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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ope 2011-01-03 01:39:30, Hit : 1178
Subject   안지환 병역거부 선언문 - 아, 오날 일인의 아나키스트로서 국가의 역(役)에 거부한다.
아, 오날 일인의 아나키스트로서 국가의 역(役)에 거부한다.

인간은 그 누군가 자신이 되고자 하는 이가 되고자 하는 순간부터 그 존재가 된다. 나는 어린 날에부터 아나키스트가 되고자 하였다. 이는 서양의 신 지식에 감흥하여 그를 따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나름의 선을 찾아가던 중에 내가 임의로 결론한 많은 것들이 선구의 아나키스트들이 주장한 것들과 같은 맥락에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으로, 어느 누군가에게서 당신의 이상이 무엇입니까, 하는 질문에 편히 답하기 위해 '아나키즘'이라는 단어의 허울을 빌어 쓰고 있는 것이다. 단어가 갖고 있는 설명과 지시를 가지고 내가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여러 가지 것들을 다 전달할 수 없음에도, 굳이 자신을 아나키스트로 소개하는 이유는, 발언하는 것의 책임으로부터 도망하지 않기 위함이다. 명백히 이야기 하자면, 그렇다, 내가 아나키스트라고 자신을 명하는 일은 우스운 것이 사실이다. 꼴도 우습기로서니, 아나키스트란 도대체 무엇인가, 당신이 주장하는 아나키즘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시작하게 되자면 이야기는 길어지고 또 기다 아니다 결론지을 수도 없는 문제일 뿐이다. 그럼에도 다시 한 번, 자신이 아나키스트라 밝히는 것은, 눈 덮인 들판을 걷는 지금에 방향 삼을 별빛 찾는 마음에서이다.
그러니 다시 한 번, 명백히 이야기 하자면, 아는 아나키스트 이전에, 그저 일개 자유인으로서, 아니, 일개 인간으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겠다는 주장을 할 따름이다. 그에 있어 여러분과 국가의 제재가 이제부터 시작될 것이고, 싸우고 싶은 마음이 일절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의 힘에 대항해야만 하는 내가 방패삼아 내 새울 것이 아나키즘이라 할 수 있겠다.

이하 경어로 글을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여러분에게 제가 자신의 양심에 따라 병역을 거부하겠다고 선언 하는 데에 있어서, 저의 양심의 기준이란 어떤 것인지, 그 구성의 개인사적 과정과 내 양심의 진실함을 여러분께 증명할 필요는 법적으로도 도의적으로도 일체 없습니다. 이는 치기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실로 그러한 것입니다. 제가 아침에 산을 오르고, 비가 오면 바닷가에 나가보는 것, 점심께 대청에 누워 잠을 자는 것, 들에 핀 개망초를 꺾어다 방 안 화병에 꽂아놓는 것, 그러한 일들을 그 누구의 허락 없이 할 수 있어야 하는 자유와 마찬가지로, 군역을 치르지 않는 일 또한 일개인의 자유입니다. 그 자유를 제지하고자 한다면, 제지하는 측에서 그 사유를 설명해야 하는 것이 이치이지, 내 쪽에서 개망초를 좋아하게 된 사연과 개망초를 꺾으면서 느낀 기쁨과 죄책감 따위의 심경 변화와 그것을 화명에 꽂아두고 바라보는 이유 따위를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제가 이 선언을 하는 것에서 파생되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선언 이후, 지금부터 시작되는 일련의 법절차입니다. 첫째로, 양심의 선언을 하는 자에게 양심의 검증을 요구하는 것, 둘째로, 근본적으로, 국가가(아무리 좋게 이야기해도 공동체가) 개인의 자유를 침탈 하는 데에 그 개인이 납득할 만큼의 충분한 논의나 교섭 따위가 없었다는 것. 이는 즉, (국가의) 폭력에 대한 부분입니다.





[1] (현재의)자본주의 아래에서 법체제의 허구

오늘날의 이 곳, 리퍼블릭 오브 코리아 라고 하는 국가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이 국가의 법은 저를 포함한 국민 여러분 모두가 함께 지키기로 합의한 계약입니다. 공화국인 대한민국은 대의민주주의 대의제 의회민주주의 따위로 설명할 수 있는 정치 법체제를 자국의 체제라 이야기 합니다. 간략히 이 체제가 이야기 하는 바를 설명하자면,
1. 국민이 자신의 의사를 반영할 수 있는 대표자를 뽑는다,
2. 대표자가 법을 제정한다, 대표자가 법을 시행하는 기관을 통솔한다.
3. 대표자가 제정하는 법은 국민이 직접 뽑음으로서 그 의사를 위임 혹은 대표하였기 때문에, 국민 전체가 제정한 것과 같은 것으로서
4. 국가의 법은 국민이 제정한 것이다. 즉, 국민 모두의 합의 계약이다.
정도로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다.
즉, 공화국에서 법이란 형식적으로는 '국가라는 공동체의 구성원 모두가, 생활에 있어 불편하게 될 일들, 상호간의 자유를 침해하게 될 일들, 따위를 대비하여 미리 공동의 약속을 해두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진실로 법은 국가의 구성원인 우리 모두가 합의한 것입니까.
