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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주 2003-10-11 12:00:32, Hit : 2661
Subject   [펌] '우리시대의 아나키즘'
오늘 한겨레 '책과 사람' 란에 나온거



<우리 시대의 아나키즘> 숀 시한




△ 아나키스트들과 노동자들이 함께 모인 집회.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에 새겨진 아나키즘 표징이 선명하다.


  

'평화의 반란군' 부활의 함성

한동안 아나키즘은 지상에서 사라진 이념처럼 보였다.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마지막이었다. 반파시즘 인민전선에서 스탈린주의 진영의 배반으로 프랑코 세력에게 패배한 뒤 아나키즘은 의미 있는 정치운동으로서 실체를 잃어버렸다. 두더지처럼 땅밑 세계로 들어간 아나키즘은 자신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레닌주의-스탈린주의의 사회주의 실험이 파산한 뒤 어느날 갑자기 땅밖으로 솟구쳐 올랐다.

1999년 11월 미국 시애틀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를 사실상 무산시킨 ‘반세계화 시위’가 그들이 햇빛 아래 자신을 온전히 노출시킨 지점이었다. 어떤 단일한 중앙집중적 조직도, 엄격한 관료주의적 위계도 없이 기기묘묘한 복장과 가면과 몸짓으로 등장한 이 ‘평화로운 반란군’은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새 집행기구를 농락하며 아나키즘의 부활을 선언했다.

아일랜드 출신 아나키스트 저술가 숀 시한이 쓴 <우리 시대의 아나키즘>은 20세기와 결별하는 순간에 20세기적 가치들을 비웃으면서 다시 등장한 이 유서 깊은 정치이념의 사상·역사·인물을 자유롭게 탐색한 일종의 아나키즘 입문서다. 아나키즘의 본류는 19세기 혁명가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에게서 형성돼 미하일 바쿠닌과 표트르 크로포트킨을 거쳐 아나코페미니즘의 창시자인 에머 골드먼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아나키즘 정신은 인류 역사의 시원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부처와 노자에게서 그 정신의 한 자락을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근대적 의미의 아나키즘은 17세기 영국의 급진 노동운동집단인 ‘디거스’를 기점으로 잡는다. 아나키즘은 그 정신의 핵심을 자율과 자치에서 찾고 있는 만큼, 사상에서도 독재를 허락하지 않는다. 정통과 이단이라는 구분은 이들의 이념과 어울리지 않는다. 따라서 이 책이 소개하는 아나키즘적 사상과 인물은 일반인의 선입견을 여지없이 깨뜨릴 정도로 광범위하다.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와 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아나키스트였음이 그들 자신의 말을 통해 드러나는가 하면, 인도 독립의 아버지 마하트마 간디가 아나키스트로 나타나며, ‘권력의 미시물리학’을 폭로한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아니키즘의 든든한 동맹자가 되고, 1970년대 펑크록그룹 ‘섹스피스톨스’는 음악으로 아나키즘을 실천한 사람들임이 밝혀진다. 이쯤 되면 ‘아나키즘 자체가 아나키하다’라는 말도 괜한 수사가 아니다.


반세계화와 함께 다시 등장한 아나키즘 입문서
'극단의 대척점' 마르크스와 니체를 원류에 포함
대립과 공유속 끝없는 내부긴장도 미덕으로 역설




△  우리 시대의 아나키즘/ 숀 시한 지음·조준상 옮김 / 필맥 펴냄·1만2000원


이 책은 아나키즘 스펙트럼의 두 끝을 ‘공산주의(코뮌주의)적 아나키즘’과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으로 본다. 아나키즘 안에 코뮌주의와 개인주의가 두 개의 본질처럼 들어 있는 까닭에 두 이념의 방향에 따라 아나키즘의 색깔이 확연히 나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더욱 의외인 것은 지은이가 두 극단의 사상적 뿌리를 보여주는 인물로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니체를 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르크스는 1870년대에 제1인터내셔널(국제노동자협회)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던 아나키즘의 대부 바쿠닌을 탄핵했으며, 니체는 당시의 사회주의 조류를 ‘해로운 환상’이라고 비판했다.

그런데도 지은이가 두 사람을 아나키즘의 원류에 포함시키는 것은 이들이 아나키즘의 철학적·사상적 기초를 놓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청년 마르크스의 인간과 세계 이해, 곧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변화할 수밖에 없으며, 특히 인간이 세계를 바꿔나감으로써 자신의 본질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아나키즘의 철학적 바탕을 이룬다. 니체의 ‘권력의지’, 곧 자기실현 충동은 “아나키즘 중에서도 개인주의적 흐름에 철학적 표현을 풍부히 제공했다.” 그가 <차라투스트라>에서 한 말은 암시적이다. “삶이 제 스스로 나에게 이런 비밀을 고백했다. ‘보라, 나는 거듭해서 삶 자체를 극복해야 하는 존재다.’” 니체에게 개인은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자기를 갱신하고 극복하는 존재다. 지은이에 따르면, 마르크스와 니체가 서로 대립하는 면이 있지만 동시에 공유하는 면도 있으며, 둘 사이의 긴장은 “서로 강조점을 달리하는 아나키즘 내부의 노선들을 반영한다”고 말한다.

아나키즘은 흔히 ‘무정부주의’로 번역되고 있지만, 아나키스트들은 이 번역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나키즘이 모든 형태의 정부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나키즘이 거부하는 것은 중앙집권적 정부, 국민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국가, 개인의 자유와 자율을 억압하는 권위이다. 그런 점에서, 아나키즘은 레닌주의적 마르크스주의, 곧 국가라는 권력기구를 당연시하고 반자본주의 혁명투쟁의 무기로 중앙집권적 당을 앞세우는 데에 반대한다.

지은이는 아나키즘이 지닌 미덕으로 ‘긴장’을 강조한다. “아나키즘은 하나의 긴장이다. …존재와 생성 사이에, 절망과 희망 사이에, 고독과 연대 사이에, 코뮌주의와 개인주의 사이에, 마르크스와 니체 사이에, 폭력을 거부하는 것과 평화주의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이다. …아나키스트들은 그런 긴장들과 더불어 살아간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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