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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7-01 20:20:42, Hit : 941
Subject   [데이비드 그레이버] 역순의 혁명
적린이 번역한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글 '역순의 혁명'을 복사해왔습니다.
원문은 http://blog.jinbo.net/redscaled/?pid=249 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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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순의 혁명 (혹은 폭력의 정치적 존재론과 상상력의 정치적 존재론 사이의 갈등에 대하여)

데이비드 그레이버



“모든 권력을 상상력에게.” “현실주의자가 되어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 ... 급진정치에 개입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표현을 수천 번은 들어 왔다. 이 표현들은 처음 들을 때면 대개 매혹적이고 흥분되지만, 익숙해져감에 따라 결국 진부함을 느끼게 되거나 급진적 삶의 배경 소음으로 사라져 가게 된다. 진지한 이론적 성찰의 대상이 되는 법은 거의 없다.


   현재의 역사적 위기(juncture) 속에서라면 이에 대한 성찰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결국 지금은 표준적인 정의들이 혼란스러워진 시기다. 우리는 혁명적 순간을 향하고 있거나, 어쩌면 연속적인 혁명 안에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그 의미에 대해서조차 분명한 개념을 갖지 못한다. 그리하여 이 글은 현실주의 realism. ‘real’, ‘reality’ 등의 말은 문맥에 따라 ‘현실적’, ‘실재적’, ‘현실’, ‘실재’ 등으로 옮겼다., 상상(력) imagination. 문맥에 따라 ‘상상력’, ‘상상’ 등으로 옮겼다., 소외, 관료제, 혁명과 같은 용어들 그 자체를 다시 사유하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의 결과물이 된다.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경위는 대안지구화 운동, 그 중에서도 특히 가장 급진적이고 아나키스트적이며 직접행동지향의 원리를 갖는 운동에 지난 6년여 간 참여해 온 것이다. 이 글을 이론적 보고서를 위한 서론쯤으로 생각해 주었으면 한다. 나는 무엇보다도, 1960년대 논쟁을 환기시키는 이 용어들이 이후 오랜 동안 잊혀져 왔던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 세력 내에서 공명하는 까닭이 무엇인지를 묻고 싶다. 급진적 사회 변혁과 관련된 개념들이면 하나같이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과거 억압 구조에 대한 격변적 단절을 기대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시점에서 혁명은 무엇을 의미하게 되는가? 이 질문들은 이질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내가 볼 때 그 답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나는 글에서 종종 의도적으로 과거 이론들을 슬쩍 언급하고 지나갈 것이다. 이들 운동의 경험과 그 이론적 사조에 기대어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기 시작할 수 있는지 알아 볼 참이기 때문이다.



다음이 내 주장의 요점이다.

1) 다른 무엇보다도 권력의 궁극적 실체(reality)에 대한 서로 다른 가정들이 우파와 좌파의 정치적 관점의 기반이 된다. 우파는 폭력의 정치적 존재론(political ontology of violence)에 근거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파괴의 힘에 대한 고려가 현실적임을 의미한다. 좌파는 그에 대한 회답으로 상상력의 정치적 존재론(political ontology of imagination)을 다양한 형태로 끊임없이 제안해 왔고, 이 속에서 궁극적인 실체로 고려해야 할 힘들은 사물들을 존재하게 하는 것들(생산력, 창조력)이다.

2) 상황은 좀 더 복잡해서, 힘 force. 대개 ‘힘’으로 옮겼으나, 정치학적 맥락에서는 동의나 소통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강제적으로 부과되는 물리적인 힘을 의미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에 문맥에 따라 ‘강제력’이라고도 옮겼다. (구조적 폭력)으로 지탱되는 체계적인 불평등은 언제나 편향되고 분열된 상상의 구조를 만들어 낸다. 그것은 우리가 “소외”라고 부르는 파편화된 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경험이다.

3) 혁명에 대한 통상적인 개념은 반란(insurrection)이다. 국가를 전복함으로써 현존하는 폭력적 현실을 쓸어 없애 버리고, 대중의(popular) 상상력과 창조력을 해방시켜 소외를 만들어 내는 구조를 극복한다는 아이디어다. 그런 창조력을 심지어 더한 폭력과 소외의 구조를 새로 만들지 않고도 어떻게 제도화시킬 수가 있는지가 진정한 문제라는 점이 20세기의 경험 속에서 분명해 졌다. 그 결과 반란 모델은 더 이상 완전한 활력이 없음에도, 이를 대체할 만한 것이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다.

4) [여기에 대한] 하나의 반응은 직접행동의 전통을 부활시키는 것이었다. 대중 행동은 실천 과정에서 통상적인 반란 시퀀스를 역전시킨다. 국가권력과 극적으로 대치한 다음 대중적 축제의 분출이 이어지는 것보다는, 대중 동원의 조직과정에서 새로운 민주적 제도를 만들고 일상생활을 재발명하는 것, 하위문화 집단 출신인 경우가 많은 활동가들은 새로운 직접민주주의적 제도를 창조해 궁극적으로 국가와의 대치로 이어질 “저항의 페스티벌”을 조직한다. 이것은 보다 포괄적인 재형성(reformulation) 운동의 오직 한 측면이며, 일부는 아나키즘의 영향으로 촉발된 듯 보이지만 페미니즘-이들 반란의 순간이 갖는 효과를 지속적 토대 위에 재창조하는 것을 궁극적 목표로 하는 운동-에 더 큰 영향을 받았다.



이 내용을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자.



1부: “현실주의자가 되라”



2000년 초반부터 2002년 후반까지 나는 뉴욕에 있는 직접행동네트워크(DAN, Direct Action Network)-당시 이 도시에서 전지구적 정의 운동(global justice movement)의 일부로 대중활동을 조직하고 있던 주요 단체-와 함께 일하고 있었다. 사실 DAN은 엄밀히 말해 단체는 아니었고, 정교하면서도 놀라우리만치 능률적인 합의과정 형태에 따라 직접민주주의 원칙 위에서 가동되는 탈중심화된 네트워크였다. 이 조직은 내가 이전에 여기(infoshop news)에 썼던 에세이에 등장하는 새로운 조직 형태 창조를 위한 꾸준한 노력 속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DAN은 순수하게 정치적인 공간 속에서 존재했다. 등록해야 할 물리적 재산도 없었고, 중요한 보물과 같은 것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람이 DAN에 차를 한 대 주었다. 이 일은 작지만 지속적인 위기를 불러 일으켰다. 우리는 차의 법적 소유가 탈중심화된 네트워크에게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차는 개인에 의해 소유되거나 가상적 개인인 법인(corporations)에 의해서 소유될 수 있다. 차는 네트워크에 의해서는 소유될 수 없다. 비영리 법인이 될(전면적인 재조직화와 더불어 평등주의 원칙 대부분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생각이 없는 한 유일한 방법은 법적 목적을 위해 소유주를 자원할 사람을 찾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그 자원자가 모든 벌금과 보험료를 지불해야만 했고, 다른 사람들이 주(state) 경계를 넘어 차를 몰고 가도록 할 수 있는 허가증을 작성해야 했으며, 차가 견인되었을 때 찾아올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DAN의 차는 곧 끝없이 문제를 만들어 냈고, 우리는 그냥 차를 포기하고 말았다.