타국의 사정은 안타깝지만 다음에 이야기 하도록 하고, 이 곳, 한반도의 남쪽에 위치한 인구 오천만명이 살고 있는 이 지역에는, 오늘도 여전히 계급이 존재합니다. 직업, 소득, 교육수준, 그 모든 생활의 요소들이 빡빡하게 짜여진 톱니바퀴처럼 작동하며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필시 나뉘어져 있는 계급으로 존재합니다. 재산을 화폐로 환산하고, 그 화폐를 보유하고 있는 정도로 나누어 본다면, 눈에 보이게도 계급을 갈라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국가는 차상위 계층 극빈층 따위로 그 재산에 따른 계급 분류를 하기도 하고, 기업은 학력이나 부모의 직업, 사는 곳 따위로 계급을 분류하기도 합니다. 계급은 실재합니다.
예컨대 정치가들은 두리뭉실 중산층과 서민이란 말을 쓰고 있습니다. 이는 사전적으로 잘못된 계급분류입니다. 말하자면 50ml급과 30cm급을 같은 단위인양 이야기 하는 것과 같습니다. 중산층은 중산계급의 다른 표현으로; 노동자인가 생산수단을 갖고 있는 경영자인가 하는 분류로 나뉘는 단위로; 유산계급과 무산계급의 사이에 있는 계급을 말하고, 서민이란 본디 왕이나 벼슬아치 따위를 제외한 만백성을 일컫는 말입니다. 서민을 계층에 대한 분류로 이야기 하자면, 서민과 서민이 아닌 이들로 나뉠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에 정치가들이 중산층이 서민보다 재산 보유 등의 기준에서 바로 위의 계급이라는 식으로 이야기 하는 것이라면, 이는 중산층은 모두 직함을 갖고 있는 이들, 그러니까 자기 자신들을 일컫는 것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산층(벼슬아치들)-정치가들과 기업가들(대게 무슨 연구소 이사 따위의  직함을 하나씩은 갖고 있으니까)자기 자신들과 서민(무산계급-모든 노동자들)으로 계급을 나누는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 말입니다.
정치가들은 형식적으로는 본디 서민이나 서민이 아닌 이의 범주를 넘어서서, 모든 국민이 같은 권리를 갖고 있는 국가의 구성원 일인으로, 단위별 국민이 다수결의 원칙에 의거하여 표결로 뽑는 일개 대표자일 뿐입니다. 대표자의 직함은 실제로 권력이 있으나, 그 권력은 단위의 국민들이 일시적으로 대표자에게 이양하기로 계약함으로 부여되는 권리이지, 조선조나 제정때 같은 왕정국가의 직함자에게 왕이 내려주는 절대 권력의 일부가 아니라 이 말입니다. 그런데 정치가들은 일정때 이후로 공화국이 되며 폐기해야 했을 서민과 서민 아닌 이들의 분류를 아직도 쓰고 있습니다.
예컨대 유산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중산계급과 무산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 또한 있을 수 있습니다. 이는 공화국의 법체제가 지켜주기로 한 권리입니다. 모든 국민이 자신을 대변하는 대표자를 뽑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서민을 대변하는 정당이라니, 이것은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러한 분류방식은 실제 사회의 계급 상황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실제 아직도 우리 사회는 온전한 공화국, 민주주의 국가의 형태가 아닙니다. 간접민주주의의 기본조차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상위 계급(그러니까 벼슬아치들과 이후 말할 유산계급)은 국가의 법에 의거한 권리 분배에 따르지 않고, 절대권력을 행할 수 있습니다. 하층계급 그러니까 서민은 상위 계급의 권력 행사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다양한 장치를 준비해두고 있다는 변명을 하여도 실제적으로 그들의 권력에 반 할 수 있는 힘이 없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왕정국가도 아닌 오늘날에 그들의 절대권력은 도대체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권력이고, 권력은 돈입니다. 돈이 있으면 무엇이건 살 수 있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사람들은 돈을 많이 '갖고자' 합니다.
오늘날 어떠한 이익을 이야기 할 때에, 모든 이익은 돈으로 귀결됩니다. 예쁘면 이익이다, 하는 것도 예쁘면 좋은 배우자 만날 수 있고, 좋은 배우자란 돈 잘 버는 상위 계급의 배우자를 의미하고, 남은 인생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으니 이익이다, 하는 것이고, 똑똑하면 이익이다 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똑똑하면 좋은 대학가서 좋은 직장에 갈 수 있고, 여기서 좋은 직장이란 돈 잘 버는 직장을 의미하고, 남은 인생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으니 이익이다 하는 말입니다. 국익이라는 말은 곧 외자 유치, 자본의 국내흡수를 말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좋은', '잘' 따위의 단어들은 본질적으로 그것이 함유하고 있던 수많은 의미들을 다 휘발시키고 '더 많은 자본' 의 의미로만 그 힘을 발휘합니다. 화폐의 마력이란 그만큼 대단한 것입니다.
