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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락 2002-06-17 23:26:02, Hit : 1541
Subject   짧은 이야기들 (1)

1. 개미

비가 오는 토요일 저녁, 오랜만의 연휴를 맞은 T씨는 앞으로 이틀 동안 무엇을 해야 좋을까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내일은 일요일이고, 다음날은 어린이날이었다. 결혼도 안 했고 아이도 없는 T씨는 그 이틀동안 딱히 할 일 없었다. 연락을 할만한 친구 녀석은 네 살짜리 아이가 있었고, 그렇다고 불러내어 만날만한 여자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불도 깔지 않은 방바닥에 멍하니 누워 T씨는 다섯 번 눈을 깜빡거리고 두 번 하품을 했다. 무언가 재미있는 일이 없을까 생각 해보았지만, 할 수 있는 일 중에서는 마음이 끌리는 일이 없었다. 과도한 업무로 인해서 TV조차 볼 시간이 없었던 T씨는 그 덕분에 자신의 고유성을 나름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불쌍한 T씨는 남들이 재미있어하는 일을 별로 재미있어하지 않게 되어버렸다. 이를테면, 따분한 노총각답게 TV라도 볼까 싶어도, 화면에는 온통 T씨의 미적 취향과는 동떨어진 여자들만 등장했기 때문에 금방 TV를 꺼버리게 되는 것이었다. T씨는 다시 한 번 하품을 하고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삼십 분이 지난 후 T씨는 앞으로 이틀 동안 꼼짝 않고 누워서 잠을 자기로 결심했다. T씨는 미소를 지었다. 일 때문에 피곤이 많이 쌓여있기도 했다.

비가 오는 일요일 아침. T씨는 자고 있었다. 비가 오는 일요일 오전. T씨는 자고 있었다. 비가 오는 일요일 오후. 잠자던 T씨는 잠시 눈을 떠서 시간을 확인하고 다시 잠이 들었다. 여전히 비가 오는 일요일 저녁. T씨는 이불을 끌어안고 자고 있었다. 아직도 비가 오는 일요일 밤. 몇 번 뒤척거리던 T씨는 어렴풋이 눈을 떴다. 머리맡의 핸드폰을 더듬어 시간을 확인한 T씨는 다시 잠을 청하며 왼쪽으로 몸을 돌려 누웠다. 그 때 어둠 저쪽에 무언가 어슴푸레한 형태가 희미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사람처럼 보이는 어두운 그림자가 누워있었고, 조그만 점들이 늘어서서 그 그림자를 뒤덮고 있었다. 몇 번 눈을 깜빡이던 T씨는 그 점들이 개미의 무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늘어선 개미들은 사람으로 보이는 그림자 덩어리를 조금씩 갉아서 집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T씨는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혼자 사는 집이었고 들어올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그 그림자가 궁금하지 않았다. 꿈이려니- 하고 T씨는 생각했다.

비가 오는 월요일 새벽. T씨는 자고 있었다. 비가 오는 월요일 아침. T씨는 아직도 자고 있었다. 비가 오는 월요일 오후. 허리가 아픈 T씨는 자세를 바꾸어 누워 여전히 자고 있었다. 비가 오늘 월요일 저녁. 잠자던 T씨는 손등이 따끔거리는 느낌에 무거운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손을 들어 바라보니 따끔거리던 오른쪽 손등이 사라지고 없었다. 조금 더 바라보고 있으니, 팔뚝부터 손목까지를 뒤덮고 있는 개미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다. 방바닥에 가득 줄을 선 개미들이 T씨의 손을 열심히 갉아서 가져가고 있었다. T씨는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꿈 속의 꿈이려니 - 하고 T씨는 생각했다.

화요일 새벽. 비가 그친 창문으로 환한 햇살이 들어왔다. T씨는 햇빛에 눈을 비비며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틀을 잘 수 있었다는 사실이 행복한 T씨는 몸을 틀어 기지개 켰다. 너무 오래 잠을 잔 탓인지 허리가 조금 아픈 것 같았다. 고개를 들어 시간을 확인한 T씨는 이불을 걷고 일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이불을 걷고 나니 허리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한숨을 한 번 내쉰 T씨는 다시 잠을 청했다. 꿈을 너무 많이 꾸는군-하고 T씨는 생각했다.

화요일 아침. 자리에서 일어난 T씨는 자기의 몸이 여전히 모두 붙어있는 것을 확인했다. 웃음을 지으며 일어나려던 T씨는 방바닥을 덮고 있는 검은 점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T씨는 안경을 찾아 쓰고 점들을 다시 바라보았다. 수많은 작고 검은 개미들이 T씨를 둘러쌓고 줄을 지어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이불을 들춰보니 깔고 덮은 이불에도 수많은 검은 점들이 수놓아져 있었다. 처음 보는 개미떼였지만, T씨는 별로 당황하지 않았다. 다만, 과자 부스러기 같은 것을 흘린 것도 아닌데, 대체 이 개미들이 왜 이렇게 모여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T씨는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나 주의 깊게 개미들을 바라보았다. 개미들은 무언가를 열심히 운반하고 있었다. 개미들이 운반하는 물체를 바라보던 T씨의 눈이 점점 커졌다. 그들이 운반하고 있는 것은 죽은 개미의 시체였다. T씨는 깔고 있던 이불을 들춰보았다. 눌려 죽은 개미들이 까맣게 점으로 남아 있었고, 살아있는 수많은 개미들이 그것들을 과자 부스러기처럼 운반해가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 몰려들었다가 스스로 먹을 것이 되어버린 개미의 시체가 윤기 나게 반들거렸다.
창밖에는 찬란한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T씨는 다시 한 번 자신의 몸을 바라보았다. T씨는 당황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눈에 비춰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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