   여기에 뭔가 중요한 뭔가가 있는 것 같았다. DAN과 같은 프로젝트-사회 민주화 프로젝트-는 견고한 물리적 현실처럼 보이는 것과 만나게 되면 녹아 사라져 버리는 쓸모없는 꿈처럼 인식되는 일이 왜 그리 잦은 것일까? 우리 경우에 관한 한 [조직의] 비효율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전국의 경찰서장들은 우리를 지금까지 다뤄본 중 가장 잘 조직화된 세력이라고 불렀다. 내게는 현실 효과(만약 그렇게 부른다면)가 발휘되는 까닭이 급진주의적 프로젝트가 크고 무거운 사물들, 즉 빌딩, 차, 트랙터, 배, 공업용 기계의 세계로 들어가는 순간 침몰하는 경향, 최소한은 끝없이 어려워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인 것처럼 보였다. 이것은 사물들이 민주적으로 등록하기 까다로운 어떤 본성과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DAN의 차가 그렇듯 끊임없는 정부 규제에 포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정부의 무장 대리자들의 눈을 피해 숨기는 것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나는 미국에서 이와 같은 사례들을 끝도 없이 봐 왔다. [예를 들면] 점거(squat)가 오랜 투쟁 끝에 합법화된다. 그러자 건물 조사원들은 갑자기 법적 인정을 위해서는(to bring it up to code) 만 달러에 이르는 수리비가 들 것이라고 공표한다. 조직자들은 이후 수년간을 빵 판매와 모금 활동 조직에 소비하며 보내야만 한다. 이것은 은행 계좌를 개설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고 개설 후에는 기금을 받거나 정부를 상대하는 집단이 어떻게 조직되어야 하는지(이 역시 평등주의적 집단은 아니다)를 법적 규제가 명시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모든 규제들이 폭력에 의해 강제된다. 분명 일상에서는 경찰이 술집에 들어와 건축법을 강제하는 일은 거의 없지만, 아나키스트들이 종종 발견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런 법규들이 존재하지 않는 듯 행세한다면 결국 그런 일이 일어난다. 경찰 곤봉이 실제로 나타나는 일이 드문 탓에 폭력은 더욱 더 보기 힘들어질 뿐이다. 이것은 이 모든 규제들-개인 사이의 정상적인 관계는 항상 시장에 의해 매개되며 정상적인 집단은 위계적으로 조직화되어 있다는 가정을 언제나 달고 있는 규제들-의 효과가 발산되는 곳은 정부의 강제력 독점이 아니라 사물 그 자체의 크기, 단단함, 무거움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이 때 “현실주의자”가 될 것을 요구받는다면, 인식하라고 요구되는 현실은 자연적이거나 물리적인 사실들이 아니다. 그것은 가정된 인간 본성의 추한 진실들도 아니다. 대개는 체계적 폭력의 협박이 갖는 효과를 인식하라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언어조차 관통하고 있다. 이를테면 왜 건물은 “실소유”(real property)나 “부동산”(real estate)이라고 불리는가? 이 용법에서 “실”(real)이라는 말은 라틴어 res, 즉 “사물”로부터 유래하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스페인어 real, 즉 “왕실의”(royal), “왕에 속하는”을 의미하는 말로부터 온다. 주권적 영토 내부의 모든 땅은 궁극적으로는 주권에 속한다. 법적으로는 여전히 그렇다. 국가가 규제를 강제할 권리를 갖는 까닭은 이것이다. 하지만 주권이 궁극적으로 기대고 있는 것은 완곡하게 “힘”이라고 일컬어지는 것, 즉 폭력의 독점이다. 지오르지오 아감벤(Giorgio Agamben)이 주권 권력의 관점에서 볼 때 어떤 것이 살아 있는 까닭은 죽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얘기했던 유명한 주장과 마찬가지로, 소유물이 “현실적인”(real) 까닭은 국가가 빼앗거나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방식으로, 국제관계에서의 “현실주의적” 입장은 국익 추구를 위해서라면 국가가 자신이 처분할 수 있는 능력은 무력을 포함해 무엇이든 사용할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여기서 인식되는 “현실”이란 무엇인가? 분명 물리적 현실은 아니다. 국가가 목적과 이익을 지니는 인간과도 같은 존재자(entity)라는 생각은 전적으로 형이상학적 개념이다. 프랑스 국왕이라면 목적과 이해관계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그렇지 않다. 자신[프랑스]이 하는 일을 “현실적”으로 보이게끔 하는 것은, 국민국가(nation-states)를 통제하는 자들이 군대를 파견하고 침략을 개시하며 폭탄을 투하할 수 있는 권력을 지닌 탓에, “국익”이라고 서술하는 것의 이름으로 조직화된 폭력을 사용하겠다며 협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은 바보스러운 일이다. 국익은 바로 당신을 죽일 수 있기 때문에 현실적이다.


   여기서 결정적인 단어는 “힘”으로, “국가의 강제력 사용의 독점”과 같은 말에서와 동일한 의미다. 이 말을 들을 때 우리는 하나의 정치적 존재론 속에 있게 되는데, 그 안에서는 파괴하거나 타인을 고통스럽게 하고, 또는 부수고 상해를 입히고 몸을 갈기갈기 찢어(아니면 남은 평생 동안 작은 방 안에 가둬) 버리겠다고 위협하는 권력(power)이 우주 운행의 에너지에 대한 사회적 등가물로 취급된다. 예를 들어 다음의 두 문장을 구축할 수 있게 해주는 은유와 전위(dislocation)를 생각해 보자.


   과학자들은 우주를 통치하는 힘을 이해하기 위해 물리 법칙의 본성을 탐구한다.
   경찰은 사회를 통치하는 법을 강제하기 위해 물리적 힘을 과학적으로 적용하는 전문가다.


   이런 생각들은 내게 우익 사고의 본질로 다가온다. 그런 미묘한 수단들을 통해 폭력이 사회적 존재와 상식의 척도를 정의하도록 허용해 주는 정치적 존재론.


   반면 좌파는 언제나 궁극적 현실이 무엇인지, 정치적 존재의 진정한 토대가 무엇인지에 대한 다른 가정 위에 존재해 왔다. 분명 좌파는 폭력의 현실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많은 좌파 이론가들은 이 점에 대해 사유를 거듭해 왔다. 하지만 그들은 [폭력에] 동일한 기본 지위를 주지 않으려 한다. 나는 대신 좌파의 사유가 내가 “상상력의 정치적 존재론”(창조력, 또는 생산이나 발명의 존재론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이라 부르고 싶은 것 위에 기초한다고 주장하려 한다. 오늘날 우리 대다수는 이것을 사회 혁명과 물질적 생산력을 강조하는 맑스의 유산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맑스의 용어들은 사실상 노동운동 또는 낭만주의의 다양한 계열 등 자신과 동시대에 있던 급진주의 세력의 가치, 노동, 그리고 창조력에 대한 광범위한 논의의 흐름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맑스 자신은 당대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자들을 경멸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까닭은 건축가가 벌과는 달리 상상 속에 먼저 구조를 만들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단 한 번도 포기하지 않았다. 맑스가 볼 때 사물에 대한 비전을 먼저 갖고 그 이후 존재하게끔 하는 것은 인간 고유의 속성이었다. 이 과정을 그는 “생산”이라 불렀다. 비슷한 시기에 생시몽과 같은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자들은 예술가들이 새로운 사회 질서의 아방가르드 혹은 “전위”가 되어(생시몽의 표현) 당시 산업이 실현시킬 힘을 갖게 된 장대한 비전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괴짜 팸플릿 발행자의 환상처럼 보였던 이것이, 산발적이고 불확실함에도 오늘날까지 지속될 만큼 확실한 영구 동맹이었던 것의 강령이 되었다. 그 이래로 예술적 아방가르드와 사회 혁명가들이 서로에 대해 묘한 친연성을 느끼면서 서로의 언어와 개념들을 빌어 왔다면, 그 까닭은 양측 모두 세계의 궁극적인 숨은 진실은 우리가 만드는 무엇이고, 또 그만큼이나 쉽게 다르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권력을 상상력에게”와 같은 문구는 좌파의 핵심 본질을 표현한다.