경제학자들은 그 성향이 어떻건, 그 파가 어느 쪽이건 가장 기본적으로, 화폐가 계속해서 움직여야 제대로 된 경제 상태라는 것을 기본으로 설정합니다. 돌고 돌아 돈이라 하는 말 그대로, 돈은 계속해서 돌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화폐라는 것은 실체가 아니고 어떤 가치를 담아놓는 허울입니다. 화폐가 돈다는 것은, 말하자면 그 가치가 돈다는 의미입니다. 생명체의 혈액이 계속 순환하고, 지구의 물과 공기가 계속 순환하여 생명이 이어지듯이, 화폐가 대변하는 그 가치, 자본이라는 것은 계속 순환해야 합니다. 이는 저의 독단적 주장이 아니라 자본에 대한 모든 학자들의 기본 주장입니다. 그런데 한정되어 있는 자본을 어느 누가 축적만 하고 있으면, 응당 다른 사람들은 그만큼 가질 수 없게 됩니다. 순환이 되지 않으면  불황이 오고 공황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경제학자들은 이 상황에 대해 축적만 하고 있을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자본을 축적하는 것은 예상치 못하는 앞날에 생길 일을 위해 준비해 두는 것으로, 그 위험보다 '투자'를 통해서 후에 더 많은 자본을 획득할 수 있다면, 그 이익을 위해 갖고 있는 자본을 풀게 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자본을 축적만 하는 사람은 없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전 세계의 경제 상황을 정책으로 유지시키는 가장 기본이 되는 논리입니다. 부차적으로 생기는 현실의 문제들에 대한 지책들을 내놓을 뿐, 기본적으로 자본은 자연히 절로 잘 순환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떻습니까. 화폐란 땅이나 쌀이나 배추나 무 같은 것이 아니라 오래두어도 썩지 않고 많이 쌓아도 부피가 커지지 않습니다. 오늘날에 화폐 뒤에 0을 하나 둘 더 붙이는 일은 몇 바이트의 전산적 공간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사람은 더 이상 돈에 대해 자연스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본을 이미 갖고 있던 사람들은 그 자본을 씨자본으로 계속해서 더 많은 자본을 축적 하는 데에 혈안이 되었고, 그들이 더 많은 자본을 축적하는 만큼 시장에 남은 자본은 적어집니다.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자본은 점점 줄어만 갑니다. 불황이나 경제위기는 기본적으로 이런 상황에서 기인합니다. 이미 자본을 선점하고 있던 자본가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더 많은 자본을 축적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돈을 자연스레 흐르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많은 사례들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자본가들이 자본을 자연스럽게 순환하도록 두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들은 악의적이건 의도하지 않았건 일단은 여러 방법(불법과 합법 어떠한 식으로건 가능한 모든 방법)을 통해 굴을 파고 우물을 파서 자본을 쌓아두고자 합니다.
세계 자본의 8할을 전체 인구 중 2할의 상위계층이 갖고 있다는 식의 이야기는 이제 너무나 익숙한 이야기입니다. 자본주의는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그러나 애초에 자본주의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이러한 소유의 편중 현상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 자본주의의 근간 자체가 현실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일한 만큼 돈을 벌고, 돈을 가진 만큼 할 수 있는 일이 생기는 것이니, 만민에게 공평한 것처럼 이야기 하지만, 사실 구체적으로 따지고 들어가자면 애초에 '일한 만큼의 돈'이라는 것의 책정부터가 커다란 난관인 것입니다. 수요와 공급의 자연스러운 상호관계 속에 '일한 만큼의 돈'도 자연스레 정확히 책정될 것이라고 이야기 하지만, 현실에서 일한 만큼의 대가로 주는 보수를 책정하는 것은 사용자와 노동자 양측의 자연스러운 견제 속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대개 사용자인 자본가의 편의에 맞추어져 이루어집니다. 그는 이미 다들 주지하시다시피, 돈을 가진 것이 곧 권력이 되는 오늘날의 현실 때문입니다. 자본을 선점하고 있던 자본가들의 시초도 문제가 됩니다. 이는 공평한 선상에서 이루어진 이상적인 자본주의 체제의 시작이 아니라, 왕정에서 민주주의로 넘어오던 시기 왕권국가에서부터 기득권을 갖고 있던 이들이 대체적으로 자본을 선점한 상태로 이루어진 현실 때문이기도 합니다. 한국의 경우 많은 기득권 계층은 통상 친일계, 그러니까 황제에 충성을 다짐하던 왕권국가에서의 기득권들이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우리의 경우 독재 시기(마찬가지 왕권국가에 진배없는)를 거치며 비슷한 경우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러나 부친이 친일이니 너도 악이다 하는 식의 논리를 펴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부터 이야기 하고자 하는 자본가가 자본을 갖고 있는 것 자체가 권력이 되는 현실 그 자체가 본질적인 문제인 것입니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간접민주주의 공화정 체제 아래에서 위정자들은 본디는 단순히 우리의 대표자일 뿐입니다. 그들에게 이양된 권력은 공공의 평화를 위해 일시적으로 위임된 것에 불과합니다. 기본적으로는 같은 권리를 가진 같은 인간인 것입니다.
