생명운동을 비롯해 그 동안 여기저기서 자주 나온 걸로 압니다.

세도나 같은 데 들어와서 명상하는 미국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얘기한다고. 아시아적 심성이 아니면 세계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거야. 물론 거기에도 과장이 있겠지. 인도가 다르고 한국과 일본이 다른데, 내가 보기에는 우리가 그 사람들보다 종합문명이라. 토인비나 인지학교를 세운 신비주의자 루돌프 슈타이너도 동아시아로부터 새로운 삶의 흐름이 나올 것이라고 예언하고들 있거든요. 일본의 타카하시 이하오라고, 루돌프 슈타이너를 공부하고 온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 얘기를 들어보면, 그 사람이 조선사 를 공부하면서 놀랐다는 거예요. 그 사람이 보기에 성배 민족이 있다는 거라. 로마시대에는 이스라엘 민족이었죠. 그런데 현대에는 새로운 성배 민족이 동아시아에서 나온다는 거예요. 이 민족은 굉장히 영적인 민족이지만 오래 고난을 받고 그 고난 속에서 잉태된, 새 세계에 대한 꿈을 가진 민족이라는 거죠.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까, 일본 민족은 아니라는 거야. 일본 민족은 침략을 했잖아요. 그런데 조선사를 읽다보니까, 동학을 읽다보니까 ‘아, 이 민족이다’ 이렇게 됐다는 거야. 타카하시 이하오가 한국에도 몇 번 들어왔어요. 그때 만났는데 최수운, 강증산에 대해서 얘기를 많이 해요.

―4년 전 『틈』과 『생명과 자치』에 담겨졌던 중요한 화두들, 그러니까 공경, 틈, 그늘, 시장의 성화 같은 개념들을 율려운동이 다 끌어안는 것입니까?

그렇죠. 율려운동이 결국 어디로 돌아가느냐 하면, 내가 너무 앞질러 얘기하는 건 이상하지만, 율려를 통해 내가 찾으려는 것은 전환시대의 중심음이라. 12음 가운데 황종이라고 있죠. 황종을 중심음이라고 하는데, 시대마다 중심음이 다르다고 해요. 동양에서는 왕조가 변하면 중심음을 새로 찾아 거기에 따라 음악을 혁파하고 제도를 혁파하는 거예요. 그러면 오늘날의 중심음은 뭐냐? 그것이 442메가헤르츠다, 이렇게 어거지로 서양의 음악처럼 중심음을 정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고. 우주와 인간의 관계를 깊이 따져봐야 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음악의 중심음이란 척도, 즉 황종척이 동양인의 척도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날의 황종척은 인간의 마음에서 옵니다. 그걸 찾기 위해서는 깊은 명상이 필요하고 내면으로의 여행이 필요한데 그건 수양과 관련이 있어요. 그건 여러 가지 문제가 나오겠지만 하여튼 내가 보기에 율려의 문제는 어디에 연관되느냐면, 아까 내가 처음에 얘기했던 신인간주의적 우주인식과 문제가 되는 거죠.

―황종척을 중심으로 한 신인간주의의 세계는 과연 어떤 세계인가요?

예를 들어 우리가 신인간주의적인 사회경제제도를 건설한다고 할 때 과도한 권력이 집중된 중앙정부보다는 분산된 지방정부부터 강화시키고, 지방과 지방 사이에 보다 원활한 무역이나 경제적인 상호 관계 같은 것을 건설해나가는 방향으로 세계화의 실제 내용을 바꿔나갈 필요가 있어요. 지금과 같은 국민국가, 민족국가를 가지고는 진정한 의미의 세계화가 잘 안 될 거라고 봅니다. 그렇다면(생명운동에서 논의한 바 있는) 지방자치 문제라든가, 시장의 성화 문제도 그때 다시 살아나지 않겠느냐? 시장이라는 것은 소위 이념이 생기기 이전부터 있었던 거고, 제도보다도 수명이 깁니다. 가족과 비슷하다고. 그렇다면 인류 역사에서 시장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는 거죠. 사회주의자들이 너무 성급했어요. 그러니까 시장은 그대로 두되 지금과 같은 금융자본주의적 시장이 아니라 인간다운 품성을 보장해주는, 그리고 아까 얘기한 신인간주의적인 우주적 인간성, 영적인 인간성을 보장해주고, 착취와 빈곤,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영적인 완성을 보장해주는 사회로 갈 수 있도록 거룩한 시장이 되어야 한다는 거죠.

