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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돕헤드 2004-04-10 00:49:29, Hit : 1023
Subject   민주주의를 생각한다

평화인권연대에서 발행하는 월간 '평화연대' 2004년 4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http://peace.jinbo.net/sosicji/sosicji.php 에서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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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생각한다
손상열(평화인권연대 활동가, alterite at jinbo.net)


지난 몇 주 동안 탄핵반대 촛불집회 소식이 연일 언론에 오르내렸지만, 나는 지난 주말이
되어서야 그 장소에 가볼 수 있었다. 물론 그 장소를 찾게 된 이유가 “탄핵반대,
민주수호”라는 외침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나로서는 이번 국면이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의 상식적 분노가 폭발한 것으로 생각되었고,  “총선에서 심판하자”라고
답변보다는 대의제 민주주의의 허구성을 드러내고 더 많은 민주주의를 위해 논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국민발의제나 국회의원 소환권처럼 잊혀진 우리의
정치적 권리를 선전(?)하려는 요량으로 보잘 것 없지만 선전판이라도 몇 개 만들어 그
장소를 찾은 건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빵빵한 스피커에서 어떤 이야기가 흘러나오든
간에, 적어도 촛불집회가 훌륭한 민주주의의 학교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던 것이다.


그 거리를 배회한지 한 두시간 쯤 되었을까? 마음이 점점 불편해지고 있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질서정연하게 앉힐 요량으로 바둑판 모양으로 이리저리 선을 그어댄
것도 그렇고, 집회에 참석한 사람이라면 의례히 자신의 통제에 따라 하는 것처럼 소리를
질러대는 ‘질서유지 자원봉사자’들의 모습에 점점 짜증도 나기 시작했다. 조금 뒤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리고 있는 최옥란 열사 추모제를 찾은 뒤로는 촛불집회에 대해
느꼈던 불편함은 이내 의구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광화문에서 외치는 함성이
고스란히 들리고 있던 그곳에는 불과 50여명이 모여앉아 참으로 조촐한 추모행사를
벌이고 있었다. 추모행사를 강제해산시키겠다는 경찰의 협박성 경고를 들으면서, 변변한
무대도 없이, 최옥란 열사의 뜻을 기리며 장애인의 인권을 이야기하고 있던 그 장면은
적어도 나에겐 너무나 서글펐다. 내가 느꼈던 의구심이란 도대체 ‘민주주의’라는 게
무엇인가라는 질문이었던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해 한마디로 말해보라고 누군가가 시킨다면, 나는 거침없이 민주주의란
‘인민 스스로 자기 자신을 대표한다’는 사상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과거에
교과서에서 보아왔던 “인민에 대한, 인민 스스로의 통치”라는 말도 어느 정도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이념이 특정한 제도를 필요로 하고, 민주주의라는
이념 또한 특정한 제도 속에서 물질화되었을진대, 이 과정에서 현실적으로 존재한
민주제에 여러 제한이 있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선 “스스로 대표”해야
하는 “인민”을 누구로 볼 것인지, 혹은 “인민에 대한”이라는 말이 전제하는 인민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두고서 민주제는 내부적으로 여러 형태의 배제를 만들어왔던 것
같다. 자본주의적 소유권을 인정한 민주제는 노동자를 인민의 범위에서 끊임없이
배제해왔다. 민족주의와 결합된 민주제는 타민족을 ‘인민’의 범위에서 배제해 왔다.
이주노동자, 여성, 여러 소수자들 또한 ‘인민’의 범위에서 끊임없이 삭제되어왔다.
나는 그러므로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이런 배제에 저항하는 것에 다름 아니고, 민족,
국가, 자본소유자, 남성등으로 끊임없이 축소되는 ‘인민’의 경계를 전 인류로 확장하는
국제주의를 본질로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가상적으로 구성된 ‘인민’을 대상으로 구성된 민주제들은 그 안에서도 지적차이의
재생산이라는 내부적인 분할을 바탕으로 기능해왔다. 현대의 가장 대표적인 민주제들인
자본주의 국가들의 대의제나 사회주의국가들의 직업▪직능별 대표제나 통치성을
발휘하는 가장 핵심적인 기능은 바로 엘리트와 대중을 분할하는 지적차이의 재생산에
있었던 것이다. 예컨대, 대의제는 “복잡화된 사회문제들을 해결하고 운영하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이 필요하며, 대중은 그것에 익숙할 수 없다”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한민당 당수들이 “탄핵소추는 옳바랐는 데, 민심이 그것을 알아주지
못한다”고 한탄하고 있을 때, 홍사덕이 “촛불집회에 모이는 사람들은 건전한 직장을
가지고 있지 못할 것”이라고 이야기할 때, “헌법재판소의 판관들에게 탄핵에 대한
최종심판권한을 위임해야한다”고 이야기할 때, 나는 그 근저에 정치에 대한 대중의
권리를 박탈하는 치명적인 논리가 흐르고 있음에 분노한다. 그러므로 나는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다른 한편으로 그 핵심에 엘리트와 대중의 분할이라는 구도에 대한 근본적인
공격을 담아야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장애인들의 추모제가 열리고 있던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저 멀리 광화문 촛불집회를
보면서 느꼈던 의구심은 이 같은 민주주의의 핵심적 가치들과 반하는 “배제”의 역설
때문이었을 것이다. 수 만 명이 모여 민주수호를 외치는 바로 그 곳에서 배제되어 있는
장애인들이라는 역설, 질서를 명분으로 성숙한 시민과 그렇지 못한 시민의 경계를
끊임없이 나누고 통제했던 이른바 ‘자원봉사자’들의 모습... 한마디로 촛불집회‘식’
민주주의가 내내 불편했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모든 사회는 사회성원의 실질적 참여라기보다는, 가상적 참여를
통해서 자신을 그 사회의 성원으로 규정하는 가상적 공동체를 구성해왔다. 토템미즘
시대는 씨족애라는 정체성을 바탕으로 씨족공동체라는 가상적 공동체를 구성했다.
자연신들의 지배를 사회원리로 받아들인 샤머니즘시대는 부족사회라는 가상적 공동체를
구성했다. 인권혁명이 탄생시킨 소유권과 노동권 같은 인간적 이익에 대한 관심은
자본주의적 민주제와 사회주의적 민주제라는 가상적 공동체의 구성으로 나아갔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적 민주제와 사회주의적 민주제의 구성원리로서 대의제에 도전한다는
것은 새로운 문명을 예비하는 실천의 성격 또한 갖는 것이 아닐까? 지나친 비약일수도
있지만, 나는 이런 이유 때문에 민주주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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