마찬가지, 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하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그러니까 정상적이고 건강한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자와 사용자는 동일한 권리를 가진 인간일 뿐입니다. 마치 배가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 있어서, 키를 맡는 사람이 필요하고, 노를 젓는 사람이 필요하고, 망을 보는 사람이 필요하고, 돛을 펴는 사람이 필요하고, 이 모두를 통괄하여 지시해줄 사람이 필요하듯이, 경제활동을 하는 사업체에 있어서도 각자의 역할을 맡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이들은 상하의 관계, 주종의 관계가 아니라, 맡은 역할이 다른 같은 인간일 뿐입니다. 그래야 정상인 것입니다.
우리는 '갑과 을'의 관계라는 말을 곧잘 씁니다. 갑이 주고 을이 종이라는 의미로 갑과 을의 관계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심각한 언어도단이며, 그 언어도단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우리 사회가 병적으로 기형이 되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입니다. 갑과 을은,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 천간의 순서 중 첫 번째와 두 번째 천간입니다. 천간은 십이지와 함께 육십간지를 이루는 구성요소로, 우리가 통상 임진년 병자년 하는 식의 해를 세는 단위, 그러니까 숫자를 세는 단위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1,2,3,4,5,6과 마찬가지이고, 알파벳 a,b,c,d와 마찬가지인, 약속된 순서를 표시하는 단위일 뿐입니다. 동양 철학에서 간지 하나 하나가 의미하는바와 그 신묘한 과학에 대한 부분은 차치하고, 또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가 모두 각각의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동등한 구성체라는 부분도 차치하겠습니다. 갑과 을은 단순한 표시문자일 뿐입니다. 말하자면 통상 우리가 계약서를 쓸 때에, A와 B의 관계라고도 쓸 수 있는 것을 갑과 을의 관계라고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무조건적으로 갑이 주고 을이 종이라는 의미가 아니고, 계약서의 작성에서 개별 계약 주체의 모든 이름을 다 쓰는 것이 복잡하니까 편하게 보자고 갑을병정 하는 천간의 단위를 써왔다는 것일 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계약서에는, 그러니까 민주주의 국가에서 작성되는 모든 계약서에서는 주와 종의 관계로 이루어지는 계약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재 할 수가 없습니다. 주와 종은 주인과 노예를 말하는데, 만인의 권리가 같다고 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체제가 주종의 관계를 법적으로 허락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앞서 말 했듯이, 사용자는 단지 사업체를 세우고, 그 활동의 방향을 잡아가는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일 뿐이며, 노동자는 사용자와 함께 서로의 동의할 수 있는 조건으로 계약하여 사업체에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일 뿐인 것입니다. 그것이 당연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돈을 가진 것이 잘 난 것이고, 일을 하는 사람보다 일을 시키는 사람이 위에 있다는 것이 주지된 사실인 것 마냥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민주주의공화국이라고 하는 곳에서 허용되어서는 안 될 인식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우리 모두가 이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기괴한 논리에 자의건 타의건 순응하며, 있는 게 힘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상황입니다. 모든 국민의 암묵적인 갑과 을의 계약 속에서, 실제 자본가들은 자본을 갖고 있는 만큼 자신이 권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여, 그 권력으로 수많은 범법행위들을 자행하고도 공공연히 법의 심판을 빠져나가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은 결단코 제대로 된 법치 민주주의 공화국 체제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법치 민주주의 공화국 체제가 온전히 이루어졌을 때에, 모든 평화와 평등이 찾아온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최소한 현재의 국가가 자신의 존재를 법치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바, 국가는 최소한 자신이 주장하고 있는 체제의 정확한 실현이나마 우리에게 보여줘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국가란 무엇입니까. 국가란 국민이라고 불리우는 구성원들의 공동체입니다. 결국 국가란 우리란 말인데, 우리가 국가 자신임에도 우리는 국가가 어떤 상태인지에 대해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혹은 의지가 없습니다.
자본가들은 국가(라는 이름의 출처를 알 수 없는 권력)와 함께 그 힘을 공고히 하여 '서민'을 제 맘대로 갖다 씁니다. 시뮬레이션 게임에서 우리가 신이 되거나 경영자가 되어 게임 속 인물을 들어다 어디에 앉혀놓고 일을 시키고, 잠 못 자고 일을 하게하고, 하다 죽으면 갖다 버려서 공동묘지를 만들어 행성을 꾸며보고, 다시 부활시키고, 물에 빠뜨리고, 하늘에 집어 던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는 시뮬레이션 게임의 사용자의 무한 권력에 진배없을 만큼의 거대한 권력이 주어져 있습니다. 수천억 돈을 빼돌려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비싼 차를 사고,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집을 짓습니다. 사람을 패고 도청하고 감시하고 수많은 가정을 파괴합니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제가 허락하는 정당한 수익으로 행해지는 일이 아닌 경우가 허다할 뿐더러, 저는 여러분에게, 체제가 허락하는 정당한 수익의 정도가 어디까지인지에 대해서도 묻고자 합니다. 