―앞에서도 강조했지만 생명운동과 율려운동은 단절이 아니군요.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동식물뿐만 아니라 무기물까지도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 이런 인식이 필요할 것 같아요. 전에도 그런 얘기를 했는데, 우주만물 삼라만상의 해방과 구원, 해방과 완성을 위해서 인간이 아주 성숙한 책임을 갖는다는 거죠. 그렇게 해서 과학의 발전을 진정한 해방과 완성을 위해 사용하는, 세계적 차원의 수준 높은 진보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지금 과학은 발전되어 있지만 그것을 운영하는 주체들이 아주 낡은 휴머니즘과 자국 이기주의, 편협한 인간관을 가지고 거대한 과학기술을 운용하기 때문에 아주 유치하다고. 우주식민지를 생각한다는 식이지. 지식, 정보, 과학기술은 굉장히 발전했는데도 불구하고 17세기의 휴머니즘에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간 소수의 인간이 그걸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한계가 분명하다는 거예요. 일본 만화나 미국 영화를 가만히 보면 날마다 우주전쟁을 얘기하는데, 정의가 악을 이긴다는 식이라고. 우주에서 서부극이 횡행하는 거야. 얼마나 빈약한 내용이에요? 우주를 여행할 수 있는 과학기술이 발전한다면 인간의 정신도 그만큼 깊어지고 넓어져야죠. 인간의식이 초의식, 무의식까지 내려가야죠. 이럴 때, 내가 얘기한 바 있는 우리의 풍류 사상, 신선도가 갖고 있는 소위 우주적 휴머니즘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범재신관(汎在神觀)이 필요합니다. 일신도 아니고 범신도 아니고, 일신이면서 범신적인 것. 신이 어디 하늘 같은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 내부에 있다는 거죠. 여러 개의 신이 아니라 하나의 신이 있는 거죠. 신성이 인간 안에, 모든 삼라만상 안에 신이 다 있는 거지. 무기물에 마음이 있다는 얘기가 바로 이 얘깁니다. 범재신관을 가지고 있을 때에만 우주적 휴머니즘이 가능한 거라.

―율려와 문학은 어떤 관련을 갖는 것입니까?

그럼 이제부터 문학 얘기로 들어가죠. 그런데 범재신관과 우주적 휴머니즘이 신라의 풍류도, 신선도에 있었다고. 최치원의 『난랑비서』에 ‘포함삼교(包含三敎)하고 접화군생(接化群生)한다’고 했죠. 이 접화군생이 중요한 말이라고. 접해서 군생을 화한다, 감화시킨다는 거죠. 동학의 포접이 여기에서 나왔는데, 중요한 화두예요. 이게 생명운동이라. 오늘날 병든 지구를 걱정하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화해를 도모하고 세계화하고 국경을 넘어 휴머니즘을 새롭게 건설하는 것이 모두 접화군생이라.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이 고대의 『삼국유사』, 신라의 화랑도나 풍류도, 고구려의 조의선인(?), 이와 비슷한 것이 백제에도 있었다고 하고. 고조선에서는 이것이 신시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는데 이런 것들을 문학에서 어떻게 판단하고 파악할 것이냐? 오늘날 우리 문학이 갈 길을 잃었다면 이런 시기야말로 원시반본, 고대로 돌아가야죠. 다시 한번 풍류도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지 않느냐? 한번 생각해봐요. 우리 문단에 이상스런 걸림돌이 하나 있다고. 서정주, 김동리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를 몰라요. 김동리씨는 그렇다 치고 미당을 어떻게 봅니까? 이건 예스도 아니고 노도 아니야. 사람마다 주목하지. 그렇지만 거북살스러운 존재가 미당이라. 인정하자니 나쁜 것 같고, 인정 안 하자니 너무 재주가 있는 것 같고. 난처한 사람들입니다. 김동리씨도 똑같아요. 특히 민족문학 한다는 사람들이 미당이나 김동리에 대해서 취급하는 각도, 견해가 없어요. 그런데 이 두 사람 배후에 있는 김범부라는 사람을 잘 봐야 해요. 이 사람은 때를 잘못 만나서 그렇지, 참 천재였다고. 풍류도를 어떻게 해서든 현대화시켜보려고 애를 썼던 사람이라. 건국 초기에 국민윤리 같은 걸 보면 어떻게 해서든 화랑도, 풍류도에서 국민윤리의 기본을 파악하려고 애를 썼던 사람이에요. 동학에 대해서도 깊은 이해를 가졌던 사람이라고. 고대 풍류도의 부활이라든가, 샤머니즘에 대한 재평가, 신선도에 대한 재평가 등 아주 중요한 사람이에요. 아직 민족주의적 한계에서 못