   물론 우파는 창조력과 생산력을 강조하는 혁명론자들이 국가, 군대, 살인자, 야만인의 침입, 범죄자, 통제불가능한 폭도 등 “파괴 수단”이 갖는 사회적, 역사적 중요성을 무시한다고 화답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좌익 체제는 그런 것들이 없거나 바라기만 하면 사라지는 듯 행세함으로써 보다 “현실적”인 접근을 취하는 지혜를 지닌 자들에 비해 실제로는 보다 많은 죽음과 파괴를 창출해 내도록 보증한다는 것이다.


   분명 이 이분법은 너무 단순하다. 균형을 맞추기 위한 다른 사례들을 수도 없이 댈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맑스 시대의 부르주아지는 극단적일만큼 생산주의적인 철학을 지니고 있어서 맑스 자신이 부르주아지를 혁명세력의 하나로 간주하기까지 했다. 또 우파 요소들에는 예술적 이상이 묻어 있었기 때문에 20세기의 맑시스트 체제들은 본질적으로는 우익적인 권력론을 포용하면서 생산의 결정성(determinant nature of production)에는 립서비스 이상의 것을 하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말들이 유용하다고 생각하는데, “상상력”과 “폭력”을 세상에 숨겨진 유일한 진실이 아니라 내재적인 원칙들, 즉 어떤 사회적 현실을 구성하는 등가적 요소들이라고만 보아도, 다른 틀로는 볼 수 없던 것을 많이 밝혀 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첫 번째 이유는, 상상력과 폭력이 예측가능하고 또한 무척 중요한 방식으로 어디서나 상호작용하기 때문이다.


   내가 다른 글에서 보다 자세하게 전개해 온 논의를 아주 도식적으로 개괄하는, 폭력에 대한 몇 가지 이야기들로부터 시작해 보자.



2부. 폭력과 상상적 전위(imaginative dislocation)에 대하여



나는 직업 인류학자다. 폭력에 대한 인류학적 논의의 대부분은 폭력행위는 소통행위이며 고유한 의미를 갖고 있는데, 폭력 행위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요소들은 바로 이 점이라는 진술로부터 시작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폭력은 주로 상상을 통해 작동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사실이다. 나는 두려움과 공포가 인간 삶에서 갖는 중요성을 평가절하할 생각은 없다. 자주 볼 수 있는 것처럼 폭력행위는 소통행위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점에서는 다른 형태의 인간 행동들도 마찬가지다. 내 생각에는 폭력에 관해 정말 중요한 것은 폭력은 타인과 소통하지 않고도 타인에게 영향을 줄 가능성을 제공하는 유일한 인간 행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폭력은 타인을 전혀 이해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그 사람의 행동에 비교적 예측가능한 효과를 미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될 수 있다. 타인의 행위에 영향을 주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방식을 시도해 볼 수 있지만, 그렇게 하려면 그가 스스로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지,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는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지, 그가 그 상황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와 비슷한 수많은 다른 것들에 대해 초보적 개념 정도는 갖고 있어야만 한다. 머리를 충분히 세게 내려친다면, 이 문제들은 별 상관이 없어진다. 사람을 때려 얻어낼 수 있는 효과가 매우 제한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폭력]은 충분히 현실적이다. 또한 다른 대안적 행위 형태는 공유된 의미나 이해에 호소하지 않고서는 어떤 효과도 발휘하지 못한다는 사실 역시 그대로 남는다. 타인에게 영향을 주려는 시도로써 폭력으로 위협할 때조차 이해를 어느 정도 공유할 것은 요구되지만(최소한 상대편은 자신이 위협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하며, 자신에게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해해야 한다), 다른 어떤 대안보다도 이해의 필요가 적다. 대부분의 인간관계, 특히 오랜 친구나 오랜 적과 같이 지속적인 관계들은 극단적으로 복잡해서, 경험과 의미로 무한한 밀도를 지닌다. 그런 관계는 지속적이고 미묘한 해석 작업을 요구한다. 개입된 사람들은 타인의 관점을 상상하기 위해 지속적인 에너지를 투입해야 한다. 반면 신체적 상해를 입히겠다는 협박은 이 모든 것과 단절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이것은 훨씬 더 도식적인 관계를 가능하게 한다. 예를 들어 ‘이 선을 넘으면 쏴버리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네가 누군지 뭘 원하는지는 전혀 상관치 않겠다’처럼. 멍청한 자들이 무기로 폭력을 선호하는 까닭이다. [폭력은] 지능적 반응을 통해 맞대응하기가 가장 어려운 멍청함의 형태이기 때문에 멍청한 자들의 최후 카드라고 부를 만하다.


   하지만 한 가지 결정적인 점을 해명해야 한다. 양측이 폭력의 능력에서 동등할수록 이 모든 경향이 타당성을 잃는다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동등한 세력과 폭력 경쟁에 가담하고 있다면, 가능한 한 상대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이 좋다. 군대의 참모는 맞수의 머릿속으로 들어가려 노력할 것이 분명하다. 신체적 상해를 야기할 수 있는 능력에서 어느 한 편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을 때에나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물론, 어느 한 편이 압도적으로 유리할 때는 실제로 쏘거나 패거나 한 방 먹일 필요조차 없다. 대개의 경우 협박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이것은 이상한 효과를 일으킨다. 폭력에서 가장 특징적인 면모-상상적 동일시가 거의 개입하지 않는 아주 단순한 사회관계를 강제할 수 있는 능력-가 실제적이고 신체적인 폭력이 가장 덜 발현될 때의 상황에서 가장 돌출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듯) 구조적 폭력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즉, 힘으로 하는 위협이 궁극적 지지대가 되는 체계적 불평등이 그 자체 폭력의 한 형태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구조적 폭력의 체계는 언제나 극단적으로 치우친 상상적 동일시의 구조를 생산하는 것처럼 보인다. 해석 작업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인식할 수 있는 모든 사회 형태는 이것 없이는 작동할 수 없다. 그보다, 압도적인 노동의 짐이 그 [구조의] 희생자들에게 전가된다고 말할 수 있다.