얼마 전까지 매점매석은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금융자본주의에서는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수법의 돈 버는 방식이 생겨나고, 하루가 다르게 그 새로운 수법들을 제재하는 법이 생겨납니다. 법이란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대자본가들이 자본을 갖고 놀음 하는 것에 대한 법령 또한 현재의 것이 정의가 아닙니다. 법이란 우리가 만들고 우리가 공표하고 우리가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경제와 관련된 연구결과들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 도대체 어디까지 어떤 식으로 이 자본주의 체제를 활용할 것인지에 대해서, 단 한번이라도 제대로 된 논의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처럼 그저 내버려둔다면, 자본가들은 자신이 가진 자본과 그 자본만큼의 힘으로 언제나 자신들에게 유리한 법을 만들고 유지시키고자 할 것이고, 그에 대해 우리는 사실은 표결로서 대응할 힘이 있음에도 제대로 된 대응 한 번 못해본 채, 언제나 그들이 원하는데로, 그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국가를 유지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지금 저의 입장에서 꺼내는 것은 논지에 벗어난 사고를 유발시키는 것일 수도 있지만, 정치가들과 정치가들의 자녀, 자본가들, 소위 지도층이라 불리는 기득권력층과 그들의 자녀들은, 하나같이 합법적인 사유로 병역을 면제받고 있는 것이 실제 조사의 결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병역에 대한 문제는 왜 나는 갔는데 너는 가지 않느냐 하는 평등성에 대한 문제가 그 첫 번째 지적되는 부분인데, 이 형평성에 대한 부분에서 우리가 가장 눈 여겨 봐야 할 것은 형평성을 깨고 있는 것이, 자신의 결정으로 병역 대신 징역을 살고 있는 이들이 아니라, (이들은 현재까지 국가가 주장하는 법의 형평성에 의거한 징벌을 받고 있으므로) 돈을 주고 병역 등을 면제 받을 권리를 사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평등의 모양을 가장한 현재의 법이 자본으로 살 수 있는 면죄부를 언제나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돈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우리의 권리 정도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현재의 불평등의 가장 큰 근간이 되는 것입니다.



[2] 나의 아나키즘

이상으로 저는 법치 간접 민주주의 공화정의 온전한 실현이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길이다 함을 주장하는바가 아닙니다. 외려 저는 간접민주주의가 언제나 요구할 수밖에 없는 희생에 대해서도 인정할 수 없는 입장입니다. 요는 간접민주주의가 이상적인 상황에 도달한다 하여도, 이는 다수결에 의거한 표결 방식의 의사 결정 제도입니다. 즉, 앞서 누누이 말씀드렸듯이 모든 국민이 합의하는 법이라는 것이, 실상은 다수의 국민이 합의하는 법으로서; 그러니까 다수가 소수에게 실제적인 물리력을 행사하는 것이 이 다수결의 근간이 된다는 데에서, 가장 큰 폭력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범법자의 신체를 구속시키는 것은, 정의에 의거한 신성한 징벌이 아니라, 예컨대 우리의 경우, 오천만명의 인간들이 합심하여 한 명을 잡아서 자유를 빼앗고 가두어 놓는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실로 무서운 결정입니다. 법의 강제성이란 너무나 무서운 것입니다. 단지 '법이기 때문에' 라고 '법'의 이름을 들먹이고, 그 뒤에 우리가 비겁히 숨을 수 있는 내용의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법이란 우리의 힘입니다. 우리 모두의 힘을 빌어 합쳐놓은 것이 법으로, 모든 법집행은 우리 모두가, 오천만명 인간들이 다 제 손으로 행하는 일과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혹은 더 슬프게 말하자면, 법이 정하는 정도에 따라서, 삼천만명이 나머지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 혹은 이천 오백만 하고도 한명이 나머지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이 될 수도 있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법이란 법체제 구성원 모두의 권력이 동원된 물리적인 구속수단이기도 한 것입니다. 사형을 언도한다면 이는 그 사회 구성원 모두가 힘을 합쳐 한명의 인간을 죽이는 일입니다. 실상 신체의 자유를 구속시키는 것은 어떠한 의미로는 사회적 죽음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전쟁에 국가의 훈련된 정규군을 보내는 것은 그 전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살육의 행위들에 이 국가의 모든 구성원들이 합의하고 동참함을 의미합니다. 경찰이 철거민을 벼랑 끝으로 몰아 떨어지게 하는 것도, 이주단속반이 노동자를 창밖으로 몰아 떨어져 죽게 하는 것도, 시장 상인들을 개 패듯이 패서 실명 시키는 것도, 법의 이름 하에서 이루어지는 이상, 이는 우리 모두가 우리 모두의 손으로 합의하고 행하는 일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법에게 허용해주는 강제력이란 너무나 무서운 것입니다.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될 부분입니다. 하물며 군대라 하는 것은 전적으로 효율적으로 적을 살육 하는 데에 그 목적을 두고 있으며, 군의 모든 체제와 운영 방식과 훈련들, 모든 군물품들은 최대한으로 그 목적에 부합되게 그간 단련되어 온 것들입니다. 법으로서 이러한, 너무나 무서운 '군대'라는 것을 인정하고 운영하고 있을 때에는, 우리의 안전을 위해서, 라고 단언하고 끝낼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력의 이용이란, 자위와 안전을 위한다고 말 하여도, 전 세계가 합법으로 인정하여도, 그것의 근본은 내재하는 폭력이며, 그 폭력으로의 협박이며, 또한 실제적 폭력, 그것도 무시무시한 폭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도구를 그래도 굳이 선택하겠다면, 그에 대해서 끝없이 끝없이 사회의 구성원들이 계속해서 논의해도 부족하고 부족한 것입니다.