벗어나서 그렇지만 하여튼 이 사람에 대한 연구가 필요해요.

―김범부와 미당, 김동리씨는 어떤 관계였습니까?

미당과 김동리가 김범부의 영향권에 있었던 사람이라는 거예요. 미당이 마지막까지 풍류도를 붙들고 늘어지는 것이 미당 같은 사람으로서는 굉장한 일인데 이 현상을 잘 봐야 합니다. 풍류도에 대한 현대적인 이해, 신인간적인 이해, 우주적 휴머니즘의 이해, 또는 범재신관적 이해, 과학적 인문학이라고 할까, 이런 쪽에서의 이해가 필요하다고. 이것은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인간성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죠. 물질적, 지적, 영적인 존재의 통합으로서의 인간이 신인간주의가 보는 인간입니다. 그래서 우주적 스케일을 갖고 현실적으로는 물질적인 생활을 하고 노동도 해야 하고 영적으로 명상도 해야 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말이죠. 이런 존재로서의 인간관에 기초를 두고 풍류도를 새롭게 현대화하는 노력이 문학에서 나와야 하지 않겠느냐? 이때 비로소 미당이나 김동리가 껄끄러운 존재가 아니고 제자리를 찾을 것이 아니냐?(웃음) 그러니까 김범부의 노력이 이 두 사람에 와서 삐뚜로 나간 거야. 문학으로 제대로 개화한 것이 아니라 삐뚜로 나간다고. 그러니까 부끄러움이 없잖아요. 이형, 서정주씨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시는 좋죠.

시는 좋은데 자기 존재에 대한 부끄러움이 없죠. 왜 그런지 아세요? 김범부 같은 천재가 공산주의를 우습게 봤거든. 자본주의도 우습게 봤다고. 그 사람은 풍류도 이후에 새로운 민족국가를 구상하고 있었다고. 그러니까 자기들은 그런 생각으로 일관되어 있다고 생각한 거라. 그러니까 아주 떳떳해. 자기가 일제시대 때 잘못한 것도 그저 말로만 잘못했다고 하는 거지, 그렇게 가슴 아픈 것이 없는 거야. 일면의 정당성이 있는 거죠. 그걸 잘 봐야 해요. 미당은 한동안 서라벌 하늘 같은 데 빠졌었죠? 그리고 불교에 빠졌다가 다시 나와서 풍류도로 돌아가는데 미당 같은 사람에게 독점시켜선 안 된다고. 『삼국유사』를 가만히 들여다보세요. 인도나 불교, 그리고 중국도 어느 정도 많이 알려져 있지만 우리나라는 정말 숨겨져 있어요. 고조선 이래 풍류도나 신선도의 전통이 다시 살아난다면 굉장한 거예요. 특히 향가의 전통 같은 거. 예를 들면 김덕수 사물놀이를 가지고 미국 같은 데서도 야단이죠. 사물놀이 같은 건 아주 부분에 불과하다고. 수제천, 정읍, 동동 같은 것, 향악 계통들, 정악들 이런 걸 연주하면 불란서 같은 데서 그런다는 것 아니에요? ‘저게 사람이 하는 거냐? 저게 사람의 음악이냐?’며 놀란다는 거예요.

―우리도 백 년 전쯤에 서양음악을 들었다면 그랬지 않았을까요? 저게 사람의 음악이냐?