   가사일에서 시작해 보자. 1950년대 미국 시트콤에 지속적으로 등장했던 요소 하나는 여성을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농담이었다. 농담하는 사람은 물론 언제나 남성이었다. 여성의 논리는 언제나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취급되었다. 한편 여성이 남성을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느낌은 없었다. 여성에게는 남성을 이해하는 것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는 미국의 가부장제적 가족이 정점을 맞은 때였고, 여성은 자신의 수입이나 자원에 대해 접근권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결정권을 쥔 남성(relevant man)이 하는 생각을 이해하려 상당량의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여성의 미스테리에 대한 이런 유형의 수사는 가부장제적 가족이 갖는 영구적 특징에 해당한다. 여러 세대에 걸친 페미니스트들이 지적해 온 것처럼, 여성에 대한 남성의 권력이 있는 한 구조적 폭력의 형태로 간주될 수 있는 구조들은 모든 형태의 강제력에 의해 간접적이고 숨겨진 방식으로 지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 세대 여성 소설가들-버지니아 울프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은 이런 상황의 이면 또한 기록해 왔다. 겉보기에는 무신경한 것처럼 보이는 남성들의 에고를 관리하고 유지하며 적응시키기 위해 여성이 지속적으로 행하고 있는 일들, 즉 끊임없는 상상적 동일시의 작업을 포함하는, 내가 해석 노동(interpretive labor)이라고 불러 왔던 것을 말이다. 이것은 모든 수준에서 수행된다. 여성은 남성의 관점에서는 사태가 어떻게 보일지를 언제나 상상하고 있다. 남성은 여성에 대해 그런 일을 절대 하지 않는다. 젠더화된 노동 분업이 뚜렷한 대다수 사회에서(즉, 거의 대부분의 사회에서) 일상적인 남성의 일들을 여성은 무척 많이 알고 있지만, 남성은 여성의 일에 대해 거의 아무 개념도 없는 까닭은 이것이다. 여성의 관점을 상상해 보라고 요구하면 많은 남성이 겁에 질려 움찔한다. 미국에서 고등학교 문예 창작 선생님이 즐겨 사용하는 한 가지 수법으로, 학생들에게 자신의 성별이 바뀌었을 때를 상상하며 반대 성별의 구성원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어떤 느낌일지를 묘사하라는 과제가 있다. 결과는 언제나 거의 똑같다. 수업을 듣는 여학생 전부는 그 질문을 생각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소비했음을 보여 주는 길고도 자세한 글을 써 온다. 남학생의 절반가량은 글쓰기 자체를 거부한다. 남학생들은 대개 여성이 되면 어떨지를 상상해야 한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 깊은 혐오감을 표현한다.


   여기에 상응하는 사례들을 확장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일 것이다. 레스토랑 주방에서 문제가 생겨 점장이 사태를 수습하려 나타날 때, 노동자들은 일제히 달려들어 자신의 버전으로 이야기를 늘어놓겠지만, 점장이 여기에 관심을 가질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모두 입 다물라고 말한 다음, 문제를 일으킨 것처럼 보이는 사람을 아무나 골라 낼 것이다. “너 신참이지. 네가 망친 거지. 또 그런 짓 하면 해고하겠어.” 실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아내야만 하는 사람은 아무나 해고시킬 수 있는 권력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다. 가장 사소하고 내밀한 수준에서 발생하는 일이 사회 전체의 수준에서도 일어난다. 오늘날 “동정의 피로”(compassion fatigue)라는 딱지가 붙은 것을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정말 신기하게도 애덤 스미스였는데, 그 이야기는 『도덕감성의 이론』(Theory of Moral Sentiments, 1761년에 쓰여짐)이라는 책에 등장한다. 스미스의 관찰에 따르면 인간은 스스로를 동료들과 상상적으로 동일시할 뿐만 아니라, 그 결과 타인의 기쁨과 고통을 실제로 느끼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가난한 자들은 너무나 비참한 상황에 지속적으로 있기 때문에, 관찰자들은 자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그런 감정을] 희미하게 만들어 버리는 경향이 있다. 결과적으로 바닥에 있는 자들은 꼭대기에 있는 자들의 관점을 상상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소비하며 실제로 그들을 신경쓰는 반면, 반대의 일은 거의 절대 일어나지 않게 된다. 이것이 내가 진짜로 말하고 싶은 핵심이다. 메커니즘은 어찌 되었건 이와 비슷한 일이 언제나 일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주인과 하인, 남성과 여성, 고용자와 노동자, 부자와 가난한 자, 어떤 경우에든 구조적 불평등-구조적 폭력-은 이와 동일한 치우친 상상적 구조를 항상 만들어 낸다. 그리고 스미스가 제대로 관찰했던 것처럼 상상력은 공감을 수반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구조적 폭력의 희생자는 그 수혜자에 대해서 신경쓰고, 아니면 최소한 이 수혜자들이 [희생자] 자신에 대해 신경쓰는 것보다 훨씬 더 그들을 신경써 주는 경향이 있다. 이는 사실상 (폭력 그 자체를 제외하면) 그런 관계를 존속시키는 유일하고도 가장 강력한 힘일지도 모른다.


   관료주의적 과정을 이 현상의 확장으로 보기는 손쉬운 일이다. 관료주의적 상황 그 자체는 멍청함이나 무지의 형태가 아니며, 구조적 폭력의 현존 덕에 이미 존재하게 된 멍청함과 무지에 의해 만들어진 조직화 상황의 양태라고 말할 수도 있다. 분명 관료주의적 절차들은 마치 멍청함의 한 형태처럼 작동하는데, 현실적인 인간 존재가 갖는 모든 미묘함을 무시하고 모든 것을 이미 정립된 기계적, 확률적 공식으로 환원시키기 때문이다. 형태, 규칙, 통계, 혹은 설문지 등 가릴 것 없이 관료주의는 언제나 단순화의 문제다. 그 효과는 걸어 들어와 잘못된 점을 임의적이고 즉흥적으로 판단하는 점장과 궁극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복잡하고 모호한 상황에 아주 단순한 도식을 적용하는 문제인 것이다. 사실 똑같은 일이 경찰에서도 발생하는데, 결국 경찰은 총을 든 하위 통치자(administrator)에 불과하다. 경찰사회학자들은 범죄와 관련된 경찰 업무가 극히 일부라는 사실을 오래 전부터 보여 줘 왔다. 그보다 경찰은 그보다 국가의 폭력 독점을 직접 재현하는 존재로, 상황을 적극적으로 단순화하기 위해 다가오는 사람들이다(이를테면 누군가가 관료주의적 정의(definition)에 적극적으로 도전한 경우처럼). 이와 동시에 경찰은 현대 산업민주주의, 그 중에서도 특히 미국에서 거의 강박적인 수준으로 대중적인 상상적 동일시의 대상이 되어 왔다. 사실 대중은 천 개는 될법한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영화를 통해 경찰의 관점에서 계속 세계를 보게 된다. 심지어는 상상 속 경찰관의 관점이기 때문에, [이 경찰들은] 범죄와 싸우기 위해 시간을 보내지 깨진 후미등이나 가건물 법안(open container laws)과 같은 문제에 개입하는 일은 별로 없다.



2a. 초월적 상상 대 내재적 상상에 대한 내용 추가



물론, 상상 속의 경찰관과 상상적 동일시를 하는 것은 실제의 경찰관과 상상적 동일시를 하는 것과 다르다(사실 대부분의 미국인은 진짜 경찰을 오물을 보듯 피한다). 점점 더 디지털화되어가고 있는 세계 속에서 둘을 혼동하기가 아무리 쉬워지더라도 결정적인 구분이다.