논의의 일개 주체로서, 사견을 말씀드리자면, 저는 개개인에게 개인의 권리보다 더 큰 권리(권력)을 부여하는 체제는 모두 근본적으로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개인 자신의 것보다 더 큰 권력은 곧 타인의 권리(권력)을 짓밟을 수 있는 폭력을 의미하며, 모든 개인이(심지어 모든 존재가) 동등한 권리를 갖고 있음을 우리가 인정하고 주창할 때에(실행할 때에) 진실된 의미의 평등이 실현되었다 말 할 수 있을 것이며, 이를 저는 아나키즘의 실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동등한 권리란 무엇인가. 애초에 동등한 권리란(권력이란) 언어도단이 아닌가. 그것을 정하는 이는 누구인가.



[4] 모든 권리에 대하여

예를 들어 만일 누군가의 무력 침공으로 나의 친구들과 나의 가족들이 위험에 처한다면 나는 응당, 기꺼이 총을 들지 모릅니다. 상대가 누구이건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는 나 또한 상대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살상을 행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나는 무조건적인 반전론자이며 무조건적인 비폭력주의자이며 무조건적인 평화론자이나, 앞서 지속적으로 이야기 했듯이 완벽히 옳은 그 어떤 것은 없으며, 결국 모든 것은 선택에 대한 문제입니다. 나에게는 물론 이 선택의 사항을 타인에게 강요할 권리가 없습니다. '모두에게는 모든 권리가 있다.' 그리하여 저는 저항권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그들이 잘못되었으니 그만두라고 할 권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또 동시에 그들에게 그만두라고 말 할 권리가 있으며, 나아가서는 저항권자들을 저지하고자 실력을 행사할 권리 또한 있는 것입니다. 이 무슨 무법상태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고 이야기 할 수도 있겠으나, 말 그대로 이러한 무법상태에서의 혼란을 막기 위하여 법이라는 것을 정하겠다는 것이 오늘날 법의 기본 취지인 것입니다.
모두에게 모든 권리가 있는 와중에, 우리는 숱한 권리들의 충돌을 볼 수밖에 없습니다. 예컨대 노동자에게는 파업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본가에게는 파업의 저지권이 없는가? 하면 응당 자본가에게도 파업의 저지권이 있습니다. 말 뿐일까, 자본가에게는 파업 노동자를 전부 해고할 권리도 있고 파업 노동자를 전부 폭력으로 다스릴 권리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노동자에게는? 노동자도 마찬가지 자본가의 목을 베어 공장문에 걸어놓을 권리가 있습니다. 자본가는 노동자들에게 총을 갈길 권리가 있습니다. 이처럼 권리란 그저 존재하는 것입니다. 파업권과 마찬가지로 물을 마실 권리도 있고, 국경을 넘을 권리도 있고, 지나가던 사람을 쥐어 팰 권리도 있습니다. 모두에게는 모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의 권리들에는 각기 서로의 권리들을 침해하는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나의 권리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폭력이 되어도, 그 권리는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누구이건 살아갈 권리는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살기 위해 살아 있는 타 생명을 죽이는 권리 또한 존재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 상충하는 권리를 나무의 가지치기를 하듯이 정리하는 것이 법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러니까 법체제 하에 살기로 약속하는 그 입법민주주의국가의 구성원 국민 모두가 전반적으로 합의하여 어떤 권리보다 다른 권리를 우선 하는 것으로 약속하는, 이 계약, 이것이 법인 것입니다. 법은 도덕이나 정의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사회 도덕이나 정의에 따라 우리의 합의가 방향을 잡을 것입니다만, 기본적으로 법은 이 권리들을 정리하는 하나의 약속, 계약일 뿐인 것입니다. 법이란 대다수의 사람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소수의 권리를 짓밟는 것을 그 근본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법은 지금 편하기 위해 자연하는 어떤 것의 성장을 잘라내고 존재하는 어떤 것을 인정치 아니하는 태도에 불과합니다.