그런데 그러지는 않았겠죠. 왜냐하면 그때 동도서기론이 나온 걸 보면 역시 동양이 우수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동도서기론으로 나눌 게 아니라 둘은 같은 거라고 봐야 합니다. 우리나라, 동북아시아로부터 새로운 운동이 일어나지만 그것이 서양을 배제한다기보다 서양의 생태주의 사상, 페미니즘, 스피노자의 철학, 성 프란치스코의 영적인 전통들, 이런 것들과는 결합을 해야죠. 서양에도 정신주의나 우주론, 영적인 전통이 있으니까. 이제 봅시다. 내가 보기에 녹색당이 구라파에서 그 동안 상당히 저조했는데 중도 좌파와 녹색당이 연정하면서 구라파에 새로운 공기가 나타날 것 같아요. 영적이면서 우주적인 새로운 문화가 현실적으로 나오지 않겠는가? 우리가 하려고 하는 새로운 풍류, 새로운 신인간주의 운동, 율려운동 같은 것도 우리가 잘 표현하고 잘 해나간다면 서양의 새로운 움직임과 손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것이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도는 이쪽이고 기는 서양쪽이다라고 꼭 얘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내년 봄부터는 시를 쓰게 될 것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율려와 관련된, 구체적으로 풍류도, 신선도, 중심음 등과 관련된 시를 쓰는 것입니까?

내가 지금 시는 안 쓰는데 예감이 강해요. 예를 들면 밤에 자기 전에 의식이 갑자기 확장되곤 하는데 아직은 참고 있어요. 계속 공부하죠. 내년부터 다시 쓰면 『중심의 괴로움』 중후반과 비슷한 시작이 될 것 같아요. 내용은 많이 달라지겠지만.

―우리 전통음악과 문학과의 관련은 어떻습니까?

우리나라 국악에서 거문고 같은 악기는 단순한 소리를 내는 악기가 아니라 하늘과 우주의 변화를 알려주는 신기(神器)라고 보죠. 그런 점에서 볼 때 소금(素琴)이라고도 하는 무현금을 최고로 치죠. 그러니까 소리를 내다가 딱 끊겨. 아쟁도 그렇고. 소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소리 사이의 침묵으로 본다고. 그런데 서양 음악은 침묵을 넘기지 못한다고. 그게 큰 차이점이야. 중국은 내가 보기에는 서양 음악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우리 나라 음악에는 침묵이 많다고. 무현금 같은 걸 문학에서 생각해봐야 하지 않느냐? 지문무자(至文無字)라고, 지극한 글은 문자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래서 풍류, 신인간주의, 우주적 휴머니즘, 범재신관, 이런 것들을 재평가하는 것이 문학에서 나와야 합니다. 그러나 우선 언어관 같은 것도 새롭게 정립되어야 합니다. 이미지, 정보들을 기호화하는 것은 곤란하죠.

―90년대가 다 저물고 있지만, 90년대 문학은 80년대에 비해 뚜렷한 흐름을 형성하지 못하고, 저마다 암중모색의 기간을 통과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즘 문학을 어떻게 보십니까?

기형도 얘기를 좀 하고 싶어요. 기형도 이후 죽음에 대한 집착, 세기말적 분위기, 이미지, 화학적 순수 같은 것에 대한 동경 등이 나타나는데 문학뿐만 아니라 청소년 문화, 록, 헤비메탈 이런 데서도 나타나더라고. 이와 반대로 생태시, 환경시 등도 다 아직은 설익은 것들이야. 이 두 흐름이 우주와 인간의 합일, 자연과 인간 간의 근본적인 합일을 통해 신선 사상이나 풍류도, 신인간주의를 회복했을 때 새로운 창조의 문화를 꽃피울 수 있을 거예요. 기형도가 꿈은 꿨어요. 자연과의 통로가 뚫리기를 기대하는데 제대로 가질 못했죠. 기형도의 꿈을 세기말적 현상이나 해체 쪽으로 끌고가지 말고 새로운 대안을 꿈꿔야 합니다. 세상이 해체된다고 해서 그것을 반영만 할 것이 아니에요. 삶은 건설해야지. 나는 술도 끊고 담배도 끊었다고. 내가 책을 읽지 않고 수련을 하지 않고 새로운 생활에 대한 희망을 안 가지면 내 삶이 재미가 하나도 없는 거야. 이미지 과잉 시대의 결론은 허무밖에 없어요.

―선생님 말씀을 듣다보니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나 서태지의 <발해를 꿈꾸며> 등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는 민족주의의 역기능을 지적하는 시각도 적지 않습니다.