   여기서 “상상력”이라는 말의 역사를 고찰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다. 고대와 중세의 공통된 개념으로 우리가 “상상력”이라고 부르는 것은 현실과 이성 사이의 통로로 여겨졌다. 물리적 세계에 대한 지각은 상상력을 거쳐야만 했는데, 합리적인 정신이 그 의미를 포착하기 위해서는 그 과정에서 [지각이] 온갖 종류의 환상과 뒤섞이고 감정이 실려야 했다. 의도와 욕망은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상상력”이라는 말이 현실적이지 않은 것, 즉 상상 속의 생물체, 상상 속의 공간(중간계, 나르니아, 먼 은하계의 행성, 프레스터 존의 왕국 등), 상상 속의 친구 등, 특별한 의미[곧, “공상”]를 지니게 된 것은 데카르트 이후다. 물론 이런 정의 속에서는 “상상력의 정치적 존재론”은 모순된 말이 된다. 상상력은 현실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상상력은 정의상 생각할 수는 있지만 현실성은 없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나는 후자를 “초월적인 상상력 개념”이라고 부르려 한다. 왜냐하면 몇 번을 읽던 상관없이 똑같은 것으로 남아 있는 상상의 세계를 창조하는 소설이나 다른 픽션 작품들을 모델로 삼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엘프나 유니콘, 텔레비전 경찰 등 상상 속의 존재들은 현실 세계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다.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상상력은 이와는 대조적으로 과거의 개념, 내재적인 개념에 훨씬 더 가깝다. 그런 상상력은 정적이거나 자유롭게 부유하는 것이 절대 아니며, 물리적 세계에 현실적인 효과를 발휘하려는 행동들의 프로젝트 속에 있고, 그런 까닭으로 인해 언제나 변화하며 적응해 간다는 점이 결정적인 차이다. 칼을 만들거나 장신구를 만들 때, 또는 친구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노력할 때도 마찬가지다.


   상상력에 권력을 준다는 68년의 슬로건으로 돌아가면 이 구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느낄 수 있다. 만약 이 슬로건을 초월적 상상력을 일컫는 것으로 생각한다면(가령 이미 형성되어 있는 유토피아적 도식) 결과는 재앙에 가까울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는 폭력에 의한 강제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같은 방식으로 혁명적 상황에서 다른 상상력, 내재적 상상력에 힘을 주지 않겠다고 주장한다면 마찬가지로 재앙이 생겨날 것이다.


   폭력과 상상력의 관계는 훨씬 더 복잡한데, 구조적 불평등은 매우 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만 모든 경우 사회를 상상적 노동을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분리하는 경향이 있다. 자본주의는 이 점에서 매우 극적인 사례가 된다. 정치경제학은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을 두 영역으로 나눠져 있는 것처럼 보는 경향이 있다. 즉, 언제나 공장이 패러다임인 임노동, 그리고 가사와 육아처럼 대부분 여성에게 전가되는 가사노동. 전자는 무엇보다 물리적 대상을 만들고 유지하는 문제로 간주된다. 후자의 경우에는 무엇보다 사람과 사회적 관계들을 만들고 유지하는 문제로 보게 된다. 분명 이 구분은 거친 묘사의 일부에 불과하다. 엥겔스가 살던 맨체스터가 되었든 빅토르 위고가 살던 파리가 되었든 대부분의 남성이 공장 노동자였고 대부분의 여성이 전업주부였던 사회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도 시작점으로는 유용한데, 흥미로운 분화를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산업의 영역에서는 꼭대기에 있는 사람들이 보다 더 큰 상상적 작업(즉, 생산품을 디자인하고 생산을 조직하는 일)을 떠맡는 반면, 사회적 생산의 영역에서 불평등이 출현할 때 바닥에 있는 사람들은 주요한 상상적 작업(예를 들어 내가 ‘해석 노동’이라고 부르는, 삶이 지속되게 하는 수많은 일들)을 하게 됨으로써 끝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 두 가지를 근본적으로 다른 종류의 활동으로 보는 것이 훨씬 쉬워서, 우리가 해석 노동, 또는 대개 여성의 일로 여기는 것을 노동으로 인식하는 것조차 어렵게 된다. 내 생각에는 [이 일들을] 주요 노동 형태라고 인식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다면, 근본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는 쪽은 인간을 향하는 보살핌, 에너지와 노동이다. 우리가 가장 신경을 많이 쓰는-사랑, 열정, 경쟁, 탐닉-대상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비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질적 재화의 생산은 사람을 만들어 내는 보다 큰 작업 과정에 속하는 하위 항목으로 간주된다. 사실 나는 자본주의에서 가장 소외적인 측면은 현실이 마치 그렇지 않은 듯, 그리고 사물의 생산을 증가시키는 것이 사회의 일차적 존재 이유인 듯 행세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3부. 소외에 대하여



20세기에는 죽음보다 진정한 삶(real life)의 부재가 더 공포스럽다. 죽고 기계화되고 분화된 행위들이 몸과 마음이 완전히 소진될 때까지 삶의 작은 일부를 하루에도 수 천 번씩 훔쳐 내며 죽음이 닥쳐온다. 하지만 이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부재가 최종적인 포화상태에 도달한 것이다.
라울 바네이겜, 일상의 혁명



창조력과 욕망-정치경제학 용어로 보통 “생산”과 “소비”라고 부르는 것-은 본질적으로 상상력의 운송 수단이다. 원한다면 구조적 폭력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불평등과 지배의 구조는 상상력을 편향시키는 경향이 있다. 소수의 엘리트만이 상상적 노동에 종사하고 노동자는 mind-numbering하고 지루하며 기계적인 노동에 종사하게 됨으로써, 노동자의 관점에서는 자기 자신의 노동으로부터 소외되어 있고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속한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상황이 생겨날 수 있다. 국왕, 정치가, 셀레브리티나 CEO 등이 주변의 모든 것을 잊고 거들먹거리는 동안, 그들의 아내, 하인, 보직, 매니저들이 그들의 환상을 유지시키기 위한 상상적 노동에 모든 시간을 소비하도록 만드는 사회적인 상황 역시 생겨날 수 있다. 불평등의 상황 대부분은 두 요소 모두를 결합하는 것 같다.


   이렇듯 치우친 상상력의 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주관적 경험은 우리가 “소외”라는 말을 사용할 때 지시하는 바로 그것이다.