무엇보다 법이 지키고 있다는, 이 ‘대다수’의 권리라고 설명되어지는, 공공의 이익이라는 부분은, 너무나도 애매모호한 것입니다. 예컨대 나찌정권 아래에서 외국인이나 병자, 노약자, 정신질환자들은 사회적 낭비를 막기 위해 죽이는 것이 법이었습니다. 이란에서는 간통죄의 여성을 땅에 묻어 머리만 내어놓고 돌팔매질해서 죽이는 것이 법입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국경을 넘으려 하면 공개처형, 총살하는 것이 법입니다. 프랑스에서는 법적으로 독재를 가결하기도 했습니다. 공화국 내에서 노예제도가 합법인 시기가 바로 얼마 전입니다. 공공의 권익은 설명되어지기 나름인 것입니다. 우리가 도덕적으로 혹은 윤리적으로 법으로서 지켜야 할 것들이라 지금은 당연히 여기고 있는 많은 것들은 시대나 상황에 따라 사실은 언제든지 유동 가능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즉, 법은 선택에 관한 문제입니다. 법은 우리 모두의 동등한 권리를 지켜주는 대리자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선택집합체에 불과합니다. 진실 된 의미로 우리 모두의 평등한 권리를 이야기 하자면, 우리는 법 그보다 더 나은 것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법에 안주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진실 된 의미의 자유를 잃는 것이고, 진실 된 의미의 평등을 잃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의 몇 가지 부조리한 법조항’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법이라는 체제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부조리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저는 지금 여러분에게 더 나은 (혹은 낫다고 이야기 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제시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닙니다. 저는 학문을 수행하는 학자도 아니고,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전문가도 아닙니다. 단지 오늘에 이 선언을 통해서, 지금의 것이 여전히 문제가 있으며, 우리는 더 나은 것을 찾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저 다시 한 번, 법이 우리 사회의 가장 마지막 지향점으로 마감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결국 모두가 갖고 있는 모든 권리는 만인이 평등하다는 다소 억지스럽게 정리된 단언으로 이야기 할 수 있는 것도, 임의에 따라 언제든 지정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모두의 모든 권리는 요컨대 있다고도 하고 없다고도 할 수 있는 선적인 차원의 것일지도 모릅니다. 말 그대로 모든 이의 모든 권리인 것이라고 밖에는 저로서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에 대한 우리의 선택이, 남아있는 중요한 과제인데, 그 선택을 지금처럼 쉬이 타자에게 대리시키고 말 것인가 하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저는 수많은 폭력들을 봤습니다. 구조적인 것, 상황이 만들어내는 것, 그러한 체제에 의한 폭력뿐 아니라 단순히 일개인이 타인보다 육체적으로 더 큰 힘이 있음으로써 행사하는 폭력까지. 그 모든 폭력들의 기인체인 부조리에 대해 눈을 감고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이 체제에서 사는 이상, 나에게 책임이 있기 때문에. 그 폭력의 현장을 내 눈앞에서 목도했기 때문에, 살아가는 나에게도 그 책임이 있기 때문에 나는 죄책감을 벗어던질 수가 없이 매일 매일을 살아갑니다.



[5] 부탁의 말씀

결국, 오늘 병역을 거부하겠다는 이 선언을 행하고, 징역의 길을 택하는 것은, 여러분들에게 나의 권리를 주장하는 바일뿐만이 아니라, 나 자신 또한 여러분들의 권리를 인정하는 기본적인 나의 입장 때문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을 자유가 있으나, 결국 여러분들에게도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역을 시킬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여러분들에게 부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자유를 빼앗지 말아 달라. 나의 권리를 빼앗지 말아 달라. 여러분들에게는 힘이 있습니다. 오천만명의 강제력으로 여러분은 언제든지 저를 구속할 수 있습니다. 부디 그 무시무시한 힘으로 저를 죽이지 말아주십시오. 제 가족들에게 슬픔과 고통을 안겨주지 말아주십시오. 저의 부재로 힘겨워 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고통의 시간을 주지 말아주십시오. 각고의 번민 끝에 내 놓은 결정, 더불어 가족에게 해서는 안 될 너무나 가혹한 슬픔 안겨주며 지은 결정을 건네 드리니, 신중히 받아 숙고해주시길 고대하겠습니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애끊는 마음, 애타는 마음이 든다는 말을 씁니다. 여기서 ‘애’라는 것은 ‘간(肝)’을 뜻하는 순 우리말입니다. 요즘에 와서 서양 의술이 들어와 해부학적으로 간이라는 것이 신체 일부의 장기만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지만, 예로부터 동양에서 ‘간’이라는 것은 우리 몸 속, 무엇이 있었는지 확실히 알지 못할 때부터, 우리 몸 속 그 자체를 칭하는 말이었습니다. 속도 없다 할 때의 그 속, '애', 이 간이라는 것은 통상 우리의 속, 마음 자체를 칭하는 말이었습니다. 남의 고통을 보고, 혹은 남의 슬픔을 보고서 애끊는다, 내 속이 탄다 하는 것은, 그저 남의 고통을 보고 생각으로 슬프다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도 같이 아프다는 뜻으로 말 하는 것입니다. 이웃한 오키나와에서는 치무구리사라고 하여, 오키나와의 토속어인 우치나구치에 이 속이 아프다는 말과 같은 표현이 있습니다. 치무구리사는 한자로 표하면 肝苦(간고)로, 말 그대로 간이 아프다, 속이 아프다, 애가 아프다는 말입니다. 일전에 김규항씨는 예수가 뭇 사람들의 삶의 고통을 바라보며 그 당시 그 사람들의 말로 간이 아프다, 속이 아프다는 표현을 언제나 했었다는 이야기를 한 바 있습니다. 토속의 우리 선조들, 어느 민족 어느 국가 그런 것을 차치하고, 옛 사람들, 온 세상에 예로부터 살던 사람들은 실로 타자의 고통을 마치 자신의 고통인 것처럼 아파하던 이들이었습니다.