김진명의 소설이나 서태지의 음반이 젊은이들 사이에 우상이 되고 있는데, 우리가 생각할 것이 하나 있어요. 거품경제 시대 이후 이상한 의사 제국주의가 나타나고 있어요. 우리가 뿌리를 찾는 것과 의사 제국주의가 이상하게 얽혀 있어요. 이것이 거품경제의 몰락과 함께 없어진다 하더라도 뿌리를 찾는, 조선과 한민족의 근원을 찾을 수 있는 맥이 무산되어서는 안 돼요. 민족주의 비판과 뿌리찾기를 구별해야 합니다. 내가 보기에는 민족적이면서도 민족적인 것이 아니죠.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홍익인간은 이루어야 하는데 홍익인간이란 두 가지 측면이 있다는 겁니다. 인간을 두루 이롭게 하는 일과, 두루 이롭게 하는 인간, 즉 인간으로서의 개인이라는 두 가지 기준이 있다고. 국가를 창건하는 목적을 홍익인간 이화세계에 두는 민족은 없어요. 인간을 두루 이롭게 한다는 말은, 인간 안에 동식물, 무기물까지 다 포함되는 거니까 우주생명을 전부 접화군생처럼 이롭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국가는 세워진 적이 없죠. 이런 목표를 가지고 세워진 민족이고 국가이기 때문에 우리 민족은 이미 민족을 넘어가는 거죠. 우리는 아직은 민족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어요. 통일을 위해서. 예를 들면 지금 이북에서 단군능을 조성하고, 단군 조선의 실체성을 인정하고 역사에 있어서 단군의 위치를 확정하는 노력이 있는 데 비해 남한은 약하다고. 그건 오히려 그쪽에서 배워야 해요. 아니, 우리는 한걸음 더 나가야 해. 환인, 환웅까지도 다 인정해서 아시아 전체를 휩쓸었던 이 문명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해요.

―최근 박노해 시인이 감옥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박노해 시인이 가는 길을 김지하 시인의 길과 견주곤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건 날 따라오는 게 아니라 도스토예프스키를 따라가는 거지.(웃음) 『죽음의 집의 기록』을 보면 도스토예프스키도 감옥에서 변했으니까. 그런데 박노해씨가 어떻게 변할지 나는 잘 모르겠는데, 누구한테 들었더니 그 사람도 단학에 관심이 있다고 하데요. 하여튼간에 뭔가 새롭게 출발해야죠. 전에는 내가 일종의 혁명적 농업주의자였거든. 학생 때 내가 그랬어요. 그러니까 그때 내가 중시한 것은 마르크시즘의 아시아적 경제 과정이죠. 모택동이라든가 이북은 서양 사회주의와는 상당히 많이 다르죠. 그런 것처럼 이제 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20세기는 노동자, 농민, 소시민, 시민, 이런 대중이 압도하는 시대거든. 그런데 과연 이것이 이상적인 세계인가? 이건 생각을 좀 해봐야 해요. 그 뒤의 사회주의를 보세요. 처음에는 군사집단이 들어서고 나중에는 그것이 해이해지면서 지식인 그룹이 다시 차지하거든. 이북은 지금 군사집단이 지배하죠. 그런데 언젠가는 지식인들의 지배가 시작된다고. 그 다음에는 자본가의 지배가 시작될 가능성이 있어요. 그러니까 노동자의 지배가 있다가 다음에는 군인이 지배하다가, 동구라파 같은 경우를 보면, 그 다음에 자본가가 지배하는 식이에요. 그러니까 이런 지배에서 어떤 계급이 그 사회를 구제하는 것이 아니에요. 초계급적인 새로운 지배가 나와야 합니다. 사카하르 같은 사람은 이렇게 얘기하는데 초계급적인 영성적인 혁명가, 즉 자기 내부에 영적이면서도 지적인 수련을 받은 사람들은 부패와 손을 안 잡아요. 자기 내부에서 행복해하는 사람은 절대로 부패와 손을 안 잡아. 휴머니티에 대한 사명감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자기 내부에 신성과 우주를 가진 사람들은 절대로 부패하지 않는다고. 이런 사람들이 사람을 사랑하고 노동자를 사랑하고 이렇게 해서 개혁에 참가하고 교육을 하면서 순환하는 계급의 지배를 빠르게 순환시켜서 초기에 장점이 나타났던 시기에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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