   학계 좌파가 오래 전에 내버린 소외론이 혁명 세력에서 지속적인 호소력을 가져 온 까닭은 다른 설명이 없는 한 바로 이것인 것 같다. 세계 어디서든 아나키스트 인포샵에 들어갔을 때 볼 될 가능성이 높은 프랑스 저자들은, 아직도 대개 기 드보르나 라울 바네이겜과 같은 상황주의자들, 위대한 소외론자들(코르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와 같은 상상력 이론가들과 더불어)일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왜 그토록 많은 미국 교외 지역 십대들이 라울 바네이겜의 『일상생활의 혁명』(The Revolution in Everyday Life)과 같은 책에 매료되는지가 몹시 궁금했다. 결국 이 책은 무려 40년 전에, 그것도 파리에서 쓰여진 책이기 때문이다. 내 결론은 바네이겜의 책이 사춘기의 어느 한 시점에 중산층의 실존과 대면하게 되었을 때 느끼게 되는 분노, 지루함, 그리고 반감과 같은 감정에 대한 최고의 이론적 표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조각난 삶에 대한 감각, 궁극적 의미나 통합성과 같은 것은 전혀 없는 기분. 냉소적인 시장 체계가 그 희생자들을 상품과 스펙터클로 팔아 치우는데, 이는 그 자체가 시장이 파괴해 버린 총체성, 기쁨, 그리고 공동체 감각에 대한 작고 거짓된 이미지들을 표상한다. 모든 관계를 교환 관계의 형태로 치환시켜 버리고, 삶을 “생존”을 위해 희생시키며, 금욕을 위해 쾌락을, 공허하고 동질적인 힘의 단위나 “죽은 시간”을 위해 창조력을 희생해야만 하는 경향. 이 모두는 어떤 수준에서는 여전히 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문은 “왜”다. 현대 사회 이론은 여기에 대해 거의 설명해 주지 못한다. 포스트구조주의는 68년 직후에 대체로 이런 종류의 분석을 거부하는 데서 출발했다. 사회가 존재하는 자연스러운 방식이 있다고 가정하지 않고서는 사회를 “비자연적”이라고 정의할 수 없으며, 진정한 인간 본질이 있지 않는 한 “비인간적”이라고 정의할 수 없고, 통합된 자아 따위를 가질 수 없다면 자아는 “분열되어 있다”라고 말할 수 없다는 등의 생각이 사회이론가들 사이에서는 단순 상식이 되어 있다. 이런 입장들은 지지될 수 없기 때문에-왜냐하면 사회의 자연적 조건, 진정한 인간 본질, 통합적 자아와 같은 것이 없기 때문에- 소외의 이론은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이 내용들은 단순한 주장처럼 보이기 때문에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의 견해를] 반박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면 [소외의] 경험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정말로 생각해 보면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의] 주장은 보기보다 훨씬 덜 강력하다. 학계 이론가들이 말하는 것은 결국 무엇인가? 그들은 단일한 주체, 총체적 사회, 자연적 질서와 같은 개념들이 비현실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그저 우리 상상력이 만들어 낸 환상일 뿐이다. 정말로 맞다. 하지만 그 이외에 또 무엇이 될 수 있는가? 그리고 왜 그것이 문제가 되는가? 만약 상상력이 사회적, 물리적 현실을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구성적 요소의 역할을 한다면, 총체성의 이미지를 생산해 냄으로써 진행된다고 믿을 이유가 수도 없이 많다. 이것이 바로 상상력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실제로는 무한하게 복합적인(multiple) 존재들이지만, 그런 존재들을 생산해 낼 수 있기 위해서는 자신과 타인을 통합된 주체로 상상해야만 하며, 실제로는 혼란스럽고 경계가 없지만, 그런 사회관계를 생산해 내기 위해서는 통합적이고 경계가 설정되어 있는 “사회”를 상상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분열(disparity)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왜 특정 시간과 장소에서는 그에 대한 인식이 분노와 절망에 불을 붙이고 사회적 세계가 공허한 희극이나 사악한 농담처럼 느껴지게 하는가다. 나는 이것이 구조적 폭력의 필연적 결과로써 상상력이 뒤틀리고 파괴되는 결과라고 주장한다.



4부. 혁명에 대하여



60년대의 많은 급진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상황주의자들은 직접행동 전략을 통해 반격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스펙터클의 논리를 뒤엎는 창조적 전복 행위의 “상황들”을 창조하고 행위자들이 일시적으로나마 자신의 상상력을 되찾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들은 동시에 이 모든 것이 거대한 반란의 순간, 즉 “바로 그” 혁명(“the” revolution)을 반드시 이끌어 낼 것이라고 느꼈다. 68년 5월의 사건이 보여 준 것이 있다면, 국가권력을 빼앗는다는 목표가 있지 않은 한, 한 번의 근본적 단절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상황주의자들, 그리고 그들에게 가장 열광하는 현대 독자들 사이의 주요한 차이는 천년왕국적 요소가 거의 탈락되었다는 점이다. 천지가 곧 개벽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로가 될 만한 것이 하나 있다. 진정한 혁명적 자유의 경험에 가까워질수록 그 자유를 즉각 경험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아마도 오늘날 상황주의 전통 속에서 작업하는 집단 중 가장 고무적인 사람들일, 젊은 아나키스트 선동자(propagandists) 크라임에스닉 집단(Crimethnic collective)의 선언을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는 현실이라는 직물에 구멍을 냄으로써, 자신을 만들어 준 데 대한 답례로써 다시금 우리를 만들어 주게 될 새 현실을 일궈 나가며 우리의 자유를 만들어야 한다. 스스로를 계속해 새로운 상황 속에 처하도록 하는 것이 습관, 관습 법, 또는 편견의 관성에 방해받지 않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의 창출은 전적으로 스스로의 몫이다.”
   “자유는 해방의 순간에만 존재한다. 그리고 이런 순간들은 생각보다 드물지 않다. 변혁, 혁명적 변혁은 어디서나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그 속에서 역할 하나쯤은 담당하고 있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직접행동 논리를 이보다 우아하게 서술하기는 힘들 것이다. 이미 자유롭다는 듯이 행동한다는 도전적인 주장! 분명한 문제는 어떻게 하면 전체 전략에 기여할 수 있는가, 국가와 자본주의 없는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누적적 운동으로 연결될 것인가이다. 어떤 사람도 이점을 확신할 수는 없다. 대부분은 이 과정이 끊임없는 즉흥곡의 한 부분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반란의 순간들은 분명 올 것이다. 아마, 최소한 몇 개 정도는.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그 개요를 완전히 기대할 수 없는, 훨씬 더 복잡하고 다면적인 혁명 과정의 한 요소가 될 가능성이 가장 크다. 되돌아보면, 한 번의 봉기나 한 번의 성공적인 내전을 통해 최소한 국토 내의 특정 지역 한 곳에서는 구조적 폭력의 장치 전체를 중립화시킬 수 있고, 그 영토 안에서는 우익의 현실이 그냥 사라져 버려서 혁명적 창조력이 거침없이 분출될 수 있는 열린 장만이 남게 될 것이라는 낡은 가정만큼 확실히 나이브한 것은 없다. 그렇다고 칠 때 정말로 알 수 없는 사실은 바로 그렇게 보이는 순간이 특정 역사적 시점에는 있었다는 사실이다. 만약 새롭고 창발적인 혁명의 개념을 얻고자 한다면, 이런 반란의 순간들의 성질에 대해 재고찰해 보는 것으로 시작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런 순간들과 관련해 가장 주목해볼 만한 점은 어떻게 [이런 순간들이] 아무 곳도 아닌 곳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것처럼, 또 그 후에는 재빠르게 사라져 없어져 버리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가다. 이를테면 파리코뮨이나 스페인 내전과 같이, 불과 두 달 전에는 매우 온건한 사회민주주의 체제에 표를 던졌을 똑같은 “대중”(public)이 같은 투표에서 극히 일부 표만을 받았던 울트라 급진주의자들에게 갑자기 목숨을 거는 일이 어떻게 발생할 수 있을까? 아니면 68년 5월로 돌아가 보면, 학생/노동자 봉기를 강하게 지지했거나 최소한은 공감하는 것처럼 보였던 똑같은 대중이 이후 즉시 투표로 돌아가 우익 정부를 선출하는 것은 또 어떻게 가능했을까? 가장 흔한 역사적 설명-혁명세력은 실제로 대중 또는 그들의 이익을 대표한 것이 아니었고, 대신 대중 일부가 비합리적 흥분 사태에 사로잡히게 되었다는 설명-은 분명 부적절해 보인다. 무엇보다 그들은 “대중”이 시간이 흘러도 비교적 일정한 의견, 이해관계, 그리고 충성 따위를 가지는 실체라고 강조한다. 사실 우리가 “대중”이라고 부르는 것은 여론조사, 텔레비전 시청, 투표, 청원서 서명, 선출된 관료들에게 편지를 쓰는 것 또는 공청회 참석과 같은 특정 행위 형태를 허용하는 특정 제도 속에서 창조되고 생산되는 것이지 다른 무엇은 아니다. 이 행위의 틀은 특정 방식의 말과 생각, 논쟁, 토론을 함의한다. 유흥용 화학물질 사용에 탐닉하고 있는 동일한 “대중”이 동시에 그런 탐닉을 불법화하는 투표를 할 수 있다. 같은 시민 집합이라도 의회 체계, 컴퓨터 국민 투표, 또는 다층 구조를 갖는 공공 입법 계열의 한 층 등으로 조직화됨에 따라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문제에 대해 전적으로 다른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직접민주주의를 고안하는 내용을 담은 아나키스트 프로젝트 전체는 사실이 바로 그렇다는 가정에 기초하고 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미국의 경우 한 맥락에서는 “대중”이라고 일컬어지는 동일한 사람들의 집합이 다른 맥락에서는 “생산력”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다른 활동에 참여하고 있을 때는 “노동력”이 된다. “대부분의 미국 대중은 서비스 산업에 종사한다”와 같은 문장이 잡지나 논문에 절대 실리 일이 없듯이 [이 맥락에서] “대중”은 작동하지 않는 개념이어서, 기자가 그런 문장을 쓰려고 하면 분명 편집장이 바꾸려 들 것이다. 이건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대중은 겉보기에는 분명 일을 하러 가야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좌파 비평가들이 불평하곤 하는 것처럼 미디어가 항상 교통 파업이 통근자들의 능력을 [감소시키고] 대중에게 불편을 야기하는 것처럼 묘사하지만, 파업 중인 사람들 그 자신이 대중의 일부라거나 성공적인 임금 인상이 그 자체 대중의 이익인 것처럼 생각하는 법이 없는 까닭이다. 그리고 물론 “대중”은 거리로 나가지도 않는다. 그들의 역할은 공공 스펙터클의 시청자, 그리고 공공서비스의 소비자다. 사적으로 공급되는 상품과 서비스를 사거나 이용하려 할 때 똑같은 개인들의 집합이 다른 무언가(“소비자”)가 되며, 다른 행위의 맥락에서는 “민족”, “유권자”, 또는 “인구”라는 또 다른 딱지가 붙는다.