많은 아나키스트들은 인간이 갖고 있는 심성 중에 상호부조의 심성에 기대를 걸고 있으며 뭇 사람들이 백일몽이라 치부하는 우리의 이상이 이 상호부조의 정신을 깨움으로 이루어질 것이라 말 합니다. 나 또한 같은 입장이라 말 할 수 있을 것이나, 어쩌면 늦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우리는 여러 과거의 사례들, 흔히 원주민이라고 말 할 수 있는, 열강의 확장으로 세계가 정복되어가기 이전, 땅에서 본디 살던 모든 족속들의 그 토속적 삶의 형태에서 어떤 이상적인 것을 찾고 있습니다. 실제로 어떠한 형태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증명을 하고자 합니다. 아나키즘이란 대단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런 촌의 삶들의 방식의 (형식적이건 전면적이건) 재현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네들에게도 폭력적인 면은 있었으며 어떠한 에덴동산이라도 끝내는 무엇인가에 물들어갔을지 모릅니다.
나는 그래서 다시 한 번 선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지금 언제라도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과거보다 오늘날 우리에게 선택의 힘은 더 커졌습니다. 과거에 선택의 힘을 전적으로 지니고 있던 권력층들이, 이제는 형식적으로나마 모든 선택의 힘이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나뉘어져 있다고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부터의 삶에 대해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처럼 강자들의 편의에 맞춘 세계에서 살지, 혹은 새로운 어떤 삶의 방식들을 찾아볼 것인지. 체제를 바꿔보고 정비해가며, 아이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볼 수 있습니다. 모든 과거의 실패와 환희의 날들, 그 실제적 정보들을 잘 연구해서, 새로운 사례를 만들어 볼 수 있습니다.
과학은 실재하는 것의 실체를 온전히 밝혀주는 것이 아닙니다. 과학은 우리가 모을 수 있는 정보를 최대한 모아서, 실체가 어떤 것인지 추측하여, 다수의 사람들이 인정할 수 있을만 하다 싶을 때, '그러한 것'으로 공표하여 정보를 정리하는 작업입니다. 인간의 본성, 인간이 여지껏 연구하여 밝혀온 것들은 확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성선인지 성악인지, 폭력성이 인간에게 항시 내재되어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것인지, 사실을 밝혀내는 것은 중요치 않을 것입니다. (소용이 없음을 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입장을 지정할 것인지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이미 오늘날의 생활방식으로 상호부조나 인간의 애타하는 마음 따위가 고갈된 상태라 하더라도, 이제 그것을 다시 살려내기 위한 방법들을 찾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교육이라는 선택을 할 수도 있습니다. 선전이라는 선택을 할 수도 있습니다. 최소한 '인간은 원래가 죄악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 존재이니, 살인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 존재이니, 팔다리에 족쇄를 채운 체 사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는 결론으로 살아가진 말아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확언할 수 있는 것은 지금까지의 근현대적 생활방식을 지속하는 이상, 인류가 전쟁에 직면하게 될 것임에 틀림없고(그것이 국지전이건 대규모 핵전쟁이건 반드시 전쟁은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체제는 전쟁을 하나의 산업으로 삼아 생존하고 있으며, 정치적 체제 또한 대대적인 대립과 갈등의 게임을 통한 이권 차지를 기본으로 삼고 있으므로. 자본가들 중에는 그들의 이익을 위해 전쟁이 일어나기 바라는 사람들이 언제나 존재합니다.), 전쟁으로 우리가 파멸에 이르지 않는다 하여도, 결국 지구의 우주적인 수명이 채 다 되기 전에 지구 자원 자체의 고갈에 직면하게 될 것 또한 틀림없습니다. 지금처럼 계속은 절대로 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대단한 신 체제의 전면적인 시작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대로 계속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새로운 방식에 대해서 논의 하고, 바꾸는 것을 시작이라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소유제도에 대해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생산의 체제에 대해서, 소비에 대해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고민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눈과 귀를 열고 있어야 합니다. 결국 번복을 하고 돌아가게 될지라도, 조심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뜻을 세우고 나아가야 합니다. 가만히 앉아 끝나기를 기다리고만 있는 것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8]

어떤 이들은 삶에 싸우고 있는 우리를 허황된 몽상가쯤으로 치부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본 것들. 우리가 몸으로 부딪쳐야 했던 그것들, 그 '현실'들, 혹은 현실이라 부르지도 못할 적의 투사체들. 그것들을 보았기 때문에, 느꼈기 때문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닷사람이 다른 바닷사람을 보면, 탄 배가 달라도 같은 바닷사람으로 뜨거운 애정을 느끼듯이, 우리는 결국 우리가, 같은, 사람이란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삶이 몰아간 자리에서 투사가 되어야만 했던, 모든 부조리에 맞서 싸우는 동지 여러분. 저들이 조소하듯 우리가 서로에게 아무런 실용적인 힘이 되지 못해도 좋습니다. 그들의 건조한 잣대를 안타깝다는 미소로 응대해줍시다. 그리고 서로에게 건네는 연대의 한마디, 아무 힘 없을지 몰라도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연대의 말 한마디, 그 마음의 전달만으로 우리는 무쇠 갑옷보다 더 질긴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이어져 있음을 느낄 때에, 우리의 승리는 시작할 것입니다. 사랑과 분노와 안타까움, 애타는(肝苦) 연대의 마음. 그것을 느낄 수 있는지 없는지를 생각 할 겨를도 없이, 우리의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되어질 따뜻한 그 무엇이 우리를 끝까지 살게 할 것입니다.
살아남아 사랑합시다.



안지환에서. 2010년 겨울의 초입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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