   이 모든 존재자들(entity)은 제도 및 제도적 관행의 산물이며, 다시금 특정한 가능성의 지평을 정의한다. 따라서 국회의원 선거에서 투표할 때는 “현실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는 의무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반면 반란의 상황에서는 갑자기 모든 것이 가능해 보인다.


   최근의 혁명 사유의 상당수가 던지는 본질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의 집합은 반란의 순간에 무엇이 되는가? 지난 몇 세기 동안의 관습적 대답은 “민중”(the people)이었고, 모든 근대 법체제들은 자신의 적법성을 궁극적으로 “제헌 권력”(constituent power)의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 찾는다. 즉, 무장한 채 봉기하는 민중이 새로운 헌법 질서를 창조하는 순간인 것이다. 반란 모델은 사실상 근대 국가의 개념 그 자체에 내장되어 있다. 유럽 이론가들 상당수가 그 기반이 변했다는 것을 이해하며, 정의상 새로운 민족국가 또는 관료주의 국가의 기초가 될 수 없을 존재자(entity)를 뜻하는 새로운 용어 “다중”(the multitude)을 제안했다. 나에게 이 프로젝트는 매우 양가적인 것처럼 보인다.


   내가 개발하고 있는 용어들 속에서 “대중”, “노동력”, “소비자”, “인구” 모두는 본성적으로는 제도적인 관료주의적 행위틀(frame of action)에 의해 존재하게 된다는 점에서 공통되며, 그 결과 깊은 소외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선거부스, 텔레비전 화면, 사무실 칸막이, 병원, 그들을 둘러싼 의례. 이것이 바로 소외의 장치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장치들이 인간의 상상력을 짓뭉개고 파괴하는 도구들이다. 반란의 순간은 이런 관료주의적 장치가 중립화된 순간이며, 언제나 가능성의 지평을 넓게 여는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 장치가 수행하는 정상적 업무 중 하나는 매우 제한된 [가능성]만을 강제한다는 것이다. (레베카 솔닛(Revecca Solnit)이 관찰했던 것처럼 사람들이 자연 재해 상황에서 매우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이것은 왜 언제나 사회적, 예술적, 지적 창조력의 분출이 혁명적 순간을 뒤따르는지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상상적 동일시의 불평등한 구조가 붕괴됨으로써 모든 사람이 세계를 낯선 관점에서 바라보려 노력한다. 불평등한 창조력의 구조가 붕괴됨으로써 모든 사람이 권리의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실용적인 측면에서도 즉각적 필요에 의해 자기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재창조하고 재상상해야 한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따라서 재명명의 과정은 양가적이다. 한편으로는 급진적인 주장을 내놓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누구의 이름으로 그런 주장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지를 알고 싶어 한다는 점을 이해할 만하다. 반면 만약 내가 지금껏 말해 온 내용이 사실이라면 우선 혁명적 “다중”을 호명하고(invoke), 그 배후에 놓인 역동적인 힘을 찾기 시작하는 전체 프로젝트는, 결국 자신이 찬양하는 모든 것을 죽여 없애고 말 바로 그 제도화 과정의 첫걸음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대중, 인민, 노동력 등) 주체는 본질적으로 행위의 틀인 구체적인 제도적 구조에 의해 만들어진다. 하는 일이 바로 존재이기 때문이다. 혁명세력이 하는 일은 현존하는 틀을 파괴해 새로운 가능성의 지평을 창조하고, 사회적 상상력을 급진적으로 재구조화하도록 하는 행위다. 이것은 정의상 제도화될 수 없는 행위 형태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이탈리아의 라파엘 라우다니(Raffaele Laudani)로부터 아르헨티나의 콜렉티보 시투아시오네(Collectivo Situaciones)에 이르는 상당수의 혁명사상가들이 “구성”(constituent)이 아닌 “탈구성의 힘”(destituent power)을 이야기하는 것이 낫지 않겠냐고 제안하기 시작한 까닭이다.



4a. 역순의 혁명



혁명에 대한 맑스의 접근에는 이상한 패러독스가 있다. 일반적으로 말해, 맑스가 물질적 창조력에 대해 언급할 때는 “생산”이라고 이야기하며, 이 시점에서 그는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먼저 사물들을 상상하고 이후 그들을 실제 존재하게 하려 노력한다는 점이 인간성을 정의해주는 면모라고 주장한다. 사회적 창조력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거의 항상 혁명의 용어들을 사용하는데, 하지만 여기서 그는 무언가를 상상하고 그것을 실존케 하려는 노력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유토피아주의이며, 그는 유토피아주의에 대해서는 알 수 없는 경멸(withering contempt)밖에 하지 않았다.


   여기에 대한 가장 관대한 해석은 맑스가 사람의 생산과 사회적 관계의 생산은 어떤 수준에서 다른 원칙에 따라 작동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원칙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론은 없었다는 것일 듯하다. 내가 초창기의 분석에서 풍부하게 참조하고 있는 페미니스트 이론의 출현이 아니었다면 이 쟁점들에 대한 체계적 사고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나는 이것이 페미니스트 이론이 자신의 하위분야로 재빠르게 후퇴하여 대부분의 남성 이론가들의 작업에 거의 영향을 주지 못했던, 구조적 폭력이 상상력에 미치는 효과에 대한 깊은 성찰이라는 점을 추가하고 싶다.


   그렇다고 볼 때, 최근에 새 혁명 패러다임을 개발하는 진정한 실천 작업의 대부분이 페미니즘의 작업이기도 했다는 사실, 페미니스트적 관심사가 그 변환 속에서 주요 추동력이 되어 왔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현재 미국에서 합의 및 다른 직접민주주의 과정의 형태에 대한 아나키스트적 강박의 직접적 기원은 페미니스트 운동에서의 조직화 문제로 거슬러 올라간다. 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반, 아나키스트의 영향을 받은 작고 친밀한 집단으로 시작한 [조직]들이 빠른 규모 성장을 겪으며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대다수는 의사결정에서의 합의 추구를 포기하기보다는 동일한 원칙을 보다 형식적인 형태로 개발하려 노력하기 시작했다. 그 다음에 생겨난 것은 (이전에는 자기 자신의 합의 도출 과정을 종교적 실천으로 간주했었던) 몇몇 급진적 퀘이커교도의 훈련 집단(training collectives)이다. 이미 70년대 후반 반핵 캠페인의 직접행동 시기에 친연적 집단, spokescouncils(?), 합의와 촉진(facilitation) 장치 전체가 현대와 유사한 형태를 취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 쏟아진 새로운 합의 과정 형태들은 지난 수십 년 동안 혁명적 실천에서 가장 중요한 기여가 되었다. 그 대다수가 실용적 조직화(practical organizing)에 참여했던 (아나키스트 전통을 따르는 사람이 대다수인) 페미니스트들의 작업이었다. 이는 바닥으로부터의 조직화나 아나키스트적 의사결정 과정에 직접 참여한 적은 없지만 원칙으로서 아나키즘에 이끌렸던 남성 이론가들이 아무런 쓸모없는 허상처럼 보이고, 비현실적인 합의 개념처럼 보여 찬성할 수 없던, 다른 경우라면 동정적 발언에 불과했을 것을 포함시켜야만 할 의무를 자주 느꼈다는 사실을 보다 더 아이러니하게 만든다.


   대중 행동의 조직 그 자체-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듯이 저항의 페스티벌-는 해방의 경험, 현기증 나는 상상력의 재편, 자연발생적 반란이 거둔 성공의 경험에서 가장 강력한 모든 것을 제도화하려 했던 실용적인 실험들로 간주될 수 있다. 제도화까지는 아니더라도 필요할 때면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했던 것이다. 참여자들에게 미친 효과는 마치 모든 것이 역순으로 일어나는 듯 보이는 것이었다. 혁명적 봉기는 가투로 시작되며, 성공했을 경우 대중적인 흥분과 축제의 분출로 이어진다. 이후 제정신으로 돌아오면 새로운 제도, 의회, 의사결정 과정,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일상의 재발명이라는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 최소한 그런 것은 이상이고, 인간 역사에서는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한 순간이 분명 있었다. 그런 자발적 창조는 언제나 새로운 형태의 폭력적 관료제에 의해 잠식됨으로써 끝나는 것처럼 보였지만 말이다. 하지만 내가 언급했던 것처럼, 이는 관료주의가 권력의 상황과 구조적인 맹목을 직접 조직화하는 역할을 얼마나 했던, [이 혁명적 순간들을] 자신이 창조해 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소간은 피할 수 없는 결과다. 관료주의가 진화하는 이유는 그것들을 관리하기 위해서다.


   이것은 직접행동이 반대 방향으로 진행되는 이유 중 하나다. 대다수의 직접행동 참여자는 아마 일상을 재발명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끝나는 하위문화로부터 왔을 것이다. 그렇지는 않더라도 행위는 협의회, 회의, 그리고 ‘과정’에 대한 끊임없는 손질 등 새로운 집합적 의사결정 형태를 창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며, 이 형태들은 거리 행동과 대중 페스티벌을 계획하는 데 이용된다. 결과는 대개 무장한 국가 대리자들과의 극적인 대치다. 대부분의 조직자들은 사태가 대중적 반란으로 고양되는 것을 보고 싶어 하고 또 그와 비슷한 일이 가끔 일어나지만, 대부분은 어떤 종류든 현실과 영구적 단절의 표현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보다 느리고 고통스러운, 대안 제도를 창조하는 투쟁을 위한 일시적인 광고-시식이나 시각적 자극의 경험이 나은 표현일수도 있겠다-의 한 꼭지 역할을 한다.


   내 생각에 페미니즘의 가장 중요한 기여는 모든 사람에게 “상황”은 스스로 생겨나지 않는다는 점을 계속 주지시킨 것이다. 여기에는 엄청난 양의 작업들이 필요하다. 역사의 대부분에서 정치로 여겨졌던 것은 본질적으로 극장 무대에서 상영되는 일련의 퍼포먼스와 같은 것으로 만들어져 왔다. 정치사상에 대한 페미니즘의 가장 큰 선물 중 하나는 이런 무대를 만들고 준비하고 청소하며, 심지어는 그 무대를 가능케 하는 비가시적 구조들을 유지하는 사람들,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계속 인식시켜 왔다는 것이다. 정상적인 정치 과정은 물론 그런 사람들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고, 여성의 일의 주요 기능은 스스로를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직접행동 세력 내에서의 정치적 이상은 차이를 지우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다르게 말하자면, 행위는 상황의 생산 과정이 상황 그 자체만큼이나 해방적인 것으로 경험될 때 진정한 혁명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상상력의 재배치 속에서 진정으로 소외되지 않은 경험 형태를 만들어 내는 실험이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다.



결론



(최소한 지구의 많은 지역에서) 국가권력이 일시적 중지 상태에 있기는커녕 일상 경험의 모든 측면을 뒤덮고 있어서, 수표를 발행하거나 자동차를 소유하고 운전하도록 허가된 집단의 내적 조직 구조를 무장한 국가 대리자들이 규제하려 개입하는 맥락 속에서라면 그렇게 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현재의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관료제가 거의 모든 것을 포위하고 있어 더 이상 보이지조차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현재는 역사 최초로 실질적인 전지구적 행정 체계를 만들어 낸 때다. 이와 동시에 끊임없는 규제와 억압, 성차별주의, 인종적 지배와 계급적 지배의 맥락 속에서 작동하는 압력은 직접행동의 정치에 가담한 사람들이 의기양양함과 신경쇠약 사이에서, 모든 게 가능해 보이는 상황과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 사이에서 반복적으로 널뛰기하는 경험을 하게 한다. 세계 일부 지역에서는 비교적 쉽게 자율성을 획득할 수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고립 또는 거의 전적인 자원 박탈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서로 다른 가능성의 지대 사이에 어떻게 동맹을 창조할 것인가가 근본적인 문제다.


   하지만 이런 주제는 이 글의 범위를 넘어서는 전략의 문제일 것이다. 내 목표는 그보다 소박하다. 많은 전선에서 혁명 이론은 혁명적 실천보다 훨씬 느리게 앞으로 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직접행동의 경험으로부터 역방향으로 작업하여 새로운 이론적 도구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시도해 보는 것이 나의 목표였다. 결정판을 내려는 생각은 전혀 없다. 심지어는 쓸모가 없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재-상상이라는 보다 넒은 프로젝트에